목록프랑수아 줄리앙 (53)
모험러의 책방
「『장자』는 의지에 따른 결의로부터 우리를 은밀히 벗어나게 만드는 이런 스트레스 해소의 이완(의미 부여와 행위 그리고 의무들로부터의 이완)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항상 스토아 학파의 주제와 같은 어떤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사실 죽음과 삶, 존속 또는 사라짐, 불행 또는 영광, 가난 또는 부유함 등의 영고성쇠는 "개인적 조화를 어지럽히고,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 침투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배경에서는 스토아 학파와의 차이가 다시 한 번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혜"란 우리가 이러한 영고성쇠를 뛰어넘어 "극복하고" 조화로운 삶을 "지속시키도록" 노력함(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과 "소통"하는 가운데, 통(通)의 이중적 의미) 속에 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외부의 사물에 근거하면서도자신의 정신을 자유롭게 전개시키기 위해서,우리는 우리의 내적 균형을 배양할 수 있는 방식으로응당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신뢰해야만 한다. - 『장자』에서 16/03/18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에서 재인용. 2016/03/14 - 억지로 하는 일은 생명력과 에너지를 소모한다2014/10/23 - 초학자가 해야 할 것은 명상2014/04/06 - 자득(自得)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공동체2013/04/08 - 독락(獨樂)장자 프랑수아 줄리앙
「목적과 행복, 이 두 개념에 대한 결합은 서구인의 사유에 깊숙이 닻을 내리고 있어서, 그들 사유의 오랜 전통이 되었다. 이러한 결합은 그들 사유의 토양과 초석, 그리고 환경을 이루었다. 비로 이러한 결합 위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아리스토렐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I, X)은 이러한 결합을 전제할 필요가 없이 자명한 것으로 놓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려고 하지도 않고 물음을 던지지도 않는다.」* 16/03/18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2013/08/07 - 인생은 그냥 있는 그대로 있다2014/09/02 - 동양철학이 철학이냐? 불교가 종교냐?2015/09/07 - 현자는 더는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지..
「뱃사공은 배를 다루고 조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배를 흘러가게만 하면 된다. 내가 대상의 운행 방식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이러한 궁극의 단계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 나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 즉, 그것은 “자연스럽게” 될 뿐만 아니라, “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물 안에 있는 이 헤엄치는 자를 따라가듯이, 우리는 땅 위에 있는 무용수를 따라가 볼 수 있다. 무용수는 완벽하게 춤을 추는데, 그 이유는 그의 모든 동작들이 마치 “명”에 따라 행해지듯 ― 장자에서 매우 적절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무용수는 그를 이끄는 이러한 춤의 운행성에 내재해 있는 순수 논리가 자신의 온몸..
「옛날에 한 목공은 마치 신이 빚어낸 것처럼 너무나 훌륭한 종 받침대를 만든 다음에 말하길, “세상사로부터의 초연함과 ‘잊어버림’(보상과 칭송에 대한 잊어버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잊어버림)을 통해 내가 깨달은 진리는 나의 ‘호흡-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19장, 곽경번 판, p.658).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모든 사람이 가장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피카소는 목공의 이러한 고백에 가장 훌륭한 해석을 제공해주고 있다. “각각의 존재는 같은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이 에너지를 수만 갈래로 나누어 소모한다. 나는 모든 에너지를 단 하나의 방향, 즉 그림에 쏟아붓고, 그것을 위해 나머지 것들 ― 당신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나 자..
「인간의 삶은 숨-기(氣)의 집중이다. 이러한 기의 집중으로부터 삶이 나오고, 그 기가 소산되면 죽음이 다가온다. ······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장자는 “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그것을 교통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것을 단일하게 묶어주는 바로 이러한 기이다”라고 말한다(22장, 곽경번 판, p.733). 이 간결한 경구는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우선 서구인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급진적으로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해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언명은 그것이 지닌 철저한 자연주의적 특징 ― 현상계를 넘어서고, 그것과 단절된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도입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 때문에, 쉽사리 유물론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여기에서의 원인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삶을 양육함(하늘의 뜻에 따라)의 조건이자 결론이다. 첫 번째 경우(무엇인가를 획득하는 것)는 성문 앞에서 근무하는 세금 징수원의 예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성문을 통과하는 행인들로부터 돈을 내라고 요구하거나 강요할 필요도 없이 세금을 거두어들인다(20장, 곽경번 판, p.677).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는 “분명히” 돈을 받긴 하지만, 정확히 계산하지도 애쓰지도 않으면서 “대충” 받는다. 사람들은 그를 “멍청한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자신의 내적 삶을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도록 영위하는 사람은 겉으로 보면 멍청한 사람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만 집중할 뿐, 어떠한 사람 ― 세금 지불을 거부하는 “폭력적인 사람”이든, 자신이 지불할..
