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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를 쓴 라훌라 스님은 붓다가 사용한 팔리어 단어를 짚어 보며 깊은 뜻을 길어 낸다. 팔리어 경전은 붓다의 말씀을 가장 생생하고 보존하고 있지만 번역 과정에서 정확한 의미가 많이 사라졌다고 그는 아쉬워한다. 예를 들어 그는 우리가 '고(괴로움)'라고 번역하는 dukka의 의미가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dukka는 단순히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성 때문에 생겨나는 괴로움'을 뜻한다. 이 '괴로움'은 출가 제자들의 수행에 필요한 개념이었을 뿐, 일반 신도들을 위한 가르침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붓다는 중생들에게 성공하고 부자가 되라고 가르쳤다. ... "꿀벌들이 꽃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꿀을 모으듯이, 남을 착취하지 않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돈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돈 문제가 아닌 일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충분한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해결하는 데는 돈이 도움이 되지만, 사랑이나 자존감의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실제 돈의 용도가 아닌 곳에 돈을 쓸 뿐, 아무런 효과도 없다. 부처의 가르침도 생각해 볼 만하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전부였다. 요즘은 누군가 명상을 하고 싶다고 하면 이내 기업들은 베개, 명상용 테이프, 명상용 바지, 명상용 향 등을 구입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 뉴필로소퍼 2호, "물질주의적 삶에 대하여", 팀 캐서.
「붓다의 길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공부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은 모든 불법들이 보증하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불법들이 보증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와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타인의 신체와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깨달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렇게 온데간데없는 깨달음이 계속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 도원 선사 15/11/28 * 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 다미앙 막도날드. (2012). 유럽의 붓다, 니체. (강희경, Trans.). 파주: 열린책들. 도원 선사
「이상주의나 영원주의의 뱃멀미를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단단한 땅에 대한, 항구에 대한 모든 희망을 단번에 버리는 것이다. 도덕 안에 그런 항구가 있는지 의심스러워했던 파스칼의 말에 따르면, 배를 탈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정하는 항구 말이다. 여기에서 도원 선사가 그리고 있는 과감한 항해사는 더 이상 고정된 좌표들과 굳은 확실성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을 물결을 따라 미끄러지게 하고, 세월을 따라 흘러가게 한다. 여정을 늦추려 하기도, 진리라는 신비의 섬에 정박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러므로 피안에 서서 윤회의 동요를 바라보는 게으른 방관자였던 붓다는 삶이라는 놀이를 포기했지만, 선사(禪師)는 과정의, 생성의 진정한 영원성을 느끼기 위해서 주저 없이 대양의 부름에 응답한다. 아직도 사물..
몸의 노폐물은 대소변으로 배출된다. 그런데 마음의 노폐물도 몸으로 배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로 이완을 통해서. 많은 사람은 긴장된 상태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정상상태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완이 어떤 느낌인지조차 모른다. 긴장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완할 수도 없다. 붓다가 번뇌와 고통에서 해방되는 수단으로 가르친 위파사나도 기실 급진적이고 철두철미한 몸의 이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몸이 해방되면 마음도 해방되는 것이다. 불교의 원시경전을 읽어보라. 붓다의 제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늘 편안하고 행복해보였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붓다 자신의 상징도 부드럽고 따뜻한 은은한 미소다. 긴장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심리삼담, 심리치료, 힐링··· 다 좋다..
