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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전쟁통에도 예술의 혼은 '네버다이'인가보다. 휘문중 3학년 임영웅은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낭랑하게 서울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고 하니. 인민군이 북한과 옛 소련 영화를 틀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거리를 활보하던 어느날 인민군에 잡혀 어딘가로 끌려간다. 아뿔사, 강제징집이다. 영낙없이 인민군이 되어야 할 판이다. 그때 공산당 학생동맹 간부로 보이는 한 사람이 갑가지 그를 가리키며 소리친다. "야, 인마! 왜 너 거기 있어? 이리 나와!" 청년은 몰래 후문을 열어주며 말한다. "영웅아, 밖으로 나돌지 말고 집에 숨어 있어."* 그 청년은 학교 연극반 선배로, 연극 ′마의태자′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이였다. 두 달 뒤 서울은 수복되었다. 그러나 선배는 수복 때 투하된 미군의 폭격으로 무대를 탈..
Q. 인생에서 삶의 방향을 트는 일은 매우 중대한 결정일 텐데, 선택에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둔 것은 무엇인가요? "삶의 주도성과 행복입니다. 내게는 언제나 주도성이 우선입니다. 내가 가진 아이디어가 하나씩 구체화될 때 기분이 짜릿하고, 사는 맛을 느끼지만 그 반대 경우에는 버틸 수가 없더라고요."- 도시 양봉가 박진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면 내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본다. 내 마음이 더 끌리는 일, 내가 더 자유로워지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솔직히 어릴 때는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더 자유로워지는 일이 무엇인지가 조금씩 더 분명해졌다. 그래서 결단을 내리기 조금은 더 쉬워졌다."- 서촌 옥상화가 김미경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
오늘 도서관에서 우연히 한 아가씨를 보았다. 그 아가씨는 공부를 하다가 잠시 쉬러 일어나 도서관 신문 비치대에서 신문을 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자세가 특이했다. 무릎은 기마자세로 굽히고 발꿈치는 살짝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참장공의 자세로, 그것도 뒤꿈치를 드는 난이도 높은 자세로 신문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자태의 자연스러움과 마치 의자 위에 앉아있는 듯한 태연함과 편안함으로 보아 보통 내공이 아니었다. 나였으면 첫째, 남의 이목이 신경 쓰였을 것이며, 둘째, 힘들어서 부들부들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서로를 모른 채 점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지를 발견한 듯 반가웠다. 고수는 일상에 숨어있었다. 16/03/17 2015/12/31 - 참장공으로 서서 일하기2013/12/11 - 완벽한 스쿼트 자세..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현대 천문학을 이루는 거의 모든 개념을 이미 찾아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심지어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진지한 가능성으로 연구하고 있는 '다중우주론'마저도 그 당시 모색되었다. 그들의 놀라운 통찰력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모르긴 모르되, 특정 종교, 특정 사상만이 배타적으로 사람들을 옭아매지 않았던 자유로운 지적탐구의 분위기도 한몫했으리라. 「(데모크리토스가) 가르치기를, 사물들은 끊임없이 허공을 헤매고 있으며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세계들이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몇몇 세계들에는 해도 달도 없으며, 또다른 곳의 해와 달은 우리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다시금 다른 세계들은 심지어 여러 개의 해와 달을 자랑한다. 세계들 사이의 간격은 똑같지 않아서 때로는 멀고 때로는 가깝다. 일부 계..
