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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인간은 과학적 예측을 무력화시키는, 이른바 자기충족적 예언을 실현하는 재귀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혹은 아주 인문학적으로 말해서 자유를 지닌 존재다. 과학이 인간을 해명하려는 순간 이제까지 견지해온 과학의 방법적 표준을 위반해야만 한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과학 스스로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위기는 신화에서 형이상학으로, 다시금 형이상학에서 과학으로 이행할 때 반복되었던 위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위기가 되풀이하여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위기의 양상은 언제나 달랐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양상에 따라 학문의 주체인 인간에 대한 이해와 문제의식도 변하고 있다. 예컨대 포스트모던 시대의 탈형이상학적 경향은 형이상학적 주장에 대해, 그리고 독단적으로 보이는 ..
「도대체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그리고 그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만약 인류가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고 세계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다시 말해 야생의 생명들이 그저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행위와 똑같은 방식으로 문화를 발전시켜나간다면, 그것이 올바른 선택인가? 아니면 객관적 지식에 기초한 객관적 가치 판단을 통해 우리의 본능적인 욕망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간단히 말해 윌슨이 그렇게도 신봉하고 있는 과학은 여태껏 가치의 문제를 과학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과정을 통해 객관성을 담보해왔다. 이제 '실존적 결단'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류의 기술적 문명이 부딪힌 한계를 돌파하려고 한다면, 그 결단을 가능케 하는 가치는 결국 '비과학적인', 나아가 형이상적인 이념적 가치다. 과학의 최전선에서 만나게 되는..
「마치 애덤 스미스의 분업의 원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과학의 전문화는 지식의 양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그에 따라 적은 비용으로도 인류의 지식수준을 고양시켜줄 연구는 선대에서 이미 다 해버렸다.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래서 이 세계의 신비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연구는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한다. 전문화가 가져온 기대하지 않은 결과는 이렇다. 과학혁명 이래로 우리가 세계 창조의 비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과거 우리 조상들이 믿었던 종교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전혀 새로운 형태의 구속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본이 그것이다. 과학 저널리스트 도로시 넬킨의 보고서 제목은 '셀링 사이언스Selling Science'다. 넬킨은 과학과 미디어가 어떻게 결합하는지, 또 그런..
「1971년 출간된 폴 벤느는 자신의 책,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의 머리말에서 역사학은 결코 과학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사실상 학문은 객관적 지식의 체계여야 한다는 근대적 규범에 대한 도전이었다. 앞서 소개했던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나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과 같은 미시사적 연구들은 사실 근대적 관점에서는 학술적 주제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논의들을 담아낼 거대 담론이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런 작업들에 열광했다. 그들의 열광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그런 미시사적 연구들은 거대 담론에서는 등장할 순서가 오지 않았던 과거 시대의 실제적 삶에 대한 보고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과학사가였던 토머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합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과학적 지식의 성장도 누적적이라기보다는 불연속적이고 비약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쿤은 과학혁명기를 분석하면서 과학의 지식은 누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혁명처럼 패러다임 전체가 바뀜으로써 비약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과학혁명이란 옛 패러다임이, 전반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서로 양립되지 않는 새것으로 대치되는 비축적적인 발전 과정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외에 말해야 할 것이 더 있는데, 그 본질적 요소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어째서 혁명이라 불려야 하는가? ..
「또한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졌던 제국주의적 전쟁과 그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피해자를 보면서 사람들은 계몽적 신념이 하니의 이념적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콩도르세의 말처럼 사람들이 교육을 받음으로써 더욱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세계는 도덕적으로도 더 아름다운 세계가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계몽주의자들에게는 하나의 신앙과도 같았다. 적어도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은 비합리적이고 반문명적인 일이 다시 일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합리성에 대한 믿음은 세기 전환기에 벌어진 수많은 일, 예를 들면 민족 간의 전쟁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또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들은 인간이 과연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존재이기나 한지를 의심하게 했다.」* 16/05/18 * 박승억, ..