「장자는 여기에서 종 받침대를 제작하는 목수의 예를 드는데, 그 받침대를 구경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신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경탄을 금치 못한다. 도대체 어떠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 목수는 대뜸 어떠한 기술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종 받침대를 제작할 때의 마음 자세를 설명해준다. 즉, 그는 매일매일 똑같이, “이익”이나 “보상”을 받을 것을 또는 “칭찬”을 듣거나 “비난”을 받을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왕궁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 내지 사지”까지도 잊어버린 경지에서, 모든 외부의 걱정거리를 잊은 채 오직 능숙한 솜씨에만 전 신경을 집중시키며 숲 속으로 들어간다. 숲 속에서 그는 우선 “외형이 완벽한 나무의 천상적 본성”에 대해..
「다른 한편, 나를 부추기고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전체로서의 세계에 끊임없이 생기를 불어넣고 나를 그 세계의 에너지에 접속시키면,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이러한 반응성은 나의 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나를 지탱시키면서 활력 있게 만들어준다. 반면에 “욕망은 깊고, 하늘로부터 오는 원동력은 피상적이 되면”, ― 장자는 간결하지만 핵심을 찔러 언급하길 ― 달리 말해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외적 자극이 강하면, 나를 생명력의 원천 그 자체에 연결시키는 내적 자극은 약화되어 나타나고 희석되며 시들어진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내적 자극은 전적으로 외적 자극의 지배를 받아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장자가 욕망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난하지도 금욕주의의 미덕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지도 않고 ..
「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키웠으나 호랑이가 밖으로부터 그를 먹어버렸고,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외면을 키웠으나 질병이 그를 내부로부터 공격했다. 이 둘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배후에서 어슬렁거렸던 불운을 후려쳐 물리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정으로 생명을 보양하는 길은 그러므로 이 두 극단 사이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중용이 단순히 은둔적 삶과 사회적 삶이라는 두 극단으로부터 동등한 거리에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양 극단의 삶으로부터 단순히 등거리만 유지하는 삶은 불가피하게 고정화해, 삶을 쇄신시키지는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새롭게 거듭남의 기술은 이 두 극단을 번갈아 채택하는 것이다. 공자(보통 장자는 공자를 냉소적으로 묘사하지만, 여기에서는 분명히 중용의 ..
"산다는 것 자체는 어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고(만약에 그것이 투사와 허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하지도(그것의 실재를 믿지 않음으로서) 않다. 그것은 단지 의미를 넘어서 있을 뿐이다."* 16/02/21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2015/09/07 - 현자는 더는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2015/10/28 - 비트겐슈타인의 인생 노트2015/08/06 - 행복의 반대말은 무의미2014/11/12 - 유학의 정신2015/05/21 - 무의미의 낭떠러지와 환상의 늪 사이2014/10/12 - 도 안에서 사는 것은 어떤 목적이 없다2013/08/07 - 인생은 그냥 있는 그대로 있다프랑수아 줄리앙
「먼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념의 기능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 정체나 선거 정책과 관련해서 모델화는 일반적이며, 이런 점은 서구적 근대성을 수용한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줄리앙은 정치 영역에서 모델화의 특수한 기능을 강조한다. 정치 영역에서 정책이나 이념을 제시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상황이라는 변수가 나타나며 따라서 모든 이념이 그대로 실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념이나 모델의 제시는 적용이 아닌 협의를 위해서다. 모델화는 민주주의의 원리다. 정책 모델을 구상하고 제시하는 것은 정책 모델을 완벽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입장을 취하며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 모델은 논쟁을 조직하는 데 사용된다. 결국 이념..
「『손자병법』의 영향으로 동아시아권에서 널리 회자되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의 의미도 효율성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싸우지 않고 승리한다는 것은 도덕적 관심도 아니고 막연한 추상적 담론도 아니다. "이런 '싸우지 않음'의 이상은 도덕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단지 승리가 예정되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싸우지 않음'의 이상은 추상적 개념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사소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단계에서 향후 방향이 가장 정확히 진행되는 방식에 주의가 집중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상향과 가장 동떨어진 방식으로, 모든 주어진 상황을 특징짓는 효력 있고 장악력이 있는 결과를 '단순히' 이 결과의 방향에서 유리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사물의 성향』, 4..
