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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지상주의자들

모험러

「이 새로운 신들은 개개인의 사적 가치관일 수도 있고, 사회적 이념(민족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신들의 거처는 베버가 이른바 '가치영역'이라고 부르는 것들, 즉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실천적 활동영역들이다. 이것들은 크게 볼 때 '인지적-기술적'[眞], '도덕적-실천적'[善] 그리고 '심미적-표현적'[美] 가치영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 영역들은 종교적-주술적 세계상 하에서는 단 하나의 절대권위와 절대논리, 즉 신성의 논리에 예속되고 함몰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계상의 탈주술화와 함께 이 가치영역들은 신성의 절대논리에서 해방되고 분화되어 나와 이제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논리와 '주권'을 선포한다. 이와 함께 이 가치영역들은 다른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관할 영토'를 규정하고 주권 행사에 나선다: 인지영역은 '진리'의 영토(과학), 도덕적-실천적 영역은 '정의'의 영토(법과 윤리) 그리고 심미적-표현적 영역은 '미와 취향'의 영토(예술). 근대와 함께 이 영역들은 자신만의 합리성을 개발하고 이 합리성의 극대화에 매진하게 된다. 즉, 근대 이전까지 '신성'이라는 독재적 단일개념에 묶여 있던 인간의 잠재력은 이제 여러 개의 '합리성들'로 분해되어 가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제 인간정신은 되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시대'로 들어선다. 이제 가능한 것은 '부분-합리성들'일 뿐, 이 부분합리성들을 아우를 수 있는 총체적 합리성이란 더 이상 상정될 수 없게 된 것이다. 판단의 상위 심급 내지 상급 재판소의 부재로 인해 이제 개별행위, 제도, 그리고 상기한 가치영역들 등 모든 것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떠한 외부자원도 동원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이 이 정당성을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예컨대 상기한 '진', '선', '미'라는 가치영역들의 주권은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강탈당할 수도 일고(가령 전체주의 국가에서 학문과 예술의 제약), 또는 개개 가치영역은 설득과 합의를 통해 스스로 주권행사를 유보할 수도 있다(가령 생명공학의 제 윤리적 문제들: 여기서는 과학의 주권이 윤리적 주권에 의해 유보된다). 그러나 이 모든 협상과 타협은, 그리고 심지어 강탈까지도, 바로 각각의 가치영역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실적' 화해가능성을 떠나 원칙의 차원에서 보면 이 가치들간에는 어떠한 타협도 불가능하며 단지 "화해될 수 없는 사활을 건 투쟁, 마치 '신'과 '악마' 간의 투쟁"(베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투쟁은 비단 각 가치영역의 '주권수호'(예컨대 과학적 연구의 자유수호)라는 소극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소태양들'(小神들)은 곧잘 이제 자신이야말로 모든 소태양들의 상위에 있는 '대태양'(유일신)임을 주장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이것이 근대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수많은 이른바 '지상주의'들의 정체이다: 과학지상주의, 도덕지상주의, 예술지상주의, 또는 민족지상주의, 자유지상주의, 평등지상주의, 개인지상주의, 공동체지상주의, 합리성지상주의 등. 지상주의자들은 모두 다시 '유일신교'로 돌아가기를 희구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자신들의 '신성'(神性)으로 인간을 재주술화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15/09/01


* 막스 베버. (2006). 직업으로서의 학문. (전성우, Trans.). 나남출판. 옮긴이 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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