「[손석희/앵커]: 질문을 드리고 나니까 제가 매우 세속적인, 속세적인 질문만 한 것 같습니다. 1년 3개월 동안 한 400시간 정도 촬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촬영한 사람들도 힘들었겠지만 촬영 당한 사람 입장에서도 쉽지 않았을 그런 시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개 편집을 하면 제작자 입장에서 그러니까 감독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민하잖아요. 다 버리고 싶지 않은데. 관객들에게 400시간을 보여드릴 수는 없는 거고. 상당 부분 대부분을 쳐내셨는데 버려진 장면 중에 정말 이 장면만큼은 끝까지 버리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게 있었을까요? [진모영/영화감독]: 그런 생각을 합니다. 버린 것에는 미련을 갖지 않겠다. 잊었습니다.」* 14/12/22 * JTBC, 14-12-15, 고수들
「경제적 영달이 적성에 맞는 유형의 인간을 중용하는 데서 오는 해악은, 아주 검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가장 뛰어난 적성을 부정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친절과 자비심을 베풀며 살고 그날 그날의 자기 문제와 과감하게 씨름을 하는 것이 위대한 예술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 것을 해내는 자가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미(美)는 지나치게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요. 검소한 환경에서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미에 대하여 가장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비교해본다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은 (그는 그 시늉을 해보였다) 즐거운 일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아직 미숙한 형태의 것이지요.」* 14/12/10 * 화이트헤드·프라이스, 에서 발췌..
「그[화이트헤드]의 능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든 일에 온건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절제된 사람이었다. 소식을 했고 포도주는 조금 더 마실 때도 있었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았다. 한 번도 자극적인 기호품 같은 것을 요구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혈색 좋고 맑은 눈, 부드러운 피부의 팔순 노인에게서는 남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탐닉에 빠져드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그 모습은 갈수록 감동을 주었다. 또 하나 더 큰 인상을 받은 것은 그의 생활 모습인데, 네 개의 방으로 된 아파트는 다른 어떤 부유한 사람들보다도 더 자유롭고 더 넓은 영혼과 지성을 소유한 자의 모습이 풍성하게 숨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노인의 기묘한 버릇이나 변덕 같은 것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
마루아먀 겐지의 는 저자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매우 소수 독자를 위한 책이다. 불굴의 의지로 홀로서고, 피끓는 야성을 되찾아, 목표를 향해 전사의 함성을 내지르며 전진하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삶을 위해 투쟁할 용기를 지닌 광(狂)자를 위한 책이다. 맹자는 중용의 사람이 최고이고 광자가 그다음이라 하였다. 니체는 어린아이의 경지가 최고이고 사자의 경지가 그다음이라 하였다. 그러나 맹자왈, 어찌해볼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사람은 마치 자신이 중용의 사람인 것 마냥, 어린아이의 경지인 것인 마냥, 그러한 광자를 보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그리 힘들게 사냐며 비웃는 향원이다. 아, 내 어찌 맹자의 말씀을 접할 때마다 식은땀이 아니 흐를 수 있으랴. 마루야마 겐지를 읽으며 다시금 부귀..
초특급 논리학자 스멀리언이 논리의 세계를 희롱하는 도가(道家)라는 점이 흥미롭다. 스멀리언에 의하면 논리학이 차갑고 딱딱한 학문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스멀리언은 철학을 '미치광이'(crazy) 철학과 '합리적인'(sensible) 철학으로 나눈다. 미치광이 철학의 특징은 "광기, 자발성, 유머, 관습적 생각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 초도덕성, 아름다움, 신성, 자연스러움, 시적인 감각, 절대적인 솔직함, 금기로부터의 자유, 모순, 역설, 무규율, 맛깔남(yum-yumnyness)"*이다. 그는 절대적으로 이 정신나간 철학을 선호하며, 논리학은 바로 이 철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멋지다. 시종일관 재치있고 웃긴, 그러면서도 심오한 그의 책 (Tao is Silent)는 최고의 도가 입문서로 손색이..
