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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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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 취직해, 아내에게 이혼당할 정도로 회사에 헌신하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주인공이 회사에서 해고 당하고 사회에서 퇴출되어 잉여인간이 된 패배감에 울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친구 조성훈은 그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지면 어때?"

주인공은 그 한마디를 듣고 이상하게 졸음이 온다. 그리고 길고, 아득한, 치유의 잠을 자고 일어난 주인공에게 조성훈은 이야기한다.

"신경 쓰지 마."
"뭘?"
"회사 잘린 거."

"처음 널 봤을 때······ 내 느낌이 어땠는지 말해줄까?"
"어땠는데?"
"9회 말 투 아웃에서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상황을 맞이한 타자 같았어."
"뭐가?"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했겠지? 삼진이다, 끝장이다, 라고!"
"······"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볼?"
"투 스트라이크 포 볼! 그러니 진루해!"
"진루라니?"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

조성훈의 이 '지면 어때?' 정신은 일본 노숙생활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다. 현실에도 조성훈 같은 사람이 있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게이오 대학원에서 과학철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다카무라 도모야 씨는 도쿄 인근 야마나시에서 손수 지은 움막에서 산다. 직업은 없다. 단 한 번도 취업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취업할 생각이 전혀 없다. 대학생들 논문 교정 등으로 한 달 벌어들이는 수입은 35~45만 원 정도. 지출은 25만 원 정도뿐이라 매달 돈이 쌓인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평생 잠을 자도 좋을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런 생활을 선택한 계기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조성훈처럼 정신적인 어려움으로 노숙 생활을 체험하고 나서부터이다. 노숙은 할 만했다. 다만 공무원들과 불청객들이 귀찮았을 뿐이다.**

어떤 영혼들은 삶의 밑바닥에서 대자유라는 보물을 발견한다. 고관대작들의 그 어떤 금은보화도, 그 보물 앞에선 빛을 잃어 초라할 것이다.

12/12/28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럼>에서 인용,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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