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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성이 지나치면 완고함이 되고, 유연성이 지나치면 줏대를 잃게 되니, 현자는 비편파성의 흐름을 탄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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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성이 지나치면 완고함이 되고, 유연성이 지나치면 줏대를 잃게 되니, 현자는 비편파성의 흐름을 탄다

모험러

「모든 생성은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는 점에서 이미 조절을 내포한다. 조절은 유동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내재하는 이 자극-조절의 능력은 운행의 비가시적 효능의 차원을 이룬다. 반면 비가시나 정신의 영역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면 불임성은 즉시에 야기되며, 그 결과 사물화(정체와 소멸)가 초래된다. 현자의 말도 이와 같아서, 그의 말이 단지 암기되고 인용되는 데 그친다면 더 이상 그 말의 생동한 의미의 원천인 내적 '흐름'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말해진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는 (논리적 '진실'을 내용으로 하는) 가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의 뜻은 현행상의 자극과 작동상의 운행 속에서만 타당성을 지닌다. 말은 '정신'을 통하여 전달될 때 비로소 그 진정성을 얻는다. 이 통행활성의 기능을 중시하는 유가전통은 (모범으로 제시되는) 추상적 진실의 관점이나 고립된 형이상학적 존재의 관점을 배제한다. 통행은 항상 행해져야 하며, 실재성은 실재의 흐름에만 있다. 이는 흐름이 없는 실재란 실재가 아니며, 바로 비가시의 차원이야말로 실재에 내재하는 흐름과 같음을 뜻한다. 흐름이 있기에 그로부터 덕성이 비롯되는 것이다.(그리고 덕성이란 오직 이 덕성뿐이다.) 왜냐하면 전체는 흐름을 통해서만 포괄되며, 비편파성('中')은 총체를 항구적으로 파악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비편파성은 운행이 어긋나거나 정체되지 않도록 늘 통행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항구적인 활력이 생겨난다. 조절능력을 지닌 활성화는 이 변함없는 의 결과 그 자체이다. 그래서 '중'의 비편파성에 의해서만 진정 자신의 존재가 가능하며 (하늘이나 현자의 경우처럼 성誠의 뜻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비편파성은 가장 깊은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비편파성은 영속적 흐름을 가능하게 한다. 보다 본질적인 면에서, 비편파성은 존재를 발생시키고 거듭 나게 한다. 모든 편파성은 자연발생적인 소통을 가로막는 만큼이나 존재의 역량을 위축시킨다. 의식의 운행이나 세계의 운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덕성은 '도덕'뿐만 아니라 '우주론'에 관계된다.(즉 이 점에서 우주론과 도덕이 구별되지 않으며, 성의 개념은 전통적으로 이를 시사한다.) 더욱이 지혜의 본질을 묻는 고대중국의 성찰도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모색을 통해 사유를 풍요롭게 했다. 개별적이어서 배타적인 어떤 자질에 연연하지 않는 현자는 운행과의 영속적인 일치로 나아가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현자는 결코 자신의 주관에 따라 결단을 내리지 않으며, 아무리 좋은 방향이라 하더라도 어떤 한 방향으로만 주관을 고정시키지도 않는다. 현자는 의식을 한결같이 흐르도록 유지하여 각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반응한다. 각 개별적 자질은 사람을 경직시키고 주름지게 하여 열린 의식에 결함을 야기하거나 우리의 내면을 다양한 상황에 어긋나게 할 여지를 안고 있다. 이러한 모든 자질은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고착화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아무리 곧바르고 모든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여도(맹자가 전하는 백이의 경우처럼) 혹은 이와 반대로 사람이 아무리 부드러워 항상 순응한다 하여도(맹자가 전하는 유하혜) 이 모두는 경직된 개인화의 자질을 이룰 뿐이다. 각 개인화된 자질은 불충분하여 인간의 바탕에 경직된 모습만을 보여준다. 경직성이 지나치면 완고함이 되는 반면, 유연성이 지나치면 줏대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현자는 때로는 요지부동을, 때로는 유연성을 지닌다. 


현자란 절대 긍정적인 의미의 기회주의자이다. 다시 말해 현자는 자신의 고유한 자질에 결코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운행의 순간에 언제나 완벽하게 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주의자'인 것이다.(그 옛 전범인 공자는 공직에 임해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다.) 현자와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비가시의 역량(즉 성誠)을 이루는 것은 바로 항구적인 조응과 부응의 자세이다. 운행에 잠재하는 바탕처럼 현자 역시 자신 속에 암암리에 잠재하는 모든 덕성을 지닌다. 그리고 현자의 각 덕성은 다른 덕성들을 배제하여 지속적으로 발휘되기보다는 그 필요성에 따라 발휘된다. 잠재성은 만능의 조건이고, 지혜로움은 무한한 도덕적 여건이다. 그러므로 현자는 서로 배척하지 않는 모든 덕을 잠재능력처럼 보유할 수 있으며, 운행에서처럼 인간에게도 유일한 항수라 할 완벽한 중中 속에 머무른다. 그래서 현자는 겉으로는 전혀 돋보이지도 또한 출중하지도 않으며, 아무런 특색 없이 지극히 무미한 사람처럼 보인다.(이 점에서 우리는 중국의 조상彫像과 서구의 조상간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무미건조함은 적응력의 조건 자체이자 운행의 비의도성과 동질적인 것이다. 의식에 대한 유일한 윤리적 요구는 그러므로 결국 놀랄 만큼 단순하며 모든 명령과 규범으로부터 지극히 자유롭다. 왜냐하면 이러한 윤리적 요구는 단지 흐름 속에 머물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계에서 그리고 사람에게서 비가시의 효능적 차원을 이루는 것은 드러나지 않으나 운행의 흐름과 분리됨이 없이 나아가는 줄기찬 수행력이다. 종교적 배후를 떨쳐버린 비가시적인 것(神) 혹은 정신영역(化)은 궁극적으로 운행을 운행 도상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15/09/21


* 프랑수아 줄리앙. (2003). 운행과 창조. (유병태, Trans.). 케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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