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사회적 질병과 육체적 질병은 무엇이 다르고, 사회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본문

명문장, 명구절

사회적 질병과 육체적 질병은 무엇이 다르고, 사회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모험러

「피에르 부르디외가 『세계의 비참(La Misère du monde)』의 독자들에게 일깨우는 바, 아주 먼 옛날의 것이긴 하지만 지금도 유효한 히포크라테스 전통에 따르면 진정 효염 있는 치료약은 보이지 않는 질병 ― "환자들이 이에 대해 말하지 않거나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 사실들" ― 을 간파할 때 시작된다. 사회학의 경우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외견상의 징후를 보고 이를 논의하여 결국 그 구조적 원인들을 왜곡하여 드러내는 경우를 밝혀내는 것이다." 우리는 "의심할 바 없이 이 크나큰 불행을(종종 격퇴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그 정도로 기여는 못했던) 격퇴시켰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온갖 소소하고 잡다한 불행들이 전례 없이 급증할 조건들을 부여하는 사회적 공간들을 엄청나게 양산한 이 사회 질서에 특징적인 고통들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어떤 질병을 진단하는 것과 이를 치료하는 것은 다르다. 이 일반론은 의학적 판단에서 그러한 만큼 사회학적 진단에서도 적용된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한 관점에서 사회적 질병이 육체적 질병과는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질환을 앓고 있는 사회 질서의 경우, 적절한 진단이 없다는 것은(울리히 벡이 탐지했듯이, 위험을 '해석하여 제거하는' 경향으로 말미암아 밀려나거나 침묵당하면), 그 자체가 질환의 핵심적이고도 결정적인 양상이다. 카스토리아디스의 유명한 언급처럼, 만일 사회가 그 사회에 대한 질문을 멈춘다면 사회는 아픈 것이다. 이는 또한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볼 때 피할 수 없는 결론이기도 하다. 즉, 사회란 ― 그 사회가 의식하든 안하든 ― 자율적이라는 것(그 제도들이 단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고 따라서 인간이 없앨 수도 있으므로), 그런데 자기에 대한 질문을 유보함으로써 자기가 자율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되는 한편, 그 사회가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한다는 환상을 유포하여 결국 그로 말미암은 운명론적 결과들을 불러온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질문을 새로이 던진다는 것, 이는 장기적으로 치료로 한걸음 다가감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 조건의 역사에서 발견이 창조와 동등한 것이라면, 인간 조건에 대한 사유에서 설명과 이해가 같은 것이라면, 인간 조건을 개선시키려는 노력들 속에서 진단과 치료 역시 그렇게 서로 합치될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세계의 비참』의 결론을 내리며 이를 완벽하게 표현하였다. "삶을 고통스럽게, 도저히 살아갈 수 없게까지 만드는 작동 원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이 원리를 무력화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제반 모순을 밝히는 것은 이 모순들을 해결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사회학적 내용이 얼마나 사회학적 효과를 거둘 것인지 회의를 품는다 해도, 사회학이 고통 받는 자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사회적 원인과 결부시킬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효과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불행의 사회적 기원이 "그들의 가장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것들까지도 포함하여 그 모든 사회 형식들 속에" 있음을 깨닫는 효과 또한 사소하게 치부되기 어렵다.


부르디외가 우리에게 일깨우듯이 자유방임처럼 죄 많은 것도 없다. 인간의 불행을 평상심으로 지켜보면서 TINA(더 이상 대안이 없다는 뜻의 'There is no alternative'의 약자)라는 주문을 외우며 양심의 가책을 달래는 것은 그 불행에 공범이라는 뜻이다. 자발적으로 혹은 태만으로 인해 인간이 이루어온,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우발적이고도 변경 가능한 사회 질서, 특히 불행에 책임이 있는 그런 종류의 질서의 속성을 은닉하거나 더 나쁘게는 부정하는 데 참여하는 사람은 위험에 처한 한 인간을 돕기를 거절했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유죄이다.


사회학을 하고 사회학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되, 덜 불행하게 혹은 전혀 불행하지 않게 살 가능성, 나날이 억제되고 간과되고 믿지 않게 된 이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가능성을 보지 않고, 찾지 않고 그리하여 억누르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적 불행이고 그 불행을 영속화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그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만으로 그것이 유용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알아내었다해도 이 가능성들을 실행에 옮길 만큼 신뢰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발견은 시작일 뿐, 인간적 불행과의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에서 그 척도를 밝히고 인식함으로써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불행을 포함한 모든 불행의 사회적 원천과 투쟁하는 데 그 자유를 온전히 사용하도록 힘쓰지 않는 한, 그러한 전쟁은 부분적 성공도 거두지 못할뿐더러 진지하게 수행되기도 어렵다.


사회학을 하는 길에서 '참여'와 '중립'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참여하지 않는 사회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대놓고 밝히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부터 철두철미한 공동체주의적 입장까지 오늘날 통용되는 수많은 사회학 상표들 한가운데서 도덕적 중립 입장을 취하려 한다면 이는 헛된 노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글이 지닌 '세계관'의 효과나, 인간의 개별적 혹은 연대의 행동에 그 세계관이 미치는 여파를 부정하거나 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다른 인간들이 나날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의 책임을 저버리는 대가를 처러야만 한다. 사회학이 하는 일은 그러한 선택들이 진정 자유로운지, 인류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유가 유지되는지, 더욱더 자유로워지는지 잘 살펴보는 일이다.」*


15/08/29


*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근대. (이일수, Trans.). 도서출판 강.


모험러의 책방

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