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존재와 무의 대립은 없다, 현동과 잠재의 교대가 있을 뿐이다 본문
「여기서 우리는 변화를 살피는데 보다 확고한 근거를 갖추게 되는 바, 이원적이고 폐쇄적인 체계에서, 하나의 진전에는 반드시 다른 하나의 후퇴가 있기 마련('변變'은 양이 물러나는 것이고 '화化'는 그와 동시적으로 행해지는 음의 진전)이다. 변화가 있다함은 바뀜이 있음을 뜻한다. 생산이 없는 순환이란 없으니, 교대란 갱생의 조건 그 자체이다. 쉼이 없는 운동은 소진될 것이며, 운동이 되지 못하는 쉼 또한 소멸되고 말 것이다. 동과 정은 '서로를 내포하니', 낮은 운동이며 밤은 쉼이다. 이 교대로 말미암아 세계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고 한결같이 지속된다.
하늘에는 가시와 비가시, 땅에는 성쇠의 교대가 있다. 그러므로 대립이란 '존재'와 '무'의 대립이 아니라 현동現動과 잠재潛在(명明과 유幽)의 대립일 뿐이다. 현동은 잠재로 향하는 한편, 잠재는 거듭 현동을 가능하게 한다. 기실 현동과 잠재는 다를 바 없으니, 단지 그 다름이란 응집력(歸)으로서의 귀鬼와 팽창력(伸)으로서의 신神이 교대로 보여주는 순간적인 차이일 뿐이다. 오직 '왕래'가 있을 뿐, 엄밀한 의미의 '생사'란 없다할 것이다. "탄생은 창조가 아니며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 교대사고는 그 자체로서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의 관점, 즉 한편으로는 소멸이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무라는 단정 하에, 출발을 제외한 어떠한 회귀도 인정하지 않는 (불가의 열반과 같은) 극단적인 하나의 관점,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는 상반되나 역시 오류이긴 마찬가지인, 현생의 일시적 현동에 집착하여 헛되이 현생의 연장을 추구하려는 (도가의 '장생' 비법과 같은) 관점을 일제히 배제한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극단적 입장은 서로 상쇄된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동일하며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삶은 불가의 주장처럼 환영이 아니며, 심지어 죽음마저도 존재의 한 형태이다. 삶과 죽음은 서로 형통하니, 죽음은 삶의 마련이자, 그 영원한 시작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신진대사는 영원하다.
다음의 표현들, 가고-옴, 수렴-팽창, 분산-응집, 잠재와 현동은 모두 동의어들이다. 그러나 탄생과 소멸은 동의어가 아니다.」*
15/09/20
* 프랑수아 줄리앙. (2003). 운행과 창조. (유병태, Trans.). 케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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