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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감동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다 본문
「따라서 현자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덕 너머에 자리한다. 자강불식의 정신으로 자신을 하늘처럼 쉼없이 새롭힘으로써 현자는 모든 순간과 상황을 거쳐 보편에 이르게 된다. 욕망과 의도가 부정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방향 자체가 사물의 본성과 상반되기 때문이 아니라 고정된 경향을 초래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고정된 경향이 의식의 확장을 막고 만물을 통해 나아가는 소통력을 저하시켜 의식 자체를 끊임없는 상관관계로부터 고립시키면서 마침내 의식을 매몰시키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감각에 종속됨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감각 자체가 본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감각이 의식을 개별성에 파묻어 변화능력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부세계와의 금욕적인 단절을 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럴수록 외부세계는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며 쉼 없이 우리를 흔들어댈 것이다. 그렇다고 외부세계에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외부 세계가 자신을 통해 언제나 자유로이 변화할 수 있도록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쳐야 할 것이다. 리는 불가나 도가의 신비주의자들의 상상처럼 허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리는 변화를 통해서만 실재하는 것이다.(용이 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오직 변화만이 개별적 존재로 하여금 개별성을 벗어나 모든 가능성에 합류하게 하고 무한한 정진을 가능하게 한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유일한 도덕규범이란 이렇듯 경직되지 않고 언제나 흘러가는 의식으로부터 마련된다. 왜냐하면 지엽적인 접근에 의한 규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의식만이 어떤 것에 고착되거나 흐려지지 않고 절대에 이르기 때문이다. 도덕성의 '흔적'은 지혜의 궁극단계에서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현자의 '욕망'은 노경에 이른 공자의 욕망과 같은 것으로, 사물의 생성논리와 전체적으로 끊임없이 맺어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의식의 운행은 실재의 거대한 운행과 하나가 된다.
자신의 의식을 세계와의 내밀한 관계 속에서 그 변화를 통해 견지한다는 것, 나아가 다양한 사물과 상황을 통해 무한과 통한다는 것, 이는 도덕의식만이 아니라 '시적' 의식과도 관계된다. 중국에서 도덕의식과 시의식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동일하게 내면의 영역에 속한다. 즉 이 두 의식은 개인의 테두리를 넘어서며 세계에 부응하여 변화하고 외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식이다. 시적 감동은 그 자체로 지극히 도덕적이다. 중국전통에서는 감각의 확장력이 우리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깊이와 강도에 결부된 윤리적 삶의 근원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중국전통의 시초인 <시경>에서부터) 유가문화가 도덕성을 기준으로 '훌륭한' 시를 칭송하는 이유는 이러한 시가 도덕을 주제로 삼거나 선한 감정을 노래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시로 드러난 각별한 감정이 의식을 고무시켜 의식으로 하여금 무감동의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유추적으로 다양한 경험과 상황을 겪게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관성의 도덕적 도약이 있다. 따라서 시는 창조가 아닌 운행의 범주에 속함을 확인할 수 있다.」*
15/09/28
* 프랑수아 줄리앙. (2003). 운행과 창조. (유병태, Trans.). 케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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