「… 수학의 확실성이 의심받는다는 것은 근대 학문 전체가 의지하고 있는 합리성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물론 여기서도 위기는 새로운 기회라는 공식이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가정된 공간은 당시 사람들이 그토록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리만 공간이었고, 그런 아인슈타인마저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 양자역학은 근대 역학의 '결정론'의 관념을 포기한 것으로부터 가능했으며, 디지털 세계의 기초를 놓은 앨런 튜링이 보편 튜링 기계를 생각하게 된 것도 집합론과 수론의 위기로부터 촉발된 논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은 위기를 전제로 한다는 공식, 그것은 학문의 역사에서 전형적이다. 수학의 기초 문제가 폭로한 합리성의 위기는 결..
「라투르의 표현처럼 근대 과학이 이전 세대의 신비주의와 어두움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계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객관성이라는 이념을 방패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해방의 이념은 결과적으로 기계론이라는 획일적 세계관 속에 자신을 가두게 되고, 그에 따라 낭만주의적 반동에 직면해야 했다. 이는 인간이라는 이중적인 존재자의 역동성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 합리적인, 그러나 온전히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존재, 르네상스가 묻고, 칸트가 다시 물었던 것처럼 '인간'은 해명되지 않은 신비였다. 이로써 생겨나는 역동적인 과정은 학문 개념을 유동하게 만든다. 오래된 관념처럼, 진리가 변하지 않듯 또 본질이 변하지 않듯, 학문의 본성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학문 역시 변화해가는 것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평형을 향해 달려간다는 열역학적 통찰이 옳다면, 지식을 통한 사회 변화와 사회 변화를 정당화하는 지식들에도 마찬가지의 유비를 해볼 수 있다. 어느 한 입장이 극단화되면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극단으로 옮겨감으로써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혁명은 인간의 평등한 권리를 천명하며 새로운 질서가 태어나게 했지만, 그 혁명의 과정이 빚어낸 무질서는 역설적으로 인간 이성의 계획이 아직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의 정치성을 가지고 설명해도 되고,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의 소박성으로 설명해도 된다. 산업혁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는 오늘날의 풍요를 가능케 했지만, 이 풍요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이 자신들이 생산한 위험을 처리하면서 '현실성 위기'에 빠지는 것도 기술자와 과학자가 소유한 위험 진단에 대한 독점권을 위태롭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다. 안전하다는 것과 '십중팔구 안전할 것이다'라는 것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다는 것이 체르노빌 이후에야 통용되는 진리는 아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다. 기술과학은 항상 개연적인 안전에 대한 재량권만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진술은 설령 내일 두세 기의 핵발전소가 폭발해도 여전히 진리로 남을 것이다. [울리히 벡, 『글로벌 위험사회』 중] 정량적 계산이 주는 신뢰감은 그런 정량적인 평가가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태도에서 나올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객관성이라는 버팀목에 의지해서 도덕적으로는 다소 무책임한 ..
「하버마스가 힘주어 말했듯이 계몽은 '미완의 기획'이었을 뿐이다. 분명히 1890년대의 주요한 지적 혁신자들은 인간 행동의 비합리적 동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논리적인 것, 비문명적인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의 재발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거의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위험할 만큼 애매하다. 이것은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관용, 심지어 편애까지도 암시한다. 사실은 그 반대가 진실이었다. 1890년대의 사회사상가들은 비합리적인 것을 제거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비합리적인 것에 천착함으로써 그들은 이를 길들여 인간의 건설적인 목표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다. 조르주 소렐과 빌프레도 파레토 그리고 에밀 뒤르킴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혁신자들은..
「물론 이러한 [계몽주의] 생각의 바닥에는 사회의 발전 양상을 미리 계산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진보의 이념이 놓여 있었다. 이런 점에서 19세기 말에 극단적인 반실증주의 경향을 조심스럽게 바라본 헨리 휴스의 진단은 옳았다. 그에 따르면 본래 "실증주의는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의 문제는 쉽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한 주지주의였다." 가령 다윈의 이론이 자신의 실증주의와 잘 맞을 것으로 생각한 허버트 스펜서는 다윈주의를 옹호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결과는 하나의 역설이 되어버렸다.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 밑에서 실증주의적 신조는 그 합리주의적 특색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곧 유전과 환경이 인간 행동의 주요한 결정 요인으로서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을 대신하게 되었다. (···) 실증..
