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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입장을 선택하고 일상의 요구를 완수해야 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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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입장을 선택하고 일상의 요구를 완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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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화와 주지주의화를, 특히 세계의 탈주술화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시대에서는 바로 가장 숭고하고 궁극적인 가치들이야말로 공공의 장에서 물러나서 신비주의적 삶의 은둔의 세계로 퇴장했거나, 아니면 개인들 상호간의 직접적 형제애 관계 속으로 퇴장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운명입니다. 우리 시대의 최고예술은 은밀한 예술이지 결코 웅대한 예술이 아니라는 점은 우연이 아닙니다. 또한 전에는 예언적 성령의 형태로 대규모 신도공동체들에 매우 열정적으로 전파되면서 그들을 결속시켰던 힘이 오늘날에는 아주 작은 공동체 내부에서만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매우 약하게 고동치고 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만일 웅대한 예술에 대한 지향을 억지로 창출하고 <발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난 20년 동안의 많은 기념비 건축 사례에서 보았던 것처럼 매우 한심한 기형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예언 없이 새로운 종교적 혁신들을 고안하려고 한다면, 내적 의미에서는 위에서 지적한 예술의 경우와 비슷한 어떤 것이 발생할 것인데, 그 꼴은 틀림없이 더 볼썽 사나울 것입니다. 그리고 강단예언은 결국 광신적 종파들만을 만들어낼 뿐 결코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시대의 이러한 운명을 당당하게 견디어 낼 수 없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즉 그는 흔히 그러하듯이 전향자임을 공공연하게 떠들지 말고, 차라리 소박하고 조용하게, 옛 교회의 넓고 자비로운 품안으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교회 또한 그의 이러한 전향을 위해 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그는 이 경우 어떻든 지성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불가피합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이 희생 때문에 나무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종교적 헌신을 위한 그러한 지성의 희생은 소박한 지적 성실성 의무를 회피하는 것과는 도덕적으로 여하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회피는 자신의 궁극적 입장에 대해 명료해질 용기를 지니지 못하고, 이 지적 성실성의 의무를 나약한 상대화를 통해 벗어버리려고 할 때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로서는 상기한 종교적 헌신이 강단예언과 비교해서도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강단예언자들은 강의실 안에서는 소박한 지적 성실성 이외에는 그 어떠한 덕도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적 성실성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새로운 예언자와 구세주를 고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황이 바로 이사야서에 서술된 망명시대의 저 아름다운 에돔의 <파수꾼의 노래>가 들려주는 상황과 똑같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에돔의 세일 산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파수꾼아, 밤이 아직도 얼마나 남았느냐? 파수꾼이 말하기를, 아침은 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밤이니라. 묻고 싶거든, 다른 때 다시 오너라.> 이 말을 들은 [유대] 민족은 이천 년이 훨씬 넘도록 묻고 고대해왔는데, 우리는 이 민족의 충격적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운명에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즉 갈망하고 고대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그것과는 다른 길을 택해야만 한다는 교훈, 우리의 일에 착수하여 '일상의 요구'를 ― 인간적으로나 직업상으로나 ― 완수해야 한다는 교훈 말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삶을 조종하는 데몬(Dämon)을 찾아서 그에게 복종한다면, 일상의 요구란 소박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15/09/01


* 막스 베버. (2006). 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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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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