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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사회학자 본문
「그런데 이러한 시인의 소명이 사회학자의 소명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학자들은 시를 거의 쓰지 않는다(우리 중에는 직업상의 일들로부터 안식년을 내어 글을 쓸 시간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가짜 시인'처럼 되는 것이 싫거나 '가짜 사회학자'가 되는 게 화가 난다면, 우리 역시 숨어 있는 인간의 가능성들을 발굴하는 진짜 시인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명백하고 자명한 진실들의 벽, 오늘날 지배적인 어떤 이데올로기가 그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지배의 합당함을 입증 받는다면,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벽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한 벽들을 허무는 것은 시인의 소명일 뿐 아니라 사회학자의 소명이기도 하다. 가능성들 앞에 벽을 쌓아올리는 것은 그 허세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가로막으면서 인간의 잠재력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이 찾고 있는 시구는 '항상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가 발견해낸 인간의 잠재력이 도무지 무엇인지 잘 모를 수도 있다. 인간 ― 창조자이면서 피조물, 역사의 영웅이면서 희생자 ― 은 정녕 언젠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동일한 가능성의 크기를 영원히 보유하고 있는가? 그게 아니면, 오히려 인간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발견과 창조를 대조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공허하고 말이 안 되는 것일까? 역사란 끝없는 인간 창조의 과정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바로 그 증거로 말미암아) 끝없는 인간의 자기발견의 역사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항상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창조하고, 이미 발견되어 실제가 된 가능성의 목록을 더욱 확장하려는 그 성향이야말로, 이제껏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한 '항상 거기 있는' 유일한 인간 잠재력이 아닐까? 역사가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역사가 이를 발견한 것인가, 라는 문제는 수많은 지성들이 기꺼이 매달릴 만한 달가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역사 자신의 입장에서는 어떤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지도 않거니와 그러한 대답이 굳이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15/08/29
*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근대. (이일수, Trans.). 도서출판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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