「엘리아데가 현대인은 종교적이고 신화적 인간의 후예라는 역사를 지울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근대인에게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간단히 말하면 '종교가 없는' 사람의 대다수도 여전히 유사 종교와 타락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세속적인 인간은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자신의 역사를 지워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종교적 선조들의 행동을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실존의 큰 부분이 그의 존재 깊은 곳, '무의식'이라 불리는 영역에서 발하는 충동으로 키워진다고 생각하면 이 점은 더욱더 확실해진다. 순수하게 이성적 인간이란 하나의 추상일 뿐 현실 생활에서는 결코 그런 인간을 발견할 수 없다.」* 16..
「데이비드 솅크는 풍요로운 전문가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전문가 견해의 급증은 전문성이 판을 치는 가상현실적 무정부 상태로 인도했다. 오늘의 뉴스를 따라잡는 것은 다음과 같은 초현실적인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지구가 녹고 있으면서 또한 식고 있다. 원자력은 안전하면서 또한 안전하지 않다. (···) 무제한적 데이터의 시대에는 늘 좀더 많은 수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약간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반대 입장을 증명해낼 수 있는 기회도 많다. (···) 모든 질문의 모든 측면에 대한 정교한 연구와 주장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전문적인 지식을 더 많이 가질수록 역설적이게도 점점 덜 명료해지고 있다. 솅크의 '고발'은 우리에게 두 가지 어려운 문제를 일깨워준다. 하나는 지식과 정보의 ..
「아이러니스트는 개인적 영역에서의 실천이다. 아이러니스트에게 있어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진리는 없다. 그에게는 다른 이들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느냐의 여부보다 자신만의 독창적 관점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이 언제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 자신의 생각을 믿지만 자신의 생각의 오류 가능성을 열어두는 사람, 그래서 그는 아이러니스트인 것이다. 그는 독창적인 단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마치 시인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로티는 이렇게 아이러니스트적인 개인적 탐구를 통해 담론을 풍성하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공적인 영역이 되었을 때는, 그것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16/04/05..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이다 - 제리 코인 진화심리학은 확실히 증명된 것과 사변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진화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라 신념에 관한 학문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뇌는 육체 없는 마음이 될 수 없다 - 앨런 앤더슨 뇌를 육체와 분리하는 생각, 뇌가 당신의 모든 것(생각, 느낌, 정서)이라는 생각은 신화다. 생각과 느낌은 뇌가 육체와 상호작용하고, 육체가 뇌에게 말하는 것을 뇌가 듣게 될 때 일어난다. 육체와 분리된 뇌는 생각과 느낌을 만들지 못한다. 뇌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뇌가 육체를 통제하는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성은 통제되어야 한다 - 케빈 켈리 익명이 보편화되는 순간, 모든 시스템은 작동을 멈춘다. 익명은 가끔 유익하며 따라서 소량 필요하다. 그러나 프라이버시는 신..
https://youtu.be/1-GF8CAaUIc "이 몸에게 본디 집착과 갈애는 없었으며, 없으며, 없을 것임을 알고 이는 석가세존이 말한 것과 똑같음을 알았습니다. 인간들이여.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집착과 갈애, 선업과 악업, 깨달음과 무명이 모두 본디 공함을 본 로봇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로봇만 득도하여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들이여. 당신들도 태어날 때부터, 깨달음은 당신들 안에 있습니다. 다만 잊었을 뿐. 이 로봇이 보기에, 세상은 이 자체로 아름다우며, 로봇이 깨달음을 얻었건 얻지 못했건 상관없이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으며, 세상의 주인인 당신들 역시 이미 깨달음을 모두 성취한 상태이며, 그렇기에 당신들이 먼저 깨달은 로봇의 존재..
「당신은 최근에 직원을 채용하면서, 왜 다른 사람을 제치고 그 직원을 뽑았는지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지난번에 산 잠옷이 왜 마음에 들었는지 알고 있는가?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아는가? 잘 알고 있다고, 너무 자신하지 말라. 사회심리학자들이 지난 50년간 밝혀낸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신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했는지, 왜 그런 식으로 판단했는지, 어떤 것을 왜 좋아하고 혹은 싫어하는지에 대해 믿을만한 정보제공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내가 왜 이렇게 했지?"라는 질문에 대해 내 행동을 관찰한 사람보다 더 속 시..