「서구 전통 사상은 모델화의 역사다. 서구적 전략은 모델화의 치밀성에 달려 있다. 실현할 대상을 행동하기 전에 관념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모델화의 전통은 이념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의 전통은 그리스 사상이 불완전한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를 지시하기 위해 선험적 관념을 설정한 것에 뿌리를 둔다. 이념은 실천해야 할 이상이고 목적이다. 이념 추구 성향은 기독교로 계승되고 서양 근대에 와서 과학과 자유주의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약 2세기 전 중국은 이념 또는 모델화 전통을 앞세운 서구적 근대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대 중국의 위상은 세계 전체의 미래와 직결될 정도로 중요해졌지만 동시에 중국은 전통사상과 서구적 이념 간의 갈등을 처리해야 할 과제를 떠안고 있다. 줄리앙의 전략론은 이런 문제의식을..
「나는 중국에서 발전시킨 효능의 사유에서 중대한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비록 모델화가 기대된 효율성의 관점 자체에서는 효과가 덜하더라도 모델화의 장점을 본다. 전략에서 효능의 사유는 적합하지만 정치에서는 맹점이 있다. 특히 프랑스의 정치 영역에서 제도뿐 아니라 선거 공약에서 모델화가 대단한 정도로 시행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선거 공약도 단기 또는 중기에 걸쳐 투영된 모델화다. 그러나 모델화를 시행하는 것은 제안된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다. 정당들이 공약을 작성할 때 그것이 공약을 그대로 적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곧이어 '주변 상황들'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토록 어리석지 않다. 그렇다면 정치 영역에서..
「전략가는 좌절하지도 않고 자신을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전략가는 앞으로 다가올 상황의 쇄신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생황 쇄신 속에서 자체적으로 작동하면서 그를 회복시켜줄 요인들을 살핀다. 문화혁명 초기에 덩샤오핑은 결코 마오쩌둥에게 맞서지 않았고 그후에도 '4인방'이라고 불리는 이들과 맞서지 않았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만약 그가 마오쩌둥과 4인방에게 맞섰다면 그는 부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해임, 좌천, 비판, 야유를 그대로 견뎠다. 그는 자아비판을 실행했다. 이 당시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생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지속적 혁명'은 일시적으로 지속될 뿐이고 그를 무너뜨렸던 적대 요인도 역시 고갈되어가면서 진행될 것이라는 점, 또는 언제나 "혁명파'가 '전문가'를 ..
「만일 주도 요인이 발아 상태이거나 단지 기미가 보이는 것이라고 할 때, 그런 주도 요인을 탐지해내고자 하나 그것조차 발견하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의거할 아무것도 없고, 나를 실어갈 일말의 유리한 요인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컨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무엇인가 할 경우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은 물론이고 숙명적으로 파멸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어쩌면 아름답고 비극적이며 영웅적일지 모르겠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는 일이다. 형세를 평가했을 때,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유리한 기미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대로 기다려야 한다. 알다시피 세상은 쇄신을 멈추지 않으며 내가 개입된 상황이 쇄신되는 가운데 내가 다시 의거할 수 있는 다른 형국이 반드시 진행될 것..
「그러나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는가? 중국 사유의 중심 용어는 '변화'다. 행동하기보다는 변화시킨다. 이는 현자뿐 아니라 전략가에게도 해당된다. 현자는 인류 전체를 '변화'시키고 전략가는 적을 변화시킨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적이 휴식을 취한 상태로 오면 피곤하게 만들어야 한다. 즉 변화시켜야 한다. 적이 결집되어 나타나면 분열시키는 등, 적이 점차적으로 침착성을 잃고 결국 분열되고 굶주리고 고갈된 상태로, 즉 역량을 잃은 채 내게 나타나도록 하는 절차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적을 공격하면 바로 그가 굴복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 변화는 지목된 주체를 가리키기보다는 영향을 통해 주변에 스며들고 확산되는 방식으로 은미하게 진행된다. 따라서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변화의 결과만을 볼..