"There are no two words in the English language more harmful than 'good job'." (영어에서 '잘했어'보다 더 해로운 낱말은 없다.) - 영화 에서, Fletcher(플레처)의 대사. 2500년 전에도 있었다. 심지어 채찍질(whiplash)하는 선생이 없는데도 피가 철철 나도록 수행하던 사람이. 붓다는 그런 제자에게 거문고의 비유를 들어 저 유명한 중도(中道)의 길을 설하셨다.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전에 재가자였을 때 거문고의 활줄 소리에 능숙하였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문고의 활줄이 지나치게 팽팽한데도 그대의 거문고는 그때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하기에 적합하게 되는가" “그..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 그 씨앗이 소승(小乘)으로 싹트고, 대승(大乘)으로 자라서, 선(禪)으로 꽃핀 후, 밀교(密敎)로 열매를 맺었다."* 여기서 밀교는 대체로 대승불교의 한 지류인 티베트 불교(금강승金剛乘)를 가리킨다. 나는 붓다 수행의 근본을 위파사나로, 티베트 불교 수행의 핵심을 투모(tummo: 속불 명상)로 보므로, 위 말을 다음과 같이 고쳐 쓰고 싶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위파사나로 싹트고, 비이원론의 형이상학으로 자라서, 불립문자·견성성불로 꽃핀 후, 투모로 열매를 맺었다." 투모는 사실상 단전호흡이다. 서구 신비주의 철학계의 슈퍼스타 켄 윌버가 배우고 익힌 수행체계가 바로 금강승의 명상법이다. 15/01/01 * 라마 카지 다와삼둡 번역, 에반스 웬츠 편집, 2015/01/01 ..
「불교는 마하무드라 요가 탄트라와 선(禪) 또는 정토종에서 보는 것과 같은 대승불교의 실천 응용을 통하여 여러 세기 동안 발전하고 꽃을 피웠다. 그러나 정토종은 개인의 진화를 촉진하기 위해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으므로, 실제적인 불교의 가르침(즉 반야바라밀의 체험)은 선과 탄트라 요가에서만 찾을 수 있다. 역사가 입증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 선과 탄트라 유파에서만 '눈을 뜬 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따라서 불성이 개화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수행자라면 이들 마하무드라와 선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선과 탄트라 양쪽의 연구 및 실습을 통하여 필자는 선의 가르침과 마하무드라의 고급 탄트라가 동일함을 알았다. 식별할 수 있는 차이는 양자의 제시 방식이 표면적이고 외부적인 견지에서 약간 다르..
인류사에 여러 성인들이 있었지만, 붓다만큼 쉽고 간단하고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려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위파사나는 단순히 불법의 정도(正道)인 것이 아니라, 모든 수행의 근본이다. 「나는 화두를 들기보다, 차라리 서암의 화두처럼 ‘주인공’을 부르는 성성법(惺惺法)을 권하고 싶다. 인간의 대부분의 활동은 대개 무의식적 상태에서 일어난다. 대개의 선사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각성된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적 본질과 분열되지 않고 일체가 되며, 그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주적 화해의 무도가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의식과 감정, 의지와 욕망의 미세한 흐름까지를 각성하고 제어하는 통제력이 더 긴요하다. 자신의 호흡과 심신의 활..
아래 글은 『장자』의 '꽥꽥거린 거위'에 대한 로버트 앨린슨의 해석이다. 「『장자』의 메시지를 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 조용히 있던 거위는 그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였다. 노력하는 바로 그 행위가 잘못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목적없음을 목적으로 삼는 바로 그 시도(조용히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식으로)가 잘못인 것이다.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거위는 완고한 신비주의자에 대한 은유이다. 완고한 신비주의자는 모든 말들을 무용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고, 따라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신비주의이고,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어리석은 거위이다. 정말로 어리석은 거위는 조용히 침묵하는 거위이다. 침묵하는 거위는 거위답지 않다는 바로 그 점에서 어..