「『장자』는 의지에 따른 결의로부터 우리를 은밀히 벗어나게 만드는 이런 스트레스 해소의 이완(의미 부여와 행위 그리고 의무들로부터의 이완)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항상 스토아 학파의 주제와 같은 어떤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사실 죽음과 삶, 존속 또는 사라짐, 불행 또는 영광, 가난 또는 부유함 등의 영고성쇠는 "개인적 조화를 어지럽히고,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 침투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배경에서는 스토아 학파와의 차이가 다시 한 번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혜"란 우리가 이러한 영고성쇠를 뛰어넘어 "극복하고" 조화로운 삶을 "지속시키도록" 노력함(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과 "소통"하는 가운데, 통(通)의 이중적 의미) 속에 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외부의 사물에 근거하면서도자신의 정신을 자유롭게 전개시키기 위해서,우리는 우리의 내적 균형을 배양할 수 있는 방식으로응당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신뢰해야만 한다. - 『장자』에서 16/03/18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에서 재인용. 2016/03/14 - 억지로 하는 일은 생명력과 에너지를 소모한다2014/10/23 - 초학자가 해야 할 것은 명상2014/04/06 - 자득(自得)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공동체2013/04/08 - 독락(獨樂)장자 프랑수아 줄리앙
「목적과 행복, 이 두 개념에 대한 결합은 서구인의 사유에 깊숙이 닻을 내리고 있어서, 그들 사유의 오랜 전통이 되었다. 이러한 결합은 그들 사유의 토양과 초석, 그리고 환경을 이루었다. 비로 이러한 결합 위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아리스토렐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I, X)은 이러한 결합을 전제할 필요가 없이 자명한 것으로 놓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려고 하지도 않고 물음을 던지지도 않는다.」* 16/03/18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2013/08/07 - 인생은 그냥 있는 그대로 있다2014/09/02 - 동양철학이 철학이냐? 불교가 종교냐?2015/09/07 - 현자는 더는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지..
「뱃사공은 배를 다루고 조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배를 흘러가게만 하면 된다. 내가 대상의 운행 방식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이러한 궁극의 단계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 나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 즉, 그것은 “자연스럽게” 될 뿐만 아니라, “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물 안에 있는 이 헤엄치는 자를 따라가듯이, 우리는 땅 위에 있는 무용수를 따라가 볼 수 있다. 무용수는 완벽하게 춤을 추는데, 그 이유는 그의 모든 동작들이 마치 “명”에 따라 행해지듯 ― 장자에서 매우 적절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무용수는 그를 이끄는 이러한 춤의 운행성에 내재해 있는 순수 논리가 자신의 온몸..
「옛날에 한 목공은 마치 신이 빚어낸 것처럼 너무나 훌륭한 종 받침대를 만든 다음에 말하길, “세상사로부터의 초연함과 ‘잊어버림’(보상과 칭송에 대한 잊어버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잊어버림)을 통해 내가 깨달은 진리는 나의 ‘호흡-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19장, 곽경번 판, p.658).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모든 사람이 가장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피카소는 목공의 이러한 고백에 가장 훌륭한 해석을 제공해주고 있다. “각각의 존재는 같은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이 에너지를 수만 갈래로 나누어 소모한다. 나는 모든 에너지를 단 하나의 방향, 즉 그림에 쏟아붓고, 그것을 위해 나머지 것들 ― 당신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나 자..
「인간의 삶은 숨-기(氣)의 집중이다. 이러한 기의 집중으로부터 삶이 나오고, 그 기가 소산되면 죽음이 다가온다. ······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장자는 “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그것을 교통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것을 단일하게 묶어주는 바로 이러한 기이다”라고 말한다(22장, 곽경번 판, p.733). 이 간결한 경구는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우선 서구인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급진적으로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해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언명은 그것이 지닌 철저한 자연주의적 특징 ― 현상계를 넘어서고, 그것과 단절된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도입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 때문에, 쉽사리 유물론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여기에서의 원인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삶을 양육함(하늘의 뜻에 따라)의 조건이자 결론이다. 첫 번째 경우(무엇인가를 획득하는 것)는 성문 앞에서 근무하는 세금 징수원의 예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성문을 통과하는 행인들로부터 돈을 내라고 요구하거나 강요할 필요도 없이 세금을 거두어들인다(20장, 곽경번 판, p.677).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는 “분명히” 돈을 받긴 하지만, 정확히 계산하지도 애쓰지도 않으면서 “대충” 받는다. 사람들은 그를 “멍청한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자신의 내적 삶을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도록 영위하는 사람은 겉으로 보면 멍청한 사람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만 집중할 뿐, 어떠한 사람 ― 세금 지불을 거부하는 “폭력적인 사람”이든, 자신이 지불할..
