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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어리석음이 어리석은 자에게 가하는 것만큼이나, 지혜는 지혜를 추구하나 아직 그렇지 못한 자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 그 짐을 덜 수 있도록 지혜를 쫓는 자를 돕고, 어리석은 자는 그냥 내버려 두어라. 지혜를 쫓는 자가 그대보다 어리석은 자를 더 잘 가르칠 수 있느니라." - Naimy, Mikhail. The Book of Mirdad (p. 189). Watkins Media. Kindle Edition.
「'긴장-이완', '펼침-접힘' 또는 '질서-무질서', '도약-쇠퇴': 모든 역사는 냉혹하게 '고저의 기복을 따라' 진행된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투사된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에 내재해 있는 필연성에 따른 것이다. 즉, 작용 중인 요인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필연적으로 고갈되고, 그것을 보충하는 요인에 의해 대체된다. 그러므로 규제적인 역학이 생성의 각 단계마다 본래부터 내재해 ― 가장 신중한 방식으로 ― 있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규제적 역학이 모든 역사적 상황을 조작 가능한 장치로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전략은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하지만, 인류가 나아갈 도덕적 방향의 역할을 할 정도로 그렇게 지속적으로 실생활에 적용된다. 따라서 사물의 흐름 속에서 작동 중인 경..
「지혜로운 것은, 바로 이것이 필자의 두 번째 주장인데, 사물들의 그러함에 전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그것에 접근하는 것이다. 반면에 지혜를 잃는 것은 편파성 속에 잠기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개인적 관점 속에서 구성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의 도가 사상가인 장자에게 현자는 항상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견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장자가 고대 중국에서 도의 총체성을 더 이상 못 보게 만드는 여러 관점의 분열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가장 잘 밝혀 보여줄 것이다. 지혜의 상실은 그가 '성심成心', 즉 생겨난 마음이라고 (우리가 선입견을 가진 마음이라고 말하듯)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몸을 받게 되면'..
「지혜는 지켜봄을 통해 생겨난다. 공부가 아닌 알아차림을 통해, 집중이 아닌 명상을 통해 생겨난다. 지혜는 그대 의식의 성숙을 통해서 나온다. 반면에 지식은 경전과 학자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들에 하나의 체계를 세우는 것을 통해 나온다. 그대 자신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대는 어떤 변형도 체험하지 못한다. 그대가 지혜로워졌다 해도 조심하라. 궁극의 정상에서 보면 지혜조차 어리석음이다. 일반적인 어리석음보다 낫긴 하지만 여전히 어리석다. 아직 그대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지혜를 얻으려면 실수를 겪어야 한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인간은 실수를 통해 새로운 삶의 영역을 개척하고, 실수를 통해 성숙해지며, 실수를 통해 지혜로워진다. 인류가 진화하는 것도 실수를 통해..
「철학: 하나의 관념에 집착지혜: (특권적인) 관념이 없다. 도달한 입장이 없다. 특별한 자아가 없다. 모든 관념을 동일한 면에 위치시킨다. 철학: 철학은 역사적이다.지혜: 지혜는 역사가 없다. (우리는 지혜에 대한 하나의 역사를 기술할 수 없다.) 철학: 설명에 의한 발전(증명)지혜: 말의 다양성 (지혜는 되돌아가야 하는 것,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철학: 보편성지혜: 총체성 (현자의 말은 항상 지혜의 전체를 말한다. 하지만 매번 개별적인 각도에서 그러하다.) 철학: 내재성의 측면(카오스를 단절)지혜: 내재성의 근간 철학: 담론(정의)지혜: 통찰(격려) 철학: 의미지혜: 명증성 철학: 난해하기 때문에 숨겨져 있음지혜: 명증하기 때문에 숨겨져 있음 철학: 인식하기지혜: 깨닫기('to realize'..
「... 지혜의 눈으로 보면, 삶의 의미라는 문제는 그 의미를 잃는다. 또한 현자는 더 이상 진리에도, 그 의미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자라는 것은 더 이상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신비로운 것 혹은 부조리한 것이라는 양자택일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그에게 더 이상 사실 혹은 거짓의 양자택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현자에게 세상과 삶은 자명한 것이다. 현자는 사물은 그러하게 있다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이며, 따라서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는 자이다.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자발적인 복종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며, 철학이 말하는 것처럼 놀..
