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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는 대립물들의 내재적 상호감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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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는 대립물들의 내재적 상호감응

모험러

「이를테면, 강剛유柔는 서로 대립하며, '건조'한 것이 있으면 습한 것도 있다. 그러나 건조한 것의 건성만을 고집하다 보면, 딱딱해지기는커녕 부러지기 십상이며, 습한 것의 습성을 고집하다 보면, 유순함이 지나쳐 액화되어 버린다. 적대적 양상의 각 부분은 상반된 성향들과 균형을 이룸으로써, 즉 반대 부분과의 의존과 소통에 의해 구체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서 두 공리가 도출된다. 그 하나는, 이것저것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각 양상은 다른 양상과의 대립관계를 통해서만 그 자체로 존재하며 정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다시 말해, 정체성 속에서 확인되는 각 양상은 반대의 것에도 속한다)라는 사실이다. 물론 다름은 운행의 기원에 이미 나타난다. 하지만 대립에서 기인하는 연속적 상호작용에 의해 이것은 항상 상호 대립적으로 출현하면서도 보다 잠재적으로 저것을 내포한다. 이를테면, 순수한 양은 하늘을 이루며, 순수한 음은 땅을 이룬다. 그러나 하늘은 음의 요소를 담고 있으며, 땅 또한 양의 요소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원래 유柔한 땅은 강剛해질 수 있다.) 혹은, 여자다운 점이 없는 남자란 없으며, 남자다운 점이 없는 여자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와 마찬가지이다. 존재가 출현하는 운행과정에서 음과 양은 분리 상태로 대립하지 않아, 지속적으로 상호 침투하여 서로를 적신다. 왕부지는 특히 주돈이의 입장에 대립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즉 비록 실재하는 모든 것이 극한에서의 전복을 통해 상반된 것을 내포한다고 해서 다른 것이 시작되도록 하고자 굳이 결정적인 대체의 순간을, 극한에로의 이행을 기다릴 필요는 없음을 강조한다. 다름이 극단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상호감응을 통한 출현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또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근원인 상호작용에 따라 배우자의 징후를 내적으로 포함한다는 사실로부터 조절이나 조화에로의 회귀도 가능해진다. 


이 상관성에 관련된 제반 중요성은 모든 지적 작업의 이행에서도 본질적인 것이다. 어떠한 실재도 일방적이거나 개별적으로는 인식될 수 없다. 모든 실재는 그 자체를 형성해주는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파악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실재에 대한 분석의 결과란 개별화할 수 있는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관계이다. 분석에서 드러나는 것은 기이하며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연계(운행의 연계) 속에서의 일련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천둥'이나 '바람'이 아니라 '천둥'이나 '바람'을 있게 하는 상호 작용관계이다.('잽싼 천둥'에 따라 '광풍'이 일어나며, '미풍'에 따라 '천둥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 천둥은 바람과 분리된 채 그 자체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역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태양과 비, 산과 계곡, 하늘과 땅 등의 다른 모든 실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릇 어느 것도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연루됨으로써만이 존재한다. 이 논리는 금세기 중국의 대사상가인(중국전통의 독창성을 가장 탁월하게 해석한) 당군의 역시 분명하게 내세우는 점이다. 그는 고대중국 '오행' 사상과 소크라테스 이전 '물리학자'들의 여러 이론들의 겉으로 보이는 일치점보다는 그 너머의 본질적인 대립요소들을 강조한다. 중국전통에서는 개별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기본요소들을 결정하는 것보다 총체적인 근본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반면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로지 제반 요소들에 대한 개별적 분석이며, 이를 통해 그들은 '원자론(atome)'과 이에 따른 물리학을 정초했다.


이러한 관점은 담론의 형성에도 최대한 근본적으로 작용한다. 즉 이것에 대해 말함은 동시에 저것에 대해 말함이다.(천둥에 대해 말함은 동시에 바람에 대해 말함이오, 비를 말함은 동시에 태양에 대해 말함이며 하늘에 대해 말함은 동시에 땅에 대해 말함이다.) 공자 역시 이러한 담론의 양가성, 즉 이것에 대한 말은 동시에 저것에 대한 간접적인 명시라는 관점에서 삶을 말했을 뿐, '죽음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진정 삶이 무엇인지를 내면으로 터득한 자는 죽음 역시 깊이 깨닫는다. 관계란 외부적인 것도 부차적인 것도 아니다. 관계는 존재의 내재적 근원이며, 상관성은 실재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실재는 연계와 운행이라는 말들로 분석되게 마련이다.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한 (양상) 음-한 (양상) 양. 이것이 (세계흐름의) 실재(길, 道)이다."로 풀이되는 이 술어는 예로부터 운행을 이해하는 토대가 되어왔다. 이 표현은 다소 모호하긴 해도 상술한 우리의 결론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하다. 왕부지가 환기시키듯이, 만약 음과 양을 절대적으로 분리된 두 양상으로 간주한다면, 개별화된 음과 양은 모두 도일 수 없으니, 그로 인해 도는 필히 음과 양 너머의 '공허' 속을 부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음-양의 개념들은 그 자체로 와해되어 오직 음-양의 관계를 벗어난 도만이 존재하고 말 것이다. 반대로 적대적 양상을 무시하여 음과 양을 완전한 짝으로 간주하는 것도 전자와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역시 음양 그 자체로는 내적 실재를 이룰 수 없는 단순한 등가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등가 관계 외부의 모든 것을 포괄하기 위한 총체로서의 도는 이러한 관계를 넘어섬으로써만이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나는 도가적인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불가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이 두 해석은 모두 도를 음-양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둘은 도를 세계(음과 양)의 구체적인 흐름으로부터 단절된 것으로, 뿐만 아니라 세계의 흐름 너머로 던져진 일종의 '형이상학적' 실재로 간주하면서, 각자 다른 방식 속의 동일한 이상주의를 반복하는데 불과하다.


서로 상반되나 등치를 이루는 이 두 입장 사이에서 위의 표현을 엄격히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음과 양은 분리됨과 동시에 상관적임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음과 양은 근원적으로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연속적으로 관련을 맺는다는 인식에 따른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에 대한 적실한 풀이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 "때로는 음-때로는 양(동시에 음-동시에 양). 이것이 세계 흐름의 실재이고, 길이자 운행이다." 이 경우, 음과 양 그리고 도는 셋이 아니며 단지 둘일 뿐이다. 도는 음양의 관계 외부에 머무는 제삼자로서의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음과 양은 분리되어 있음과 동시에 상관적임에 따라 둘 사이에는 언제나 교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교대가 ―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이 교대만이 ― 세계 흐름의 실재와 도와 운행을 이룬다. 모든 실재의 도약에 내재하는 다름의 진정성은 오직 이 방식에 의거함으로써 인지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 더불어 이 타자성은 오직 교대로서만 생각될수 있으며, 무시무종의 영원한 생성으로 펼쳐진다.」*


15/09/18


* 프랑수아 줄리앙. (2003). 운행과 창조. (유병태, Trans.). 케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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