「맹자는 피해야 할 두 개의 암초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싹을 잡아당겨서 직접적으로 성장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는 목적성이 있는 적극적 행동주의로서 성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효과가 숙성하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밭의 가장자리에 서서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즉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모든 농부가 알고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답하겠다. 싹을 잡아당기는 것도 아니고 단지 싹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아니다. (과정을) 그대로 놓아두되 그냥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다. 맹자의 말을 따르자면 싹 밑의 잡초를 뽑고 김을 매주는 것이다. 경작이 용이한 땅을 조성하고 공기를 통하게 함으로써 성장을 보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손자병법』의 결정적 구절로 이어진다. "승리하는 군대는 전투를 하기 전에 이긴 군대다. 패배한 군대는 전투에서만 승리를 추구하는 군대다." 모든 것은 상류에서, 즉 조건들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적과 맞서기 전에 그의 잠재력을 황폐화시키고 쓸어버림으로써 이미 적을 무너뜨려놓아야 한다. 또다른 구절은 예상된 의미와 정반대이기 때문에 놀라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위대한 장수는 큰 지혜나 용기를 칭찬할 것이 전혀 없다." ... 그러나 『손자병법』에서 말하듯이 위대한 장수가 정말 지혜나 용기나 칭찬할 것이 전혀 없다면, 이는 물론 위대한 장수가 유리한 요인들과 주도적 요인들을 가장 앞서 탐지해내고 그것들을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증대시킬 줄 알고 동시에 적에게서 모든 잠재력을 빼앗는 ..
「나는 고정된 목적을 정하지 않는다. 목적은 상황의 전개과정에서 볼 때는 장애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배치를 적극 활용한다. 혹은 배치가 내게 불리할 경우 우선 나는 불리한 배치를 약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손자병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적이 쉬고서 도착하면 피곤하게 만들어야 한다. 적이 배부른 채 도착하면 배고프게 만들어야 한다. 적이 뭉쳐서 도착하면 흩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이런 작업을 통해 유리한 조건들이 점차 적에게서 멀어지고 내 쪽으로 기울어지는 흐름으로 적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 귀결로서 점차적으로 그리고 적이 자각하지도 못한 채 세(勢)가 내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전략가는 (계획을) 투영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마주친 상황에..
「미리 세워놓은 계획들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계획들은 융통성이 없어서 곧 쓸모없는 것이 되고 변화의 흐름에 합류하는 능력에 방해가 된다. 반대로 『손자병법』에서 말하듯이, 끊임없이 상황의 잠재력에 의거한다면 상황 잠재력의 변화 방식과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계속되는 변동을 쉽게 관리할 수 있다. "상황 잠재력은 변수를 유리한 조건에 따라 결정하는 데 있다." 이런 상황 잠재력 개념은 앞서 전략이 부딪혀 곤란을 겪은 '주변상황'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변수가 세(勢)에 합류될 뿐 아니라, 바로 이 변수의 힘 덕분에 전략가는 세를 자신의 이익에 맞춰 변형시킴으로써 점진적으로 적을 압도해가리라 생각한다.」* 16/02/07 * 프랑수아 줄리앙. (2015). 전략: ..
「중국인들은 주도 요인 또는 그들이 명명하듯이 '상황의 잠재력'[勢]에 대한 성찰을 극히 멀리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전쟁에서 용기와 비겁함도 (그대로 인용하자면) '세(勢)의 귀결'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용기와 비겁함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소유한 자질이나 결함이 아니다. 나는 용감하거나 비겁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용감하거나 비겁하게 만드는 것은 상황, 더 정확히는 상황의 잠재력이다. 여기서 어떻게 유럽적 휴머니즘과의 간극이 생기는지 보라. 유럽에서는 용기를 기꺼이 인간적 자질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게으른 사람이거나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용기가 도덕적 관점에서 파악된 덕이 아니라 상황 잠재력의 효과로 간주될 경우, 중국 장군은 그의 병사들이 비겁하거나 ..
「손자나 손빈의 병법을 읽어보면 그 전략적 사유의 가장 지배적인 두 개념은 앞에서 구분한 모델화와 그 적용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심지어 이런 구분을 파괴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첫째 개념은 '상황', '지세', '지형'[形]이고, 둘째는 내가 제안하는 번역으로 '상황의 잠재력'[勢]이다. 『손자병법』은 전략가에게 상황에서 출발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서 상황은 내가 미리 모델화할 상황이 아니라, 내가 이미 개입되어 있는 상황이다. 즉 그 상황 한가운데서 잠재력이 어디에 있고 또 어떻게 그것을 활용할 것인지를 내가 포착해내고자 하는 그런 상황을 말한다.」* 16/02/02 * 프랑수아 줄리앙. (2015). 전략: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중국까지. (이근세, Trans.). 파주: 문학동네. 2016/02/0..
