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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합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본문

명문장, 명구절

변화에 합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험러

「중국인들은 실재적인 모든 것을 장치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한한 일련의 가능한 원인들을 찾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성향의 불가피한 특성에 민감하기 때문에, 단순히 개연적일 뿐인 목적에 대해서도 사유하지 않는다. 우주 발생론에 관한 목적론적 전제도 이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시초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세계의 결말을 상상해보지도 않는다. 오래전부터 언제나 작동 중인 상호작용만이 존재할 뿐이며, 실재는 이러한 상호작용의 끊임없는 운행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그리스적 개념에 따라 생성과 감각적인 것에 대립되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들은 '실재 속에서 작동 중임을 우리가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바의 그 효율성은 어디로부터 나오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중국인들처럼 원리상 모든 대립이 상호관계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모든 대립적 시각은 해소된다. 따라서 실재는 결코 극적일 수가 없게 된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갈등의 측면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전략적 배열의 경우에서조차도 중국의 사상가들은 항상 적을 급하게 공격하기보다는 적의 움직임에 완벽하게 대응해 나아가면서 병법을 펼칠 것을 권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 '상대'가 역동성을 가지는 한 그 역동성을 언제나 이용할 수 있도록 ― 그러므로 상대방을 희생시키고 자기 자신은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으면서 ― 처음만큼이나 온전하게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모든 정면 공격은,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위험한 반면, 위와 같은 방식은 항상 상대방의 선동에 반응하면서 대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마치 물이 여러 모양의 울퉁불퉁한 지형을 만나도 끊임없이 자신의 역동성을 유지하면서 평온한 상태로 머무를 수 있는 것과 같다(본질적인 것은 바로 이 항상성이다. 왜냐하면 상호관계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균열은 우리를 우리 편으로부터 동떨어지게 만들어, 우리 각자만의 힘으로 적을 집적 상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지가 되면 적들은 각자 따로 맞서는 우리를 압도하고 승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실천 이성'이라는 것은 자신을 작동 중인 성향에 인도되도록 내버려두고, 이 성향이 자신을 위해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 성향과 결합하는 것이다. 이 실천 이성에 따르면 선과 악에 대한 어떠한 최초의 선택도 있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둘 모두 존재론적 지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성향의 '한 방향으로 나아가서' 그 성향으로부터 유리한 혜택을 이끌어내는 사실과, 이와는 반대로 성향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자멸하는 사실들의 번갈아 나타남만이 있을 뿐이다. 전략가에게 가치 있는 것은 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가치가 있다. 현자는 실재에 대한 일시적인 체계화로부터 자신의 의지에 대한 목적으로서 설정될 수 있는 규범(행위의 명령이나 규칙과 같은)을 추상해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지속적 흐름의 효율성에 접목하기 위해 이 흐름(운행의 고갈되지 않는 토대로서의 '하늘')의 주도권에 '순응한다[順]'. 다시 말해, 주관적 관점에서 보면 현자는 전혀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고자 노력하지 않고, 단지 완전한 도덕성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의식 속에서 배아 상태로 존재하는 선을 향한 성향[존재자의 유대감과 같은 의미에서: 유가의 인仁]을 따를 뿐이다. 특정의 질서에서 출발해 세계를 재구성할 것을 주장하거나 사물의 흐름을 강제하여 자신의 의도를 그 흐름에 각인하려 하기는커녕, 그는 자신 안에서 실재의 부추김에 합일하고 반응할 뿐이다. 즉, 현자의 이러한 반응은 실재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총체적이고 지속적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현실에 대한 그의 변화 능력은 어떠한 장애나 한계를 모른다. 그는 '행위'하지 않으며, 스스로는(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현자의 효율성은 이러한 비개입의 정도에 따라 측정된다. 사실 그 총체성 속에서 파악된 실재와 현자의 상호관계로부터 비가시적이고 무한하며 완벽하게 자동적일 수도 있는 영향력이 나온다.


타자를 움직이게 만드는 행위나 인과성에 비해, 이러한 중국적 사유에는 스스로를 움직이는 효율성밖에 없고, 하늘 ― 인간적 지평에 대한 초월 속에서 정립되는 ― 그 자체는 단지 그러한 내재성에 대한 총체화 ― 또는 절대화 ― 일 뿐이다.


따라서 중국적 사유가 그토록 순응주의적이라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적 사유가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고자 하지 않고, 실재를 문제 삼지 않으며, 실재의 목적에 대해서조차 경이감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적 사유는 실재를 불합리로부터 구하기 위해, 그리고 실재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어떠한 신화 ― 우리는 가장 무모한 자가 가장 강한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 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계의 수수께끼를 공상적 통로를 통해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신화를 고안해내는 대신에, 중국적 사유는 행위의 수준에서 세계의 배열에 내재해 있는 기능을 기호를 통해 표현하고 구현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 제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재는 답을 찾아야 할 물음으로서 우리를 부추기지 않으며, 처음부터 신뢰할 수 있는 과정으로서 주어진다. 그것은 우리가 해독해내야만 할 신비가 아니라, 그 것의 진행 속에서 우리가 설명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의미'는 자아-주체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세계에 대해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물의 성향으로부터 ― 신앙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은 채 ― 흘러나온다.


오로지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긴장으로부터 성인 또는 천재 ― 예를 들어, 순교자의 화신인 '불을 훔친 자' 프로메테우스 ― 가 나온다. 신에게 버려진 상태의 불안과 신과의 해후에 대한 열정 사이에서 자신의 무無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신'의 희열에 이르기까지 뜨겁고 열정적인 탐구가 시작된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체계의 양극성으로부터 중심성과 균형 상태 ― 이것들로부터 평정심이 나온다 ― 가 흘러나온다. 즉, 기능의 항상성을 보장해주는 번갈아 나타남으로부터 생명의 리듬이 솟아난다. 외부의 절대자를 향한 전적인 개방성은 끊임없는 감정 토로나 황홀경의 현기증 대신에, 역방향의 닫힘 ― 이것이 과정을 형성하고 숨 쉬게 해주는바 ― 에 의해 곧장 보완된다. 자기 초월을 지향하는 도덕을 만들 필요도 없고, 즐거움과 고통 사이에서 구원을 만들어낼 필요도 없다. 변화에 합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변화는 언제나 자기 제어적이면서 조화를 만들어냄에 기여한다.」*


15/09/16


* 프랑수아 줄리앙. (2009). 사물의 성향: 중국인의 사유 방식. (박희영, Trans.).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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