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경향은 한번 시작되면 구속적이지만, 얼마든지 교정하여 방향을 돌릴 수 있다 본문
「선견과 수정의 능력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의식의 흐름과 도덕적 삶 속에서이다. 왜냐하면 의식을 운행과 완전히 별개로 여기는 도덕론자들은 도덕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항상 흐르고 있는 올바름과 규범성으로부터의 이탈로서 간주해 버린다. 그들에게 있어 올바른 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이탈은 하나같이 심각하고 위험스러운 것으로 사람의 신세를 망치게 하며 한 시대를 패망으로 치닫게 하는 되돌릴 수 없는 과오인 것이다. 그러나 선견과 수정의 능력을 갖춘 자에게 이러한 이탈은 아무리 끝이 나쁘다할지라도, 이는 시초의 잘못에서 야기되는 당연한 후과로서 파악된다. 이탈도 처음에는 언제나 미미하여 자칫 지나쳐 버리기 쉽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경향은 점진적으로 자리를 잡기 마련이니, 성향이란 한번 정해지면 차츰 모든 행동거지를 지배하고 고착화해버릴 정도로 구속적이다. 그러나 탈선이 부추겨지는 와중에도 불가피한 긍정의 논리가 엄연히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모든 탈선을 고치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한 미미한 탈선일수록 쉽게 고쳐질 수 있다. 선악의 대립은 행위에서는 선명하게 드러나는 반면, 그처럼 확연히 대립된 결과의 단서가 되는 시초의 분열에서는 지극히 미묘하다. 그러니 조절의 기점에서부터 중용에 머물 줄 알아야 하며,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적 판단 원칙을 쉽게 감지되지 않는 가장 미묘한 전조의 단계에까지 적용시킬 줄 알아야 한다. 쉽게 감지되지 않을지라도 탈선의 징조 마냥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예방과 신중함이야말로 윤리적 자세임을 말한다. 유가의 윤리는 지극히 미미한 부정적 조짐에도 언제나 경계를 게을리 하지말 것을 강조한다. 때를 놓치면 일단 들어선 방향을 수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현자는 외부 세계의 흐름을 사려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다. 괘상과 역전을 포함한 <주역> 전체는 부정적인 경향을 적시에 탐지하여 위험을 예고하고 오류와 후회를 예방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장치에 해당한다.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왕부지의 복괘(다섯 음효의 바탕이 되고 있는 하나의 양효)에 대한 해석은 이에 대한 좋은 예증이다. 즉, 완전한 정靜 속에서도 일말의 동은 나타난다. 개입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단계에서이다. 그럴 때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멀리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니, 어찌 후회할 일이 있겠는가?"는 이에 대한 명구이다.
유가사상은 이렇듯 개과천선의 사상이다. 불가의 믿음에 따른 헛된 주장과는 달리, 자신의 잘못을 '망각'의 힘이나 허환, 혹은 구복적인 용서를 빌어 그 과오를 불식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경향이 아무리 비밀스레 그 뿌리를 내린다할지언정, 그러한 과오는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며 실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반면 과오를 적시에 교정하여 정도를 다시 밟고자 하는 자는 과오의 후과를 말끔히 일소시킴과 동시에 정신적 고통이나 죄의식으로부터 삶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에서의 절망이란 더 이상 개전의 여지가 없는, 나락의 최종단계에서만 있을 따름이다. 전통문헌을 빈다면, 주周 왕조를 창건한 문왕은 가능한 오랜 기간의 인내 속에 전대의 왕조를 도와 그 군주가 패륜으로 인해 파멸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훈계에도 불구하고 멸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흥망성쇠에 관한 총체적 설명과 교훈을 밝히고자 <주역>의 괘사를 지었다고 한다. 선악에서 중요한 것은 출발점이다. 향후 전개될 궤도의 향방은 그 출발점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첫 시작의 순간에 모든 것이 좌우된다. 최초의 방향이 올바르면, 전개는 절로 무한히 계속되며 그 흐름을 멈출 내적 이유가 없게 된다. 운행사상이 도덕의 형성 측면에서 진보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것은 단지 이 점에 한해서이다. 도덕적 삶에 관한 유가사상의 독창성은 우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도덕적 성향이 아무리 미미한 것일 지라도 끝없이 증진하는 것임을 제시하는 데 있다. 오고 감, 비약과 침잠 등 교대하는 세계흐름은 이렇듯 내포된 연속성을 조금도 동요시킬 수 없다. 도덕은 교대하는 운행의 흐름을 좇아 증진된다. 경향이 끝없이 증진되는 과정은 도덕이 그 절대적 이상을 향해 나아감을 뜻한다.」*
15/09/25
* 프랑수아 줄리앙. (2003). 운행과 창조. (유병태, Trans.). 케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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