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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가운데의 그 보잘것없음이 오히려 덕이 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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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가운데의 그 보잘것없음이 오히려 덕이 된다

모험러

선생님(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운데의 하찮음(中庸)이 덕이 되니 그 얼마나 지극한가! 백성들은 오래 유지하는 일이 드물구나."(옹야/29)


「이 한 마디! 좁게는 유가사상의, 넓게는 동양정신의 정수를 이루는 중용론의 남상(濫觴)은 이처럼 소박한 모습을 지닌 한 마디였다. 이제 이 짧은 단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이 보잘것없는 한 마디가 그토록 커다란 파장을 만들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중용이 덕이 된다" ― 우선 이 첫 마디야말로 범상치 않은 구조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지(之)자를 중심으로 중용(中庸)과 위덕(爲德)이 강렬한 대비 효과를 발하며 극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말에서 그러한 극적 효과를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용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이미 "중(中)은 천하의 바른 길이요, 용(庸)은 천하의 정한 이치다"하는 해설을 비롯하여 갖가지 난삽한 우주론적 해석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이 말을 처음 했을 때만 해도 중용이라는 말은 아직 견고한 개념이 아니라 그가 편의적으로 조합한 일시적 용어에 불과했다. 이 점은 중용이라는 용어를 조금만 주의 깊에 뜯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중(中), 이 말은 당연히 사고와 행동의 양극화 현상 앞에서 공자가 주장하는 제3의 길, 즉 중도를 말한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평균치로서의 중간은 아니지만 양극화 현상에 있어서 확실히 양극의 질적 지양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가운데(中)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용(庸)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함에 있어 우리는 천하의 정한 이치니 무어니 하는 정자(程子)의 해설에 구애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논어에 입각해서 볼 때 공자의 용은 무엇인가? 그는 왜 중을 용과 결합시켰는가? 공자가 이 말을 처음 사용했을 때의 용(庸)은 평범함, 대수롭지 않음, 하찮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용렬(庸劣)은 못나고 열등한 것, 용졸(庸拙)은 못나고 좀스러운 것, 용인(庸人)은 용렬하고 못난 사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용(庸)은 중(中)에 모아지는 일반인들의 시각이었다.


공자가 그토록 강조한 중간치, 양단이 아닌 가운데치는 팽배한 양극화 현상의 와중에서는 도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평범함 혹은 하찮음에 불과하였다. 공자는 일반인들의 이러한 평가를 의식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에 역설적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중용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반어다. 중용의 이러한 반어성을 이해함이 없이 그것을 마치 눈부신 황금의 문장처럼 떠받드는 것은 전적으로 무익한 일이다.


... 팔일/24에서 역시 광간지사(狂簡之士)로 보이는 의봉인(儀封人)이라는 자들은 공자를 만난 자리에서 "군자가 이 정도라면 우리가 일찍이 만나 보지 못한 바도 아니오"하고 노골적으로 실망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공자는 바로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말했다. 양극이 아닌 가운데의 그 보잘것없는 것이 오히려 덕이 된다! 당신들이 불만을 느끼는 그곳, 당신들이 꿰뚫지 못하는 그곳, 당신들이 비웃고 있는 그곳, 그 곳이 바로 극적 반전의 자리다! 따라서 그 자리가 어찌 지극하지 않겠는가!


만약 초기의 『중용』이 중용의 이러한 입장에 대한 의식적 변론이었다면, 그것은 마치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실패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승리의 상징으로 반전시켰듯이 몰이해와 조롱의 대상이던 중용을 일련의 호교론적 시도를 통해 반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중용을 이해할 때에는 이러한 호교론의 역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용은 지금도 여전히 몰이해와 조롱 속에 있으며 진정한 덕의 구현을 위해 언제라도 위대한 정신에 의해 반전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15/01/09


* 이수태, <논어의 발견>에서 발췌, 수정,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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