「물질의 공성이란 모습이 없는 참본성, 즉 공과 색, 무와 유를 상호 관통하는 진여성(眞如性)을 일컫는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 즉 텅 빈 것은 묘하게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공은 모든 형상을 일으키는 살아 있는 '공'으로, 무궁무진한 생명력을 가진 허虛나 도道와 같은 것이다. '공'은 의식 차원의 개념이다. 물질의 공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비어 있음과 있음이 한 맛임을 안다는 것이요, 생·주·이·멸 사상의 변화가 그대로 공상(空相)임을 깨달아 생사를 여의게 되어 걸림이 없는 의식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순간 깨어 있는 의식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묘각의 경지이다. 과거나 미래의 속박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전적으로 몰입할 수 있을 때 그러한 깨달음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러나 지혜로운 동반자와는 함께 가라.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동반자들 속에 끼면 쉬거나 머무르거나 또는 여행하는 데에서도 항상 간섭을 받게 된다. 그러니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대가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절 바르고 지혜로운 동반자를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런 동반자를 얻지 못했거든,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이나 쾌락에 물들지 말고 관심도 갖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
위파사나 수행(깨어있기, 관찰하기, 주시하기)의 위력을 알려주는 일화. 「붓다 재세시에 마하 가섭의 제자인 한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보석상을 하는 숙부 집에 들러 숙부의 화려하고 유복한 생활을 보고 세속적인 욕락에 사로잡혀 수행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곧 그는 나쁜 패들과 어울려 범죄자가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아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마하 가섭은 탁발차 마을에 들렀다가 옛날 자신의 제자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고 그에게 다가가 일렀습니다. "너는 아직 옛날에 내가 가르쳐준 수행법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일념으로 주시하거라." 그는 사형장으로 가는 동안 일념으로 수행에 열중하였습니다. 사형집행관이 불에 달군 쇠창을 들고 ..
을 쓴 저자 '무산본각'에 동의할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위파사나(위빠싸나) 수행은 붓다가 가르친 핵심 수행법이다. 위파사나의 위대함은 요행이나 스승(조사)에 의지할 필요없이 누구나 정진하면 정진한 만큼 수행의 결실을 본다는 것이다. 2. 불교가 중국의 선禪으로 이어지면서 위파사나 수행법이 실전되었다. 3. 삼매(몰입)나 견성(깨달음)이 수행의 끝이 아니다. 동의할 수 없는 바는 이런 것들이다. 1. 그렇다고 선사(禪師)들의 도(道)가 반쪽짜리였나? 아니다. 그들은 위파사나 수행법을 말하지 않았지만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밭 갈 때는 밭 갈고 목마른 자가 오면 물을 나눠주는 생활을 한결같은 마음으로(평상심) 실천했다. 즉, "오직 할 뿐"이었다. 이는 위파사나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
「애석한 것은 후세의 학자들이 각자 자기가 소속된 가르침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유학을 익히는 자는 그 속에서 구속되어 있고, 노자를 익히는 자는 세간의 모든 제도와 가치를 무시하고 미친듯이 행동을 방종하게 하며, 불교를 배우는 자들은 자기만이 옳다는 아집 때문에 그 소견이 궁색하게 좁아진다. 이러한 학자들의 폐단은 모두가 아집에 기인하는 해로움이다. 학자들이 정말로 애써 아집을 타파할 수만 있다면 광대한 시야를 가리고 있는 울타리를 부수고 대방가(大方家)가 되리라. 후세에 불교를 배우는 무리들이 노자를 모른다면 곧장 단멸의 허공 속으로 달려가느라 목전에 존재해 있는 법이 모두 장애가 되고 하는 일에서 해탈을 얻지 못할 것이며, 공자를 모르고 불법만을 가지고 세상을 거닌다면 결단코 세도인정(世道..
