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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과 활동, 어느 한 쪽만 취하지 마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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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과 활동, 어느 한 쪽만 취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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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키웠으나 호랑이가 밖으로부터 그를 먹어버렸고,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외면을 키웠으나 질병이 그를 내부로부터 공격했다. 이 둘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배후에서 어슬렁거렸던 불운을 후려쳐 물리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정으로 생명을 보양하는 길은 그러므로 이 두 극단 사이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중용이 단순히 은둔적 삶과 사회적 삶이라는 두 극단으로부터 동등한 거리에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양 극단의 삶으로부터 단순히 등거리만 유지하는 삶은 불가피하게 고정화해, 삶을 쇄신시키지는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새롭게 거듭남의 기술은 이 두 극단을 번갈아 채택하는 것이다. 공자(보통 장자는 공자를 냉소적으로 묘사하지만, 여기에서는 분명히 중용의 대가로서 인정하고 있다)는 중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잘못은 내면의 세계로 은둔하는 것도 아니고, 외부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숨어 지낼 정도로" 내면의 세계로 은둔해 다른 사람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는 것(외부로부터 위험이 닥쳤을 때도 홀로 있고, 무방비 상태에 처할 정도로)은 잘못이다. 또한 휴식을 전혀 취하지 않고 자기가 전념하고 있는 일에 치어, 압박감과 음모 등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정도까지 외부 활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잘못은 은둔적 삶 또는 사회적 삶 중에서 어느 하나의 입장을 취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입장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단 하나의 입장에만 매달려 그 속에 매몰되어버림 속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잘못은 반대되는 입장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킴을 통해 특정 입장 속에서 고립되고 따라서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라(계속해서 전진하기 위해)는 부름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데 있다. 다른 가능성을 배제해버리는 그러한 삶은 더 이상 "양생될" 수 없어지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삶이야말로 잠재력을 잃고, 정체되고 폐쇄적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도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행동을 할 때는 명성을 얻을 정도까지 계속하지 말고, 나쁜 행동을 할 때도 벌을 받게 될 정도까지 계속하지 말지어다."(장자, 3장, 곽경번 판, p. 115)

 

어떤 행동도 궁극적으로는 "선"이든 "악"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입장에 의해 꼼짝 못하게 될 정도로 그 입장에 집착하지 않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의 입장에만 집착하는 것은 덫에 갇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거나, 우리가 항상 선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의 노예가 되는 경우에, 선은 생명력을 옥죄는 덫이 될 수 있다.」


16/02/22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에서 발췌,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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