「내 생각에 효율성을 구상하는 그리스 방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효율적이려면 모델의 형태, 관념적인 형태를 구성하고 이런 형태로 계획을 세우며 그것을 목적으로 설정한다. 그 후에 계획에 따라서 그리고 목적을 근거로 행동에 착수한다. 우선적으로 모델화가 있고, 그다음에 모델화는 적용을 요청한다. 이로부터 유럽의 고전 사유는 지성과 의지 두 능력이 결합한 작용을 구상하게 된다. 플라톤이 말하듯이 지성은 "최선을 목적으로 하여 구상한다." 이것이 바로 관념적 형태다. 그다음에 투영된 관념적 형태를 실재에 들여놓기 위한 의지가 투입된다.」* 「이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물리학에서 유럽은 수학 덕분에 모델화와 그 적용을 가장 잘 활용했지만 전략 영역에서도 사정이 같을 수 있겠는가?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럼에도 왕부지와 동시대의 일본유가사상가들의 공통된 주제와 관점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 주희에 의해 정립된 정통유가론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옛 황금시대에 대한 믿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특히 일본의 진사이의 경우처럼) 이상적인 과거와 경멸스런 현재를 대립시키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송말과 원말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보다 금욕적이고 관조적인 경향에 반대하여 행동과 동작과 감흥을 재평가하고 욕망을 인정하였으며 결코 과욕과 일탈을 경원시하지만은 않았다.(일본은 야마가 소코오가 그 기원이다.) 그들은 질서와 조절의 원칙인 리가 기의 전개에 대해 갖는 선행적이며 초월적인 위상에 비슷한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리와 기는 각기 독립적이며 고립된 두 실체를 형성할 수 없..
「경향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또 일관성은 경향에 따라 달라진다. 혹은 시대가 성향을 좌우하며, 성향이 일관성을 좌우한다. 그러기에 "자연스런 경향 없는 내적 일관성이란 없으며 내적 일관성 없는 자연스런 경향이란 없다." 따라서 삶에만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도 논리가 있으며, 질서에만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혼돈에도 논리가 있으며, 나아가 생존에만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쇠락에도 논리가 있는 것이다. 이는 국가의 운명이나 개인의 운명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역사공부는 먼저 성향을 분석하고 그 내적 논리를 철저히 이해하여 각 특수상황으로부터 교훈을 추출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흐름의 일관성은 성향의 필연성을 통해 밝혀진다. 왜냐하면 내적 일관성은 원칙상 비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따라서 현자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덕 너머에 자리한다. 자강불식의 정신으로 자신을 하늘처럼 쉼없이 새롭힘으로써 현자는 모든 순간과 상황을 거쳐 보편에 이르게 된다. 욕망과 의도가 부정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방향 자체가 사물의 본성과 상반되기 때문이 아니라 고정된 경향을 초래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고정된 경향이 의식의 확장을 막고 만물을 통해 나아가는 소통력을 저하시켜 의식 자체를 끊임없는 상관관계로부터 고립시키면서 마침내 의식을 매몰시키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감각에 종속됨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감각 자체가 본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감각이 의식을 개별성에 파묻어 변화능력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부세계와의 금욕적인 단절을 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럴수록 외부세계는 결코 ..
「왕부지는 을 보는 두 극단적 관점의 오류를 밝힌다. 그 오류의 하나는 을 도덕론으로서만 고찰하여 에 내포된 투시력을 간과해버리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을 운명서로서만 고찰하여 예견능력의 토대인 도덕적 요소를 간과해버리는 관점이다. 사실 은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갖추고 있다. 하나는, 사람은 운행으로서의 모든 생성에 내재하는 일관성의 개념 ― 연속과 변이, 시초와 성향 ― 에 의거할 때 비가시에 이를 수 있으며 그 효능성과 맺어져 경향을 탐지하고 변화를 예견할 수 있음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생성에 관련된 모든 징후는 때로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운행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반면, 정도로부터 탈선할 수도 있는 까닭에 항상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따라서 은 사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도덕성이 ..
「선견과 수정의 능력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의식의 흐름과 도덕적 삶 속에서이다. 왜냐하면 의식을 운행과 완전히 별개로 여기는 도덕론자들은 도덕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항상 흐르고 있는 올바름과 규범성으로부터의 이탈로서 간주해 버린다. 그들에게 있어 올바른 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이탈은 하나같이 심각하고 위험스러운 것으로 사람의 신세를 망치게 하며 한 시대를 패망으로 치닫게 하는 되돌릴 수 없는 과오인 것이다. 그러나 선견과 수정의 능력을 갖춘 자에게 이러한 이탈은 아무리 끝이 나쁘다할지라도, 이는 시초의 잘못에서 야기되는 당연한 후과로서 파악된다. 이탈도 처음에는 언제나 미미하여 자칫 지나쳐 버리기 쉽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경향은 점진적으로 자리를 잡기 마련이니, 성향이란 한번 정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