오늘 하루 장자 연구서를 읽으며 장자를 많이 떠올렸다. 이런저런 동양/서양 철학에 기웃거리다가도 마음이 어지럽거나 그늘이 지려고 할 때면 어김없이 장자로 돌아오게 된다. 오늘 인터넷에서 여든이 넘은 나이에 매일 새벽 4시 일어나 장애가 있는 손으로 하루 10시간 신문배달을 하고, 신문배달이 끝나면 독거노인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 야밤에 파지를 주우러 다니고, 한밤중에 집에 돌아와서는 독서에 여념이 없는 오광봉 할아버지를 보았다. 작은 단칸방에는 , , , , , , , , 등등 이천여 권이 넘는 책이 사면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월급 90만 원에서 매달 20-30만 원 어치는 꼭 책을 사신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기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고아한 서재였다. 송宋나라 몽성蒙城 사람 장자는 옻나무밭을 관리하며..
아흔 연세 김무경 할머니의 가르침, "평상심이 도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몸건강과 정신건강이 조화를 이룬 보기드문 고수, 큰도인이시다. (* 주의: 광고와 함께 자동재생. 어떻게 끄는지 모르겠다.) ("무소처럼 당당하게, 차향처럼 은은하게" 영상 링크.) 14/07/29 대장부 고수들 평상심 홀로서기 2014/08/10 - 장자(莊子) 오광봉 할아버지
「의사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음을 저지하거나 늦추어야 한다고 믿지만, 그런 의사의 사명이 오히려 편안한 죽음을 방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의사는 자연스럽게 죽어가는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한 환자에게도 끝까지 의사의 도움이나 의료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여겨 자연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순환 속에서 죽음이라는 절차는 원래 조용하고 평온한 것이었다. 생을 마무리하는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삶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고, 떠나보내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살아 있는 매순간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바로 죽음이다. 그 의미 있는 순간을 의료가 깊이 관여함으로써 죽음을 더할 수 없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바꿔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란 원래 고..
한 할아버지가 학교에서 늘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나무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하루는 학교(개운중학교)의 한 학생이 물었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응, 나 나무 손질하는 할아버지다.” “그런데 왜 우리 선생님들이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잘해요?” “그건 선생님들이 훌륭하시니까 그렇지.”* 이 할아버지는 그 학교의 재단(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선생이었다. 노인인 그는 자신이 속한 노인세대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14/03/16 * , 11-09-28,
70세의 나이로 턱걸이를 연속 612회를 성공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이진영 씨, 그가 턱걸이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40대부터라고 한다. 그는 평생 보약 따위나 어디가 아파서 약을 먹어 본 적이 없다며, 보약 중의 보약이 바로 턱걸이 운동이라고 턱걸이를 예찬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런 큰 기록의 비결은 뭘까? 그는 비결은 없고, 오직 평생 연습만이 있을 뿐이라고 답했다. 물방울이 한자리에서 오래 떨어지면 돌도 뚫리는 이치와 같다며. 굳이 비결을 하나 더 꼽자면 턱걸이만은 내가 세계 제일이라는 자부심이다. "그런 정신이 없었다면 큰 기록이 안 나왔을 것도 같습니다. 사람의 정신이 그렇게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4/03/07 * , 08-12-22, "세계 턱걸이황제 이진영 씨를 만나다..
「안자가 제나라 재상이 된 지 삼 년 만에 정치는 평온해지고, 백성들은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양구거가 안자의 점심 먹는 것을 보았더니 고기가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경공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자, 다음날 경공은 안자에게 도창 땅을 더 봉해 주겠다고 하였다. 안자는 사양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가난하면서 원망이 없는 그 사실을 스승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더 많은 봉지를 내리겠다고 하시니 이는 저의 스승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스승은 가벼워지고, 봉지는 갈수록 중해지는 것입니다. 사양하겠습니다."」* 14/03/03 * 임동석 옮김, 에서 봄. 각색. 2014/03/02 - 재상 안자의 생활 안자
제나라 3대에 걸쳐 최고 관직에 있었던 안자(안영)는 30년 동안 옷 한 벌로 생활했을 만큼 검소했다고 한다. 「안자는 제나라 재상의 신분이면서 쌀 열 되 값의 베옷과, 겨우 껍질만 벗긴 거친 곡식을 먹으며, 달걀 다섯 개, 그리고 태채라는 나물이 고작이었다. 좌우 신하가 이를 알고 임금에게 알려주자, 임금은 안자에게 읍을 봉지로 내려주고, 다시 전무우를 시켜 대·무염 두 땅을 내려주도록 하였다. 이에 안자는 이렇게 거절하였다. "태공으로부터 지금 임금까지 모두 수십 명의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임금 때마다 신하들이 임금을 즐겁게 하여 땅을 얻어갔다면, 지금에 이르러서는 우리 제나라를 향해 땅을 구하겠다고 달려들어 쟁취하고 기어오르는 선비가 발 디뎌 놓고 붙어 살 땅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듣..
