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지혜란 기다릴 줄 아는 것 본문

명문장, 명구절

지혜란 기다릴 줄 아는 것

모험러

「'긴장-이완', '펼침-접힘' 또는 '질서-무질서', '도약-쇠퇴': 모든 역사는 냉혹하게 '고저의 기복을 따라' 진행된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투사된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에 내재해 있는 필연성에 따른 것이다. 즉, 작용 중인 요인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필연적으로 고갈되고, 그것을 보충하는 요인에 의해 대체된다. 그러므로 규제적인 역학이 생성의 각 단계마다 본래부터 내재해 ― 가장 신중한 방식으로 ― 있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규제적 역학이 모든 역사적 상황을 조작 가능한 장치로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전략은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하지만, 인류가 나아갈 도덕적 방향의 역할을 할 정도로 그렇게 지속적으로 실생활에 적용된다. 따라서 사물의 흐름 속에서 작동 중인 경향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상황이 만들어낸 장치가 그 경향에 따라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이상적인 지혜가 된다. 모든 역사적 상황은 심지어 가장 불리한 상황마저도 항상 미래에 전개될 변화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다소 긴 시간에 걸쳐 전개되는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 즉 시간이라는 요인에 의지하기만 하면 된다.


왕부지에 따르면, 번갈아 나타남의 시간적 논리를 성공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일반적 원리만 알면 충분하다. 우선, 반대되는 지나침이 그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일어나기 전이라 해도 모든 지나침을 삼가야만 한다. 다음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순간에도 그 변화를 꿋꿋하게 잘 견뎌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변화가 필연적인 대세가 되었는데도 이에 맞서고자 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파괴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 자질이 아무리 탁월하다 할지라도 충정 때문에 자신의 현재 상태(statu quo)를 고집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도 타개하지 못한 채 스스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정한 능력은 변화를 뚫고 나아갈 줄 아는 것이다(그리고 변화로부터 매번 가능한 모든 이익을 얻어낼 줄 아는 것이다). 특히 불운을 행운으로 전복시킬 기회가 단순히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번갈아 나타남의 논리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주어진 가능성을 이용하고 이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성공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늘'은 '인간을 돕는다'. 그러나 하늘은 특히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따라서 지혜란 논리적으로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며, 이러한 경지는 가장 커다란 효율성을 지닌다. 지혜란 '기다릴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현자는 불균형으로 이끄는 모든 과정이 처음에 강화되었다가 나중에 저절로 약화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 과정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던 경향이 불가피하게 처음과 전복된 상황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이 객관적 과정이 전복에 가장 적합한 단계 ― 예를 들어, 이 과정의 모든 부정적 요소가 고갈됨으로써 가장 완전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는 단계 ― 에 이를 때까지 정확히 기다릴 줄 아는 자이다. 현자는 바로 이 경지에서 인간적 개입을 최소화시킴을 통해 모든 것을 좋은 방향으로 다시 이끌어가고 상황을 재건할 수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사물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우리는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 내재해 있는 역동성으로부터 이득을 얻는다. '하늘에 거역하여 싸우고자' 하는 것, 즉 과정의 자연적 흐름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도 그것에 거슬러 행동하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나 과정의 자연적 흐름이 원하는 결과에 완전히 다다르기 전에 우리가 너무 일찍 개입하는 것도 ― 우리가 이를 깨닫는 것은 더 어렵다 ―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우리의 행위가 과정에 의해 '논리적으로' 정해진 방향으로 잘 나아기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행위는 과정을 강요하여, 그 과정에 자연스러웠던 최적의 상태를 넘어서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과정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방법으로 다시 평형 상태로 돌리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한 성급함으로 인해 우리는 아무런 보람도 없이 갈등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마침내 유리한 기회가 다가왔을 때에도 그 호기를 놓칠 위험이 있다. 가장 큰 잘못은 조급증이다. 그와는 반대로, 왕조를 건설한 옛 선조들의 지혜는 타락한 왕들의 독재가 극에 달해 상황이 무르익고 균형의 추가 다시 자신의 손에 되돌아올 순간을 알아차렸다는 사실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그러한 순간이 올 때까지 견디며 기다릴 줄 알았던 그들은 '조용히 일어서기만' 하면 되었고, 모든 사람의 열망에 부응해 별다른 노력 없이 그들에게 유리한 계획을 실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지나치게 전제적이고 강제적인 권력의 예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쇠퇴일로에 있는 점진적 경향에 기대어', '실행 불가능한 것이 저절로 해결되기'를 기다렸던 사람들[무제 때의 곽광, 한대의 소제, 송대의 사마광]은 결국 상황을 새롭게 제어하고 진정시킬 수 있었던 반면에, 권력에 즉각적으로 맞섰던 사람들은 파멸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운, 즉 '불가사의한 하늘의 뜻'은 바로 이러한 '논리'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이 논리는 또한 '상황[역사적인 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경향과의 단순한 일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 대한 분석에 근거해 사건의 불가피한 형세를 예측하고 앞서가는 것이 합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왜냐하면 앞으로 전개될 사건이 진행 중인 경향에 의해 함축되어 있고, 이 경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전복의 실미리가 이미 드러나기 때문에), '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지혜'가 필요하다. 또 다른 예로서 후한시대(1~2세기)의 환관의 권력 상승에 대해 살펴보자. 이 경우에도 환관의 권력에 직접적으로 대항한 사람들은 모두 살해당했다(모든 고관대작들, 그리고 168년에 두무가, 25년 후에는 하진이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독재 정치는 점차 그 도를 넘어서면서 그동안 은밀히 쌓인 너무나 많은 원한을 야기했기 때문에, 결국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단죄를 받게 되었다. 사실 어느 맑은 날 '이미 꺼져가고 있는 등불을 꺼버리기 위해서는 바람이 한 번만 살짝 불어도 충분할 것이다'. 즉, 이러한 전복의 신속함과 수월함은 미리 예견되는 것이다'. 혜안을 지닌 장군 조조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미소만 띤 채 '평범한 간수가 우리를 이러한 재앙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나게 해 줄 것이다!'라고 말하였었다. 결국 권력을 쥔 사람은 바로 그였다.