Enlightenment, Self, and the Brain. How the brain changes with final liberation from Todd Murphy on Vimeo. 신경신학자 토드 머피의 강의 세 번째. '나'라는 개인의 실체가 있다는 느낌, 즉 '자아'의 감각은 뇌가 만들어내는 신경학적인 환영(hallucination)임을 설명하며 '무아'를 주장한 붓다의 의견이 과학적으로 옳았음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나', 개인(individual)이 있느냐는 질문의 답은 '없다'이다. 깨달음은 바로 이 '나'라는 자아의 느낌이 소멸하는 과정이다. 강의는 뇌의 어떤 변화가 이런 과정을 만들어내는지 뇌 각 부위의 역할과 상호작용을 통해 깨달음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
「즐거운 느낌에 닿아 환락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으면, 탐욕에 대한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지 않게 된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 슬퍼하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고 비탄해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고 미혹에 빠지지 않으면,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지 않게 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 그 느낌의 생성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그것에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 무명의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지 않게 된다.」* - 붓다 13/12/20 * 전재성 옮김, 에서 발췌. 2013/12/17 - 지혜로운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을 뿐이다 2013/12/18 - 모든 수행의 근본, 알아차림(위파사나) 붓다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도록 늘 알아차림의 수행을 하라.」* - 붓다 13/12/20 2013/12/18 - 모든 수행의 근본, 알아차림(위파사나) 붓다
「관개하는 사람은 물꼬를 트고 활 만드는 자는 화살촉을 바로잡고 목수는 나무를 바로잡고 현자는 자신을 다스린다. 방일(방탕)에 빠지지 말라 감각적인 쾌락에서 기쁨을 찾지 말라. 방일하지 않고 명상하는 자 크고 한없는 즐거움을 얻으리라.」* - 앙굴리말라가 깨달음을 얻고 읊은 시 중 붓다가 연쇄살인마였던 앙굴리말라에게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라고 하니 앙굴리말라가 '어째서 이 수행자는 자신은 걸으면서 나는 멈추었다고 하는가?'라고 의문을 품고, "수행자여 어찌하여 그대는 멈추었고 나는 멈추지 않았는가?"하고 묻는 부분은 중아함경(맛지마니까야)에서 가장 숨죽이게 되는 장면이다. * 전재성 옮김, 에서 발췌, 편집. 붓다 명상
「마간디야여, 나는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와 갈증을 버리고 안으로 마음의 고요를 성취했습니다. 나는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다른 뭇삶들을 봅니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마간디야여, 참으로 그 감각적 쾌락의 착하고 건전하지 못한 것들을 떠나면,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므로 그보다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13/12/19 * 전재성 옮김, 에서 발췌, 수정. 쾌락 붓다
「수행승들이여,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고, 바른 방도를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이 있으니, 곧 네 가지 알아차려야 할 곳을 관찰하는 것이다. 즉, 1)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 2) 느낌에 대해 느낌을 관찰한다. 3)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한다. 4) 사실에 대해 사실을 관찰한다. 길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 수..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자들에게 물었다. "어리석고 무지한 중생은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괴롭다는 느낌, 즐겁다는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가진다. 지혜롭고 많이 아는 거룩한 성자도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그와 같은 느낌을 가진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중생과 지혜로운 성자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제자들은 대답 대신 이렇게 사뢰었다. "부처님께서는 법의 근본이시며, 법의 눈이시며, 법의 의지처이십니다. 오직 원하옵나니 저희를 위해 가르쳐 주십시오." "어리석고 무식한 중생은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런 뒤 이들은 곧 근심하고..
「말룽끼야뿟따: 세존이시여, 제가 홀로 명상할 때에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여래께서는 설명하지 않은 것이 있다. 첫째, 우주는 영원한가? ... 다섯째, 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 일곱째,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 여래께서는 이러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이 저에게는 못마땅합니다. 저는 세존께 이러한 것을 묻고 싶습니다. 만약 세존께서 저에게 대답을 주신다면 저는 그 밑에 머물러서 거룩한 삶을 따를 것입니다. 세존께서 알고 계신다면 제게 설명해주십시오. 세존께서 모르신다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로서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보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이 솔직할 것입니다. 붓다: 말룽끼야뿟따여, 어떤 사람이 '나는 여래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여래 밑에서 거룩한 삶을..