「온종일 방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좌우에는 책들이 있었다. 머리를 숙이면 독서하고 머리를 들면 사색하였다.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촛불을 켜고 글을 썼으며, 도에 뜻을 둔 훌륭한 생각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고, 또 잠시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낡은 옷을 입고 채식을 하며,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성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배우려 하였는데 매번 '지례성성'(知禮成性)과 '변화기질'(變化氣質)의 도에 근거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병상에 누워 다음 날 평온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소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서는 우주를 따르고, 죽어서는 조용히 쉰다."」* 13/11/23 * 이상선, 에서 발췌, 재구성. 장재 죽음 기학
「변씨의 자제와 손님들이 보기에 (돈을 빌리러 온) 허생은 영락없는 거지였다. 허리에 찬 실띠는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은 굽이 자빠졌으며, 갓은 찌그러졌고, 도포는 때가 새카맸으며, 코에서는 맑은 콧물이 졸졸 흘렀다. 그러나 말이 간단하고 눈빛이 오만하며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라곤 없었다. ... (후에 다시 돈을 갚으로 와) "나를 기억하겠소?" 변씨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대 얼굴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는데, 1만 냥을 다 잃은 거 아닙니까?" 허생은 웃으며 말했다. "재물이 생겼다고 얼굴이 좋아지는 건 그대들 세계에서나 있는 일이오. 1만 냥으로 어찌 도를 살찌울 수 있겠소?"」* 13/05/04 * 박희병·정길수 편역, 중 박지원의 에서 발췌, 각색. 연암 박지원
공자가 어느 날 네 명의 제자 자로, 염유, 공서화, 증점에게 각자 소망을 말해보라고 했다. 넷 중 셋은 진지한 태도로 천하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온케 하리라는 자신의 야심을 밝혔다. 네 번째 제자인 증점은 문답이 오가는 동안 대답은 하지 않고 거문고만 타고 있었다. 공자가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점아, 너는 어떠냐?" 부드럽게 타고 있던 거문고 가락이 멎었다. 증점은 거문고를 내려놓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저는 세 사람과 뜻이 달라 송구스럽습니다." "무슨 상관이랴? 각자 자기 소망을 말하면 그뿐이다." 그러자 증점은 말했다. "저는 늦봄, 봄옷을 입고 어린아이와 젊은이들과 더불어 기수가에 놀러가 물놀이를 하고, 기우제 터에 올라 바람을 쐬며 시나 읊고 싶을 뿐,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이에 공자가 ..
일본 홋카이도에는 '베델의 집'이라는 정신장애인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 베델의 집이 추구하는 가치는 다음과 같다. "열심히 하지 않기", "중간에 그만들 줄 아는 미덕", "자신의 약점 드러내기", "편견과 차별 대환영", "안심하고 절망할 수 있는 인생", "약점을 유대 기반으로", "안심하고 농땡이 칠 수 있는 직장 만들기" 등등. 나는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야말로 삼미 슈퍼스타즈의 정신 아닌가?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고, 잡기 어려운 공은 잡지 않는 "지면 어때?"의 정신. 베델의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이 나을까 봐 그 병을 소중히 여긴다고 한다. 그 병 덕에 프로의 세계, 이겨야만 하는 세계, 치기 어려운 공도 기를 쓰고 쳐야 하는 세계, 중간에 그만둘 수 없는 세계, 오로지 ..
