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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들의 투쟁에서 무엇이 승리할지는 아무도 모르며 어떤 학문도 그 투쟁을 지배할 수 없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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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들의 투쟁에서 무엇이 승리할지는 아무도 모르며 어떤 학문도 그 투쟁을 지배할 수 없다

모험러

「지금까지 나는 교수가 강의실에서 자기 개인의 가치관적 입장의 강요를 피해야 할 실제적 이유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확고하게 주어진 것으로 전제된 목적에 대한 수단을 논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천적 입장을 <학문적으로> 옹호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훨씬 더 깊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세계의 다양한 가치질서들이 서로 해소될 수 없는 투쟁 속에 있기 때문에 실천적 입장의 학문적 옹호는 원칙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바로 그 더 깊은 이유입니다.


제임스 밀이 언젠가, "만일 우리가 순수한 경험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다신교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그의 철학을 다른 점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이 점에서는 그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 명제는 피상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얻게 된 통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어떤 것은 그것이 아름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그것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한에서, 신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한 증거를 이사야서 제 53장과 시편 제 22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그것이 선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이 선한 것이 아닌 바로 그 부분에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니체 이래로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니체 이전에는 보들레르가 『악의 꽃』이라고 이름 붙인 그의 시집 속에 그러한 생각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것은 아름답지도 않고 신성하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음에도, 또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이라는 의미에서 참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개별적 질서 및 가치의 신들 간에 벌어지는 투쟁의 가장 근본적 차원일 뿐입니다.


이보다는 더 구체적 차원의 예를 하나 들자면, 가령 어떻게 프랑스문화의 가치를 독일문화의 가치와 비교해서 <학문적으로> 그 우열을 결정할 수 있을지 나는 모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서로 다른 신들이 싸우고 있으며, 그리고 이 싸움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이 상황은, 신들과 데몬의 주술로부터 깨어나지 못했던 옛 세계의 상황과 같습니다. 다만 이제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물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프로디테에게, 다음에는 아폴로에게 그리고 각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도시 신에게 제물을 바친 것처럼 오늘날에도 외적 사정은 같습니다. 다만, 오늘날은 이 신들이 탈주술화되었고 또 여러 신을 섬기는 상기한 고대인들의 태도의 신비적인, 그러나 내적으로 진실된 생생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신들과 이들의 투쟁을 지배하는 것은 운명이지 결코 그 어떤 <학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개개 학문은 무엇을 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지, 그리고 개개 질서에서는 각각 무엇이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시키는 것으로 이 문제에 대해 교수가 강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완전히 끝이 납니다. 물론 그것으로 이 문제에 담겨 있는 중대한 삶의 문제 그 자체가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삶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제 대학의 강단 이외의 힘들이 발언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주제넘게 산상수훈의 윤리를, 가령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계명이나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돌려 대라는 비유를 <학문적으로 반증>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설교되고 있는 것이 자긍심 포기의 윤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윤리가 제공하는 종교적 존엄성과 이와는 전혀 다른 태도, 즉 <악에 저항하라 ― 그렇지 않으면 너도 그 악의 폭정에 함께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요구하는 당당한 자긍심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각자에게는 그가 가진 궁극적 입장에 따라서 위의 두 가지 대안 중에 하나는 악마가 되고 다는 하나는 신이 됩니다. 또 각자는 자기에게 있어서는 무엇이 신이고 무엇이 악마인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모든 질서들에 걸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신교적 상황은 고대에 이미 존재했습니다만] 예언종교에서 발전해 나온 윤리적-체계적 생활 영위가 가진 그 위대한 합리주의가 이 다신교를 <필요한 단 하나의 것>[즉 유일신]을 위해서 퇴위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 합리주의는 외적이고 내적 삶의 현실에 직면하면서 우리 모두가 기독교의 역사에서 알고 있는 저 타협과 상대화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과 상대화는 오늘날에는 종교적 <일상>입니다. 옛날의 많은 신들은, 이제 그 주술적 힘은 잃어버리고 그래서 비인격적 힘의 모습으로, 그들의 무덤에서 기어나와 우리 삶을 지배하고자 하며 또다시 서로간의 영원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현대인에게 매우 힘든 것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가장 힘든 것은 그러한 일상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체험>에 대한 모든 추구는 이러한 나약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대의 운명을 진지하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면 그것은 나약함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천 년 동안 우리는 기독교 윤리의 숭고한 열정에 배타적으로 ― 아무튼 배타적이었다고 주장되거나 상정됩니다만 ― 지향함으로써 가치갈등 또는 신들의 전쟁과 같은 상황을 볼 수 있는 눈이 멀어 버렸지만, 이제 다시 이러한 가치갈등이라는 상황을 더욱더 명료히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것은 우리 서구 근대 문명의 피치 못할 운명입니다.」*


15/08/31


* 막스 베버. (2006). 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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