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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은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중간이 아니다 본문

명문장, 명구절

중용(中庸)은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중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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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체계가 그 변화능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획일적이며 고착된 모형으로 축소되지 않아야 한다. 괘의 조합체계는 약정된 틀에 갇히지 않을 때만이 그 타당성을 지닌다. 변화는 미리 주어진 어떤 틀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운행사상이 진정 실재에 대한 이해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운행 그 자체를 고정된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운행이란 그 자체 속에 언제나 다름과 괴리와 새로움이 드러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부지는 <주역>의 고대 주석가들의 해석을 좇아 보다 깊이 있는 체계와 변형, 완벽성과 가변성을 연결하는 관계를 천착하였다. 모형이 모형인 이유는 삶이 그 자체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행사상이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바로 그 사상을 통해 전체와 개체가, 논리적 예견과 불확실한 구체가 서로 어울리며 관계하기 때문이다.


한편 괘의 구조는 결정적임과 동시에 다각적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인간의 위치는 다각적이다. 인간의 위치는 괘의 중간 두 효이다.(왜냐하면 만물 중에서 인간만이 천지 사이에 자신의 고유한 길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치는 괘의 상·하효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만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원 역시 천지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치는 육효의 전반에 걸쳐 일다. 중심의 기능 역시 다각적이다. 괘에(3과 4효 사이에)는 유일한 중심이 없는 반면, 병립하는 두 중심(2와 5효)이 있다. 이는 운행논리의 측면에서 보면 확실한 현동의 단계에서는 어떠한 중심도 지각될 수 없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고유하고 자율적인 개별화로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면 현동 이전의 단계에서 보면, 중심이 아닌 것이란 없다. 잠재단계에서의 모든 것은 본질적 공동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만일 하나의 중심만 있다면 구조는 이내 경직되고 말 것이며 무한한 변이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 경쟁적인 두 중심이 공존하는 까닭에 구조는 결코 경직되지 않으며 연속적인 변화를 낳는다. 이원적 중심은 대립과 보완의 이원론 못지않게 운행논리에 필수적이다. 중심은 결코 사전에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기에 이 해석은 윤리적 차원을 포괄한다. 모든 극한도 수시의 요구에 부응하기만 한다면 중용이 될 수 있다.(기쁨이나 고통도, 또한 참여나 은둔도 중용이 될 수 있다.) 중용은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행하지도 멈추지도 못하는 어정쩡함이 아니다. 중용은 오히려 이에도 저에도 두루 능함이며 언제나 제때에 능함이다. 왕부지는 중용을 천박한 중간으로 이해하여 중국전통에서 우유부단한 소심함으로 전락시킨 모든 자들을 통박한다. 진정한 중심은 정태적 등거리의 반대로서 극한을 통해 일체에 가 닿을 때만이 가능하다. 두 중심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은 모든 실재가 불공평하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없이 양극을 오가면서 결합함을 뜻한다. 세계의 운행은 무한히 그 근간을 이루는 일정함과 공평함을 잃지 않고서도 언제나 "사물의 실재의 궁극에까지", 즉 변이의 끝까지 나아간다.」*


15/09/22


* 프랑수아 줄리앙. (2003). 운행과 창조. (유병태, Trans.). 케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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