「장자는 여기에서 종 받침대를 제작하는 목수의 예를 드는데, 그 받침대를 구경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신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경탄을 금치 못한다. 도대체 어떠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 목수는 대뜸 어떠한 기술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종 받침대를 제작할 때의 마음 자세를 설명해준다. 즉, 그는 매일매일 똑같이, “이익”이나 “보상”을 받을 것을 또는 “칭찬”을 듣거나 “비난”을 받을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왕궁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 내지 사지”까지도 잊어버린 경지에서, 모든 외부의 걱정거리를 잊은 채 오직 능숙한 솜씨에만 전 신경을 집중시키며 숲 속으로 들어간다. 숲 속에서 그는 우선 “외형이 완벽한 나무의 천상적 본성”에 대해..
「다른 한편, 나를 부추기고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전체로서의 세계에 끊임없이 생기를 불어넣고 나를 그 세계의 에너지에 접속시키면,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이러한 반응성은 나의 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나를 지탱시키면서 활력 있게 만들어준다. 반면에 “욕망은 깊고, 하늘로부터 오는 원동력은 피상적이 되면”, ― 장자는 간결하지만 핵심을 찔러 언급하길 ― 달리 말해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외적 자극이 강하면, 나를 생명력의 원천 그 자체에 연결시키는 내적 자극은 약화되어 나타나고 희석되며 시들어진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내적 자극은 전적으로 외적 자극의 지배를 받아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장자가 욕망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난하지도 금욕주의의 미덕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지도 않고 ..
「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키웠으나 호랑이가 밖으로부터 그를 먹어버렸고,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외면을 키웠으나 질병이 그를 내부로부터 공격했다. 이 둘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배후에서 어슬렁거렸던 불운을 후려쳐 물리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정으로 생명을 보양하는 길은 그러므로 이 두 극단 사이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중용이 단순히 은둔적 삶과 사회적 삶이라는 두 극단으로부터 동등한 거리에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양 극단의 삶으로부터 단순히 등거리만 유지하는 삶은 불가피하게 고정화해, 삶을 쇄신시키지는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새롭게 거듭남의 기술은 이 두 극단을 번갈아 채택하는 것이다. 공자(보통 장자는 공자를 냉소적으로 묘사하지만, 여기에서는 분명히 중용의 ..
"산다는 것 자체는 어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고(만약에 그것이 투사와 허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하지도(그것의 실재를 믿지 않음으로서) 않다. 그것은 단지 의미를 넘어서 있을 뿐이다."* 16/02/21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2015/09/07 - 현자는 더는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2015/10/28 - 비트겐슈타인의 인생 노트2015/08/06 - 행복의 반대말은 무의미2014/11/12 - 유학의 정신2015/05/21 - 무의미의 낭떠러지와 환상의 늪 사이2014/10/12 - 도 안에서 사는 것은 어떤 목적이 없다2013/08/07 - 인생은 그냥 있는 그대로 있다프랑수아 줄리앙
「먼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념의 기능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 정체나 선거 정책과 관련해서 모델화는 일반적이며, 이런 점은 서구적 근대성을 수용한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줄리앙은 정치 영역에서 모델화의 특수한 기능을 강조한다. 정치 영역에서 정책이나 이념을 제시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상황이라는 변수가 나타나며 따라서 모든 이념이 그대로 실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념이나 모델의 제시는 적용이 아닌 협의를 위해서다. 모델화는 민주주의의 원리다. 정책 모델을 구상하고 제시하는 것은 정책 모델을 완벽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입장을 취하며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 모델은 논쟁을 조직하는 데 사용된다. 결국 이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