이에 반대되는 증거로 12세기 송나라의 유명한 장군 악비를 들 수 있다. 이 장군은 중국 왕조가 나라의 북쪽 절반을 침략자에게 넘겨주게 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적을 공격하고 복수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실은 전쟁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휘하 장군들의 동요에도 신물이 났기 때문에 이미 화평을 맺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장군의 부푼 열정은 오히려 왕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결국 장군은 적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고 한창 나이에 감옥에서 처형당하게 된다. 만약에 악비가 잠정적으로나마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명예욕을 낮추고 전설적인 준엄한 용맹을 약간 희생할 줄만 알았더라도, 그는 주요 정적(진회)의 패망과 침략자들이 맞닥뜨릴 곤경, 그리고 '다시 진작될 왕실의 사기' ― 이 사기 진작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 를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군대의 수장으로 다시 시작해 훨씬 더 큰 성공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도' 결과적으로 나중에 '한 요소가 다른 요소로 대체됨으로써' 연속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법이다. 즉, 경향이 자신에게 반대될 때는 '움추릴' 줄 알고, 경향이 자신에게 우호적일 때는 주도권을 다시 쥘 줄 아는 사람은 전혀 '압박을 받지' 않으며, 시간이 흐른 뒤에는 결국 '모든 것을 얻는다'. 본질적인 것은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미래의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이후에 절대로 적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영웅적' 장군을 칭송했던 사람들은 정확히 그를 실패와 죽음으로 이끌고 갔던 바로 그 점에 대해 박수를 보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역사 속에서의 끊임없는 격찬은 가장 나쁜 비방보다도 훨씬 더 '독이 되는' 법이다.