승부의 쾌감을 즐기는 타고난 꾼들에게 외환 딜러는 최고의 직업이다. 신한은행 배진수 부부장은 은행 입사 초기부터 은행 내 다른 직원들의 돈을 다 긁어모으는 포커 고수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가 '동방불패'라는 명성이 퍼지자, 국제부에서 그를 외환딜러로 스카우트했다. 그렇게 그는 신한은행의 '대표선수'가 됐다. 그의 딜링 비결은 "나쁜 일은 금방 잊어버리는 편리한 기억력과 좋은 건강" 그리고 "평상심"이라고 한다. 조흥은행 김병돈 부부장은 한 달 평균 원화로 13조 원을 혼자서 매매하는 '괴물 딜러'다. 그는 중개회사의 단말기 시세판 너머 "상대의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외환 딜링이 그냥 재미있는 정도가 아니라 무지하게 재미있다고 한다. "매일 돈 놓고 돈 먹는 게임에 은행이 뒷돈을 대주면..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 취직해, 아내에게 이혼당할 정도로 회사에 헌신하던 의 주인공이 회사에서 해고 당하고 사회에서 퇴출되어 잉여인간이 된 패배감에 울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친구 조성훈은 그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지면 어때?" 주인공은 그 한마디를 듣고 이상하게 졸음이 온다. 그리고 길고, 아득한, 치유의 잠을 자고 일어난 주인공에게 조성훈은 이야기한다. "신경 쓰지 마." "뭘?" "회사 잘린 거." "처음 널 봤을 때······ 내 느낌이 어땠는지 말해줄까?" "어땠는데?" "9회 말 투 아웃에서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상황을 맞이한 타자 같았어." "뭐가?"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
언젠가 어느 글에서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월평균 300만 원 이상의 소득이 필요하다는 글을 봤다. 그러나 연 수입 80만 원으로도 천하에 아쉬운 것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경남 창녕에서 폐가를 수리하여 사는 석청산 씨가 바로 그렇다. 그의 주업은 '정신수련'이다. 부업은 다양하다. 기왓장이나 쌀가마니 등 등짐 지어 나르기, 부산역 광장에서 하모니카 불기, 전 세계를 누비며 그 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단소 불어 주기, 손금 봐주기, 지압해주기, 영화 엑스트라 출현 등등. 석청산 씨는 산으로 도를 이루었다. 단순히 산에 들어가 도 닦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산' 자체를 탐구한다. 어느 한 분야의 궁극을 탐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도인이며, 그들이 깨닫는 무언의 지혜는 그 분야의 테두리 내로 ..
「퉤, 퉤! 터무니없는 소리! ··· 네가 평안무사하고 즐거운 세상을 보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천하제일의 강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허죽은 경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선사가 터득한 진실은 그 도리가 속세의 도리와는 상반되더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바람이 없다면 형체는 운을 따라 돌아가게 되느니라. 삼계가 모두 고달픔이니 그 누가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을까? 구하는 것은 모두 고달픔이니 구하는 바가 없어야만 즐거워지리라.」* 구하는 것이 없는 자, 그 자가 천하제일강자다. 12/10/25 * 김용, 중
천하제일고수가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무공이 고강해서가 아니라, 천하를 굽어보는 당당한 태도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 때문이다. 12/10/21 * 김용, 를 읽고 평상심 김용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것으로 유명한 이국종 교수가 의대생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제목은 "외상과 나". 이국종 교수는 이 강연 제목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외상과 나'라는 제목은 신파다"라면서 "신파에 빠지면 안 된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외과의를 꿈꾸는 당신의 생각도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 분야든 최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거의 도인이다. 이러한 경지에 있는 사람은 전세계를 누비든, 좁은 서가에 틀어박혀 있든, 수술실에서 삶을 보내든, 그곳에서 인생을 배우고, 통찰하고, 진리를 발견한다. “외과의들의 인생은 수술복을 입고 수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술이 끝나 폐기물이 가득한 수술방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이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 그러나 까마득..
