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동양 사상과 유교의 한계와 맹점 본문
「먼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념의 기능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 정체나 선거 정책과 관련해서 모델화는 일반적이며, 이런 점은 서구적 근대성을 수용한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줄리앙은 정치 영역에서 모델화의 특수한 기능을 강조한다. 정치 영역에서 정책이나 이념을 제시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상황이라는 변수가 나타나며 따라서 모든 이념이 그대로 실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념이나 모델의 제시는 적용이 아닌 협의를 위해서다. 모델화는 민주주의의 원리다. 정책 모델을 구상하고 제시하는 것은 정책 모델을 완벽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입장을 취하며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 모델은 논쟁을 조직하는 데 사용된다. 결국 이념 또는 모델은 갈등의 제도화와 연결되며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줄리앙은 갈등의 관리에 있어서 서구적 전통의 장점을 강조한다. '유교와 현대사회'를 주제로 국내 학자들과 나눈 대담에서 줄리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지적 전통에 따르면 어떤 하나의 담론이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대의 담론이 존재해야 합니다. 철학적 연구는 하나의 담론에 대한 반대 담론이라는 원리하에서 진행됩니다. 서구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 전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유교와 현대사회」, 196쪽)
... 개인주의가 서양 근대의 전형적 정치관이라면 유기체적 공동체주의는 유교적 정치관이라 할 수 있다. 줄리앙은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에 공감하고 핵심적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연계를 모색"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생물학적 유기체의 차원"보다는 "정치의 차원"(「유교와 현대사회」, 194쪽)에서 정립되어야 한다. 정치의 차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통치를 뜻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구상", "정치적 대안" 또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또는 개인이 사회에 함몰될 수 없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말한다. 유가는 오륜에 근거한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군주의 도덕성이 사회 전체로 퍼져가는 도식을 강조했지만,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정치 고유의 관점에서 설정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유가에는 도덕을 통한 통치 개념만이 존재할 뿐 고유한 의미의 정치 차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사유의 이런 측면은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큰 문제를 내포한다. 유교, 더 나아가 중국 문화 전반에서 핵심 원리는 조화다. 이런 점은 병법, 유교, 도교, 법가 등 중국 사상 전체가 수렴되는 합의의 기초다. 반면 줄리앙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정의는 "갈등의 제도화"(「유교와 현대사회, 195쪽)다. 반대 입장이 온전히 기능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제 줄리앙은 민주주의와 관련한 유교의 한계를 지적한다.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대의 입장이 있어야 하며, 또한 이 반대 입장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유교 문화가 이 과제를 관철하는 데 있어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교는 근본적으로 조화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가에서는 갈등의 국면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따라서 갈등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유교가 갖는 한계라고 하겠습니다."(「유교와 현대사회」, 195-196쪽)
"중국인들은 대내적으로 전제적인 정권을 전복하는 것보다는 혼란된 나라를 바로잡고 질서를 회복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왕정이 아닌 다른 정치체제를 경험해본 적이(구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 167쪽)
달리 말하면, 동아시아의 지식인 계층은 기존 질서와는 다른 '이상'을 통하여 자율적으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줄리앙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조화'라고 하는 한 가지의 가치만을 추구했습니다. 공동체의 조화, 하늘과 땅의 조화, 군주와 백성의 조화 등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지식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중국의 문사들이 군주를 비판하곤 했지만, 그들은 군주에 저항하기 위한 이상으로 조화만을 강조하였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그 이외의 다른 이상은 생각해내지 않았습니다."(「유교와 현대사회」, 198쪽)」*
16/02/19
* 역자 해설(이근세). in 프랑수아 줄리앙. (2015). 전략: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중국까지. (이근세, Trans.). 파주: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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