「따라서 지혜의 반대 항은 거짓이 아니라 편파적인 것이다. 지혜 속에서 완전한 합치의 중용이 진리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파성은 철학에서 오류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타인의 '담론들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여러 학파들 사이의 토론에서 적대적인 입장들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거짓이라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들에서 결핍된 것을 강조하고 따라서 그 결핍된 것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기원전 3세기의 순자에게서도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순자는 묵가와 동시대를 살았으며 추론의 논리적 엄격성에 매우 예민했으며, 고대 중국에서 논박의 실천을 가장 잘 발전시킨 인물이다. 순자는 마음의 '통치적' 역할에 가치를 두었..
「지혜와 철학의 대비에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변별적 특징을 취할 것이다. 첫째, 철학이 논쟁적(투쟁주의적)이길 바라는 반면, 지혜는 평화적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모든 대립을 스스로 금하고 있다. 둘째, 철학이 타인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대화체인 반면, 지혜는 독백이다. 그리고 심지어 지혜는 토론을 피하는 것에 전념하고 대화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 셋째, 철학이 배타적인, 즉 진리가 배타적인 것을 강요하는 반면, 지혜는 이해적이다. 지혜는 대립되는 관점들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단번에 포괄한다.」* 15/09/06 * 프랑수아 줄리앙. (2009).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 철학의 타자. (박치완 & 김용석, Trans.). 한울. 2015/09/05 - 철학은 이해하지만 지..
「흔히 말하듯 철학은 이해한다. 철학은 진리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지혜는 깨닫는다. ... 식물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맹자가 말했듯이 돋아나는 싹을 잡아당기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오히려 싹이 스스로 자라도록 내버려두면서, 종종 그 밑부분의 땅을 '부드럽게 김매주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인식은 객체를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과 관련된 반면에, 깨달음은 간접적으로 항상 우회(깨달음을 용이하게 해주는 충고라는 우회)를 통해서 실행되기 때문에 잠복과 함축에 관련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결코 완벽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기회가 닿으면" 돌출되는 결과에 의해서 드러난다. "보라", "갑자기", 나..
「현자는 이렇게 "그 어떤 개별적인 관점 속에 정체되는 것"을 삼가했으며 "만물의 흐름과의 일치"를 주구하면서 변화를 사유의 거울로 삼고 "과정과 논리"를 지혜의 수련법으로 익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를 들어 줄리앙은 "현자에게는 고정된 '입장'이 없다"고 감히 주장했다. "현실은 지속적인 변모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자의 행위 또한 그러한 것이다." 현자에게 고정관념이 없다는 것은 "현자에게는 내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줄리앙은 그 이유를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한다. i) 현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관념이 있다고 해도 이를 통해 아무것도 재단하지 않기 때문이며, ii) 그 '아무것'도 존중해야 할 정언명령으로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며, iii) 또한 그 어떤 입장 속에 고정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며..
"신이 철학자에게 세상 모든 사람이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을 꿰뚫을 능력을 주었을까!" "관념은 이미 맥이 빠져 있다. 관념은 더 이상 아무것에도 적절하지 못하다. ······ 관념은 종이돈과 같은 것이어서, 한번 구겨지면 결코 매끄럽게 만들 수 없다." "지혜는 회색이다. 이와는 반대로, 삶은 그리고 종교는 다채로움으로 가득하다." "내가 '내 눈앞에' 뻔히 보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들의 양상은 그것의 단순성과 친근성으로 인하여 숨겨져 있는 것들이다." "싹이 땅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 싹을 잡아당길 수는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싹에 온기와 습기와 빛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싹이 성장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
"Books are the quietest and most constant of friends; they are the most accessible and wisest of counselors, and the most patient of teachers."*(책은 가장 조용하고 변함없는 친구다. 또한 책은 가장 만나기 쉽고 지혜로운 조언자이며 가장 인내심 많은 선생님이다.) - Charles W. Eliot 15/01/26 * 에서 봄.
요다는 스타워즈의 장자다. 아래는 마스터 요다의 어록들. 루크: 스승님, 돌을 움직이는 것하고 이건 완전히 달라요. 요다: 아니. 전혀. 차이는 오직 네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다. 너는 기존에 배운 관념을 버려야 해. Luke: Master, moving stones around is one thing. This is totally different. Yoda: No! No different! Only different in your mind. You must unlearn what you have learned. 루크: 알았어요. 한번 시도해볼게요. 요다: 아냐! 한다, 하지 않는다가 있을 뿐이야. 해보는 건 없어. Luke: All right. I give it a try. Yoda: No. Try ..