'조폭 전용교회'를 개척하는 안홍기 목사는 소싯적 조폭 보스가 꿈이었으며 본인도 인정하는바 "그야말로 개망나니"였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도 아이티 구호활동은 겁나는 일이었나 보다. 아이티에서 "정말 지구 최악의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수백 명씩 길바닥에 나뒹굴고 폭동과 테러가 끊이질 않으며 콜레라가 도는. 그는 머리맡에 팔 길이만 한 칼을 두고 잠을 잤으며, 콜레라에 대해서는 "병에 걸릴 놈은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걸리고, 안 걸릴 놈은 별의별 짓을 해도 안 걸린다고" 믿었다고 한다. 굉장한 믿음이요, 배짱이다. 이 정도는 돼야 조폭들을 순한 어린양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꿀 수 있나 보다. 그 밑에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조폭들의 꿈은 그를 한번 '형님'이라고 불러보는 것이라고 한다.* 12..
초반부에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후치의 아버지는 초장이다. 후치가 아버지에게 특정 재료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묻는다. "적당히."라고 아버지는 답한다. 후치는 툴툴거린다. '적당히'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나 '적당히'의 양을 아는 사람이 고수다. 그것은 오랜 경험으로 체득하는 '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보자. 부처님이 설한 초전법륜(첫 가르침)의 고갱이는 "중도"다. 너무 방탕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금욕적으로 살지도 말란 얘기다. 즉, '적당히'를 설한 셈이다. 역시 부처님은 고수였다. 이쯤 되니까, 도 닦는 업계에서 여전히 올타임 넘버원의 초고수 지위를 차지하고 계신 것이다. 셰익스피어도 고수였던 것 같다. 그는 에서 로렌스 수사의 입을 빌려 말한다. "적당히 사랑하라. ..
직접 만든 스피커로 세계적인 오디오 쇼에 나가 오디오 마니아들을 감동시킨 바 있는 오디오 마에스트로 일명 스님. 소리로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만한 분이다. 스님이 말하는 소리의 궁극은 무엇일까? "어느 단계까지는 좋은 오디오와 스피커가 기쁨을 준다. 이 과정에서 좋은 기자재를 구입하기 위한 끝없는 경쟁이 시작된다. '나는 얼마짜리 가지고 있다'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피곤하다. 이 단계를 지나면 모든 소리가 음악으로 들린다. 모든 소리가 음악이고 춤이다. 더 나아가면 아무리 좋은 소리도 없는 것만 못하다.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물에 허물이 없다."* 나는 이 대목에서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말이 떠올랐다. "깨친 이후에 다시 와서 세상을 관찰하니 그것은 마치 꿈속 같으며, 좋은 일도 ..
묵방산 산지기 이우원. 그의 나이 마흔두 살 때, 그는 가정에서 쫓겨나고 친구들한테 쫓겨나고 세상으로부터도 쫓겨났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해도 실패했고, 인생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집착을 놓게 되었고 먹고 사는 문제에 두려움이 없는 '겁 없는' 새 아내를 만나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1995년부터 산지기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농사일뿐만 아니라 마을 일은 아무것이나 걸리는 대로 했다. 인근 젖소농장에서 쇠똥 치우기, 정미소에서 왕겨 담아주기, 절간 지을 때 목수 심부름하기, 개펄에 나가 조개 캐기 등등. 그의 산지기 철학은 "굶어 죽을 팔자라면 굶어 죽자!"라고 한다. 12/04/07 * 조용헌, ;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