한 스님과 더불어 앉아 윤회, 수행, 붓다, 깨달음, 소의경전, 절간 생활, 조계종 상황, 화엄경 등의 주제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내가 여쭈었고, 스님이 답해 주었다. 윤회에 관해서는 이런 질문을 했다. ― "부처님 말씀으로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이해하기에는 이 '무아' 사상이야말로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과 다른 불교의 핵심 사상인데요, 그렇다면 '나'가 없는데 윤회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불꽃이 일고 있는 초가 하나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꺼져 있는 초도 하나 놓여있습니다. 이제 이 초의 불을 옆의 초심지에 닿게 해서 불을 옮겨 봅시다. 자, 무언가 옮겨지긴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옮겨진 주체를 말할 수 있을까요? (... ..
우리의 뇌에는 무의식적인 기억 현상이 존재한다고 한다. 뇌의 해마가 손상되어 장기 기억을 할 수 없는 사람들도 무의식적인 기억 능력은 살아 있다. 그래서 기억상실증 환자도 학습할 수 있다. 무엇을 외웠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해도, 뇌 한구석에 그것들에 대한 흔적은 남는 것이다. 비서술적 기억 혹은 암묵적 기억으로 불리는 이 무의식적 기억 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리 의식 이면의 세계로,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붓다는 깨닫는 과정에서 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또 다른 인간으로 윤회해 온 자신이 거쳐온 모든 전생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붓다는 자신의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을 들여다본 것일까? 윤회는 정말 있는 걸까? 모를 일이다. 13/01/09 * 조슈아..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마침내 티 없이 바르고 곧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신과 악마는 물론 해와 달과 별 등 우주의 모든 친구들이 기뻐하며 부처님 가르침에 귀 기울였다고 한다. 그들도 대체 나는 누구인지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12/11/21 나는 누구인가
정태춘 아저씨는 투사다. 치열하다. 김창완 아저씨는 개구쟁이다. 자유롭다. 정태춘 아저씨가 붓다라면, 김창완 아저씨는 장자다. 붓다가 뗏목을 타고 저 피안의 세계로 부지런히 노를 저어 간다면, 장자는 빈 배가 되어 그저 강물이 이끄는 대로 정처 없이 흐른다. 오늘은 정태춘 아저씨의 노래를 듣는다. 12/08/09 http://youtu.be/r8RmYpn_eDk
며칠 전에 올림픽 역도 영상을 보다가 관련 영상으로 4년 전 베이징 올림픽에서 장미란 선수가 출전하는 장면을 보았다. 눈물이 주책없이 흘렀다. 어제 장미란 선수의 경기가 있었다. 170kg 역기를 가슴 위까지는 들어 올렸으나 머리 위로는 들어 올리지 못하고 그만 떨어트리고 말았다. 잠시 만감이 교차한 듯한 표정을 짓던 장미란 선수가 씨익 웃더니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 한 후 관중을 향해 키스를 보내고 일어서는데 나는 다시 울컥하여 그만 또 울고 말았다. 그깟 쇳덩이 들어 올리는 게 뭐라고 이렇게 눈물이 날까. 유독 장미란 선수가 역기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어떠한 역경도 들어 올리는 불굴의 힘과 용기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인 걸까. 붓다는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라고 ..
초반부에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후치의 아버지는 초장이다. 후치가 아버지에게 특정 재료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묻는다. "적당히."라고 아버지는 답한다. 후치는 툴툴거린다. '적당히'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나 '적당히'의 양을 아는 사람이 고수다. 그것은 오랜 경험으로 체득하는 '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보자. 부처님이 설한 초전법륜(첫 가르침)의 고갱이는 "중도"다. 너무 방탕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금욕적으로 살지도 말란 얘기다. 즉, '적당히'를 설한 셈이다. 역시 부처님은 고수였다. 이쯤 되니까, 도 닦는 업계에서 여전히 올타임 넘버원의 초고수 지위를 차지하고 계신 것이다. 셰익스피어도 고수였던 것 같다. 그는 에서 로렌스 수사의 입을 빌려 말한다. "적당히 사랑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