「불교와 선의 초점을 돈오가 아니라 점수 위에 세워야 한다. 돈오를 잊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 ‘소식’ 하자고, 온 청춘을 다 바쳤는데”를 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 우려하고 경계해야 할 욕심이요 아만이다. 인생의 문제는 몰록 깨달음 한 번으로 끝장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는 없다. 오직 점수만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점오(漸悟)만이 있다. 그리고 그 점오에 정직해야 한다. 정직해야만 자신의 작은 깨달음이나마 전할 수 있고, 그런 공감대 위에서 불교가 이웃을 향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발언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나는 화두를 아껴두기를 요청한다. 물론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선은 불교사적 발전의 한 국면임을 승인하자는 것, 화두를 과감하게 불교적 해석..
「원래 척도(measufre)라는 단어가 고대에는 '한계' 내지는 '경계'를 뜻하던 말이다. 각 사물에는 그에 적당한 척도가 있다. 예를 들어 고대인들은 사람이 적절한 척도(한도)를 넘어 행동하면 그 결과는 비극을 낳는다고 생각했다(그리스 비극이 생생히 그려내듯). 또한 선(the good)에 대한 이해에도 척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의학(medicine)'이라는 단어의 기원은 라틴어 '메데리(mederi)'인데 이것의 의미는 '치료하다'이며 '척도'라는 단어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건강'은 신체와 정신 모두에서 절도를 지킨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지혜는 '절제(moderation)' 및 '겸손(modesty)'과 같게 여겨졌다(두 단어 모두 그 뿌리는 '척도'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수신(修身) 혹은 수양(修養)을 철학의 중심 과제로 늘 꽉 부여잡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동양의 종교나 철학 전통의 위대함이다. 동양의 전통에서 형이상학은 단지 지식으로 알아할 과제가 아니라 몸으로 증득하고 체험하고 검증해야 할 과제였다. 공자가 말했듯이,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로다. 「'철학'의 외양을 한 필로소피가 등장함으로써 전통유학이나 불교는 때 아니게 정체성을 의심 받고, 정당성을 도전 받게 되었다. 논리와 체계로 무장한 철학은 묻는다. "얘야, 유교는 일상의 조언들로 가득 차 있던데, 그건 철학이냐, 잠언집이냐." 그리고 유일신의 초월성을 등에 업은 '종교'는 묻는다. "불교야, 너는 무신론 같기도 하고, 다신론 같기도 한데, 너를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
「어떻게 해야 플로우를 경험하고 더 복합적인 자아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진화에 공헌할 수 있는가? 우선 무엇보다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삶을 최대한 음미하지 않으면서 그저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떤 사람이 내적 불행 때문에 폭발할 듯한 상태라면, 비록 그가 정의롭다고 해도 그를 믿기란 어렵다. 그의 행동은 모범이 될지 모르지만, 그 의식의 부조화는 위험하다. 플로우는 그 자체로 보상일 뿐 아니라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최고의 비책이다. 그러나 자아의 지평을 넓혀주는 활동에서 플로우를 발견하지 않는한, 즐거움만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화를 이끌어나가지 못한다. 따라서 '복합성을 추구'해야 한다. 지속적인 호기심과 관심, 늘 새로운 도전을 발견하려는 마음이 적절한 기술을 ..
「지혜의 세 번째 측면은 한마디로 말해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가 말했듯 "지혜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믿은 사람은 고대 그리스인뿐이 아니었다. 2,000년 뒤에 몽테뉴는 이렇게 썼다. "지혜의 가장 두드러진 징표는 끊이지 않는 명랑함(쾌활함)이다." 어느 문화에서나 현자는 고요한 행복을 누리는, 부러운 위치에 도달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현자들이 했듯이 매우 보편적인 목표에 정신 에너지를 투입하고, 사적인 이득을 위해 애쓰는 대신 더 큰 조화를 목표로 삼을 때, 사람은 자아가 확장되어 진화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자기 중심적인 행동 방식을 초월한다. 그러한 자아는 육체라는 유한한 틀을 넘어서는 목표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라면 불행해질 일에 덜 휩쓸린다. 지혜로운 이는..