이 모든 것들은 가치의 위계를 보여준다. 사실 도덕적인 '지조'는 성공의 요인으로서 지적 '통찰력'보다 더 우월하다. 그것은 정신의 순수한 포착 능력으로서의 통찰력이 순간적으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 굳건함에 호소하는 지조는 지속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실재 전체와 함께 전개된다. 그래서 도덕적 지조가 '자연'이라면, 지적 통찰력은 단순히 '기능'의 역할밖에 못한다. 사실 통찰력은 매 순간 요청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갈되는 반면에, 인내는 시간의 흐름과 결합함을 통해 잘 견뎌내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고갈되는 법이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인내는 하늘에 비교될 수 있는데, 하늘의 능력은 '항구적인 지속성'이다. 하늘의 능력은 과정 속에 내재해 있는 고등 지성에 근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의 능력이 장기간에 결쳐 전개됨 속에 있는바, 장기간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성공은 순간적일 뿐이고, 모든 실패도 결코 최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향이 지닌 이러한 논리적이고 불가피한 특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성공했을 때 신중하게 처신할 줄 알고, 실패했을 때도 자신감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말엽, 제국의 왕이 되고자 했던 유방과 항우 사이의 유명한 투쟁이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그중 한 사람은 오랫동안 통찰력을 증명해 보였지만 결국 패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으며, 홧김에 자결했다. 반대로 또 다른 사람은 몇 번이나 제거될 뻔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나자마자 이 어려움을 새롭게 이용해 세력을 재건하고 재공략에 나섰다. 결국 승리한 것은 그였다. 이러한 것이 바로 정의인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매우 단순하게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역사의 장치는 그 자체의 고유한 논리를 통해 인간의 주도권에 폭넓은 여지를 부여해준다. 왜냐하면 첫째로 역사의 과정은 항상 그 자신 안에 경향의 불가피성을 넘어서는 일종의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우연(또는 운명)의 잉여적 요소이다. 비록 모든 경향이 일단 시작되면 필연적으로 특정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것 ― 경향이 방금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매우 미세한 수준에서 결정되어버리는 발생 단계에서조차도 ― 은 사실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하늘'의 신비 한 차원의 지배를 받는,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부분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그래서 이러한 요소는 하늘에 초월적인 면을 되돌려주게 되는데, 경향의 순수한 합리성은 그러한 면이 있음을 부정하였었다). 자연의 흐름이든지 역사의 흐름이든지 간에, 하늘은 항상성의 원리이자 동시에 상황의 요인이다. 거시적 수준에서는 불가피한 규제적 과정(출현과 소멸, 도약과 쇠퇴의 번갈아 나타남을 통한)이 작용하지만, 그 과정은 미시적 수준에서는 때로는 순전히 우발적인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늘은 하나이고, 현자의 지식은 이러한 두 측면을 연결하는 것이다. 현자의 지식은 진행 중인 과정에 대한 인식 덕분에 기회를 가능한 한 일찍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또한 상황적 기회로부터 규제적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만약 '경향이 항상 결정되어 있다면', 그 경향을 잘 관리하는 것 또한 언제나 인간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원칙상 우리가 약한 상태에서 '단번에 힘을 확장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바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힘도 결정적이지 않으므로 '반대되는 힘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릴 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힘의 관계 속에서 쇠퇴로 나아가는 경향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는 중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몰락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 송 왕조의 몰락과 그 몰락의 뒤를 이은 몽골족의 침략을 들 수 있다. 몽골족의 침략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12세기에 있었던 금나라의 부분적인 첫 번째 북방 침략과 그보다 한 세기 반 후에 일어났던 몽골의 결정적 침략 사이에서 상황은 몇 번에 걸쳐 변화했으며 경향도 왔다 갔다 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 대항할 수 있는 여러 수단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남쪽으로 후퇴했더라면 전투는 훨씬 더 오래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적군의 전진을 막고 중요한 요새지를 사수함을 통해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다. 사실 '순간의 경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에게는 활로가 항상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전멸은 지도자(이종과 그의 두 재상)의 잘못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왕부지는 송 왕조의 몰락을 환기시키면서 그보다 4세기 후에 있었던 만주의 침략에 대항해 자신이 결코 무력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사실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요컨대 경향의 결정론에 근거하여 행동함은 우리를 체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항하는 인간이 되도록 격려해준다.」*


15/09/15


* 프랑수아 줄리앙. (2009). 사물의 성향: 중국인의 사유 방식. (박희영, Trans.). 한울.



모험러의 책방

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0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