「우리 시대의 한 가지 문제는 자제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효과적인 밈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다수 사람에게 죄악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할 정도로 구시대의 것이 되었고, 복합적인 목표(좋은 시민, 직업적 자긍심, 법률과 질서, 절제와 책임 등의 개념)에 힘쓰게 하는 세속적인 방법 역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개인이 자기 수양의 필요성을 이해하도록 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졌다. 아마도 미래를 바꾸려면 주의력을 마지막 한 줌까지 모두 투자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도 좀 더 기꺼이 자연 발생적인 욕심을 절제하고 복합성에 응하려 할 것이다. 결국 그것은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다. 여분의 쾌락을 내주는 대신, 늘 흥미로운 영적 성장의 기쁨을 얻게 될 것이므로. 영성..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자들에게 물었다. "어리석고 무지한 중생은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괴롭다는 느낌, 즐겁다는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가진다. 지혜롭고 많이 아는 거룩한 성자도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그와 같은 느낌을 가진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중생과 지혜로운 성자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제자들은 대답 대신 이렇게 사뢰었다. "부처님께서는 법의 근본이시며, 법의 눈이시며, 법의 의지처이십니다. 오직 원하옵나니 저희를 위해 가르쳐 주십시오." "어리석고 무식한 중생은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런 뒤 이들은 곧 근심하고..
왕양명은 인간의 희노애락, 오욕칠정과 생각(판단)과 감각을 모두 긍정한다. 다만 말한다. '오직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 공(空)에 빠져 꺼진 재처럼 되어 지성을 잃지 말라.' 아, 번개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하는 지혜의 말씀이다. . . ― 구천이 물었다. "근년에 저는 넓기는 하지만 대충 훑어보는 학문에 싫증이 났기 때문에 매번 고요히 앉아 생각과 사려를 물리쳐 그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께서 대답하셨다. "생각을 어떻게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을 바르게 해야한다." ― (구천이) 또 물었다. "공부하여 마음을 수렴하고 있을 때 어떤 소리나 색깔이 앞에 나타나면 평소와 마찬가지로 보고 듣게 되는데, ..
「"경이를 체험한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표현은 결국 "왕이 된다"는 뜻이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천국의 꼬붕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경이를 체험하면 왕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가 선포하는 천국은 권세와 폭력의 세속나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혜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지혜의 왕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왕국인 것이다. 결국 이 내 몸이야말로 천국인 것이다. 이 천국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 몸 속에 있는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다는 뜻이다. 내 몸의 천국 속에서 나는 왕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은 호랑이나 느티나무가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내가 사랑하는 그가 나와 함께 여행하고 또는 내 손을 잡은 채 오랫동안 앉아 있을 때, 미묘하고 감지할 수 없는 대기, 말이나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우리를 둘러싼 채 넓게 퍼져 있을 때, 그런 때에 말해지지도 않았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어떤 지혜로 가득해진다.」 "When he whom I love travels with me or sits a long while holding me by the hand, When the subtle air, the impalpable, the sense that words and reason hold not, surround us and pervade us, Then I am charged with untold and untellable wisdom..
에 적혀있는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은 다음과 같다. "일체 모든 유위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으니 이렇게 관찰하지라." 이것은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이다. 현장스님은 이렇게 옮겼다. "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별, 눈의 가물거림, 등불, 허깨비, 이슬, 물거품, 번개, 구름과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관찰할지라."* '화합'이란 번역어가 절묘하다. 나는 이것을 '이원성'으로 해석한다. 이원성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무상하다. 전재성 박사는 이렇게 옮겼다. "별들처럼, 허깨비처럼, 등불처럼 환상처럼, 이슬처럼, 거품처럼 꿈처럼, 번개처럼, 구름처럼, 이처럼 조건지어진 것을 보아야 하리.'"** '조건지어진 것'이란 번역어도 나쁘지 않다. 전재성 박사의 번역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
'고난의 시기엔 바짝 엎드려 있는다.' 지금은 스페인에 가 있는 지인이 즐겨 말하던 경구다. 6.25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한 농민이 해준 이야기라고 한다. 오늘 아침이었다. 회색빛 태풍이 날카롭게 고함치며 온 천지를 위협하는 가운데 초록빛 벼가 손에 손잡고 아슬아슬 몸을 바짝 기울여 열매를 꼬옥 품에 안아 지키고 있었다. 쑥밭이 된 너저분한 마을 거리에 서서 나는 그 농민의 지혜를 떠올렸다. 12/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