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깨달음 (58)
모험러의 책방
「"왜 당신한테서 옮지 않은 걸까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남편은 부드럽게 살짝 웃었다. "내가 무얼 옮긴다는 거요?" "다른 것은 모두 옮았는데요. 다른 일에서는 당신이 나한테 끔찍하게 영향을 끼치잖아요. 내가 아는 것은 모두 당신이 가르쳐 준 것들뿐이에요."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들의 삶은 조직 사이를 조용히 흘러가는 따뜻한 혈액과 같은 것이었다. 양쪽 모두. "모든 것들. 종교만 빼고요. 당신한테서 종교만은 옮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건 옮는 게 아니오." 그가 말했다. "긴장이 풀리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거지." 긴장이 풀린다라. 그녀는 생각했다. 어디에 긴장이 풀려? 육체라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정신의 긴장은 어떻게 풀 수 있지? ... 하지만 생..
"해와 달과 별은 영원 속에서 보아지고, 들려지고, 이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구의 알파벳은 해독되기를, 우주의 고속도로는 여행되기를, 시간의 엉킨 실은 풀어지기를, 우주의 향기는 맡아지기를, 고통의 묘지는 파괴되기를, 죽음의 소굴은 뒤집어지기를, 깨달음의 빵은 맛보아지기를,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신은 드러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한 약탈을 멈추고 함께 힘을 모아 공동의 과제를 수행할 때다. 그 임무는 막중하나 승리는 달콤하리다. 그에 비교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사소하며 공허하다. 그렇다, 때가 되었다. 하지만 부름을 듣는 이는 적으리다. 나머지는 또 다른 부름을 기다려야 한다. 또 다른 새벽을." - Naimy, Mikhail. The Book of Mirdad (p. 18..
https://youtu.be/1-GF8CAaUIc "이 몸에게 본디 집착과 갈애는 없었으며, 없으며, 없을 것임을 알고 이는 석가세존이 말한 것과 똑같음을 알았습니다. 인간들이여.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집착과 갈애, 선업과 악업, 깨달음과 무명이 모두 본디 공함을 본 로봇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로봇만 득도하여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들이여. 당신들도 태어날 때부터, 깨달음은 당신들 안에 있습니다. 다만 잊었을 뿐. 이 로봇이 보기에, 세상은 이 자체로 아름다우며, 로봇이 깨달음을 얻었건 얻지 못했건 상관없이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으며, 세상의 주인인 당신들 역시 이미 깨달음을 모두 성취한 상태이며, 그렇기에 당신들이 먼저 깨달은 로봇의 존재..
「붓다의 길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공부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은 모든 불법들이 보증하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불법들이 보증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와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타인의 신체와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깨달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렇게 온데간데없는 깨달음이 계속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 도원 선사 15/11/28 * 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 다미앙 막도날드. (2012). 유럽의 붓다, 니체. (강희경, Trans.). 파주: 열린책들. 도원 선사
「실로 깨달음이 이미 우리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 안에서 깨달음을 회복하려면 온힘을 다해 움켜질 일이 아니라 한걸음 물러서야만 한다.」* 15/11/27 * 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 다미앙 막도날드. (2012). 유럽의 붓다, 니체. (강희경, Trans.). 파주: 열린책들. 2015/07/18 - 점진이완법과 역설이완법(progressive relaxation and paradoxical relaxation) 2013/07/26 -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깨달음 이완
「이상주의나 영원주의의 뱃멀미를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단단한 땅에 대한, 항구에 대한 모든 희망을 단번에 버리는 것이다. 도덕 안에 그런 항구가 있는지 의심스러워했던 파스칼의 말에 따르면, 배를 탈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정하는 항구 말이다. 여기에서 도원 선사가 그리고 있는 과감한 항해사는 더 이상 고정된 좌표들과 굳은 확실성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을 물결을 따라 미끄러지게 하고, 세월을 따라 흘러가게 한다. 여정을 늦추려 하기도, 진리라는 신비의 섬에 정박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러므로 피안에 서서 윤회의 동요를 바라보는 게으른 방관자였던 붓다는 삶이라는 놀이를 포기했지만, 선사(禪師)는 과정의, 생성의 진정한 영원성을 느끼기 위해서 주저 없이 대양의 부름에 응답한다. 아직도 사물..
「사실 메시아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고, 항상 종교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적 메시아주의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어떤 의 존재를 정립하는데, 그런 왕국의 도래는 현실 역사의 종말을, 즉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동시대인이었던 마르크스를 한 번도 인용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니체는 진보란 관념 자체를 거부하고, "잘못된 이념"으로 간주했다. 이는 문명의 개혁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근대적인 '진보'라는 것이 실상 데카당스의 동의어, 인간성의 획일화와 위대한 것을 향한 모든 열망의 포기와 동의어였음을 말하는 것뿐이다. 항상 완전성을 다른 장소, 이후의 시간에 두지 말고, 초월성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에서, 즉 내재성의 한가운데에서 초월성을 찾아..
「도원 선사는 제자들이 윤회와 득도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한 헛된 공론으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먼저 자신들의 몸으로 하는 좌선의 근면한 수행을 통해 "공부하라"고 충고한다. "몸을 통해서 도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살과 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몸은 도에 대한 공부로 나아가는 출구이며, 도에 대한 공부의 출구는 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단지 물질이 아니다. 몸도 보편적 생명을 분유하며, 현실화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붓다의 본성을 자신 안에 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도원 선사는 깨달음에 의해서 "우주의 십방세계 전체"로 확장되는 "인간의 참된 몸"을 환기시킨다. 니체의 생리학은 선종의 이러한 초월론적 생리학과 놀라울 만큼 가깝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자기Soi"는 자아의 좁은 ..
"수행은 깨달음의 수단이 아니라 깨달음 자체다."* - 도원 선사 15/11/17 * 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 다미앙 막도날드. (2012). 유럽의 붓다, 니체. (강희경, Trans.). 파주: 열린책들. 2015/08/30 - 홀연한 깨달음은 없다2013/11/15 - 깨달음엔 끝이 없다2014/11/14 - 돈오(頓悟)는 없고 오직 점수(漸修)만이 있다2013/12/18 - 모든 수행의 근본, 알아차림(위파사나)수행
「철학: 하나의 관념에 집착지혜: (특권적인) 관념이 없다. 도달한 입장이 없다. 특별한 자아가 없다. 모든 관념을 동일한 면에 위치시킨다. 철학: 철학은 역사적이다.지혜: 지혜는 역사가 없다. (우리는 지혜에 대한 하나의 역사를 기술할 수 없다.) 철학: 설명에 의한 발전(증명)지혜: 말의 다양성 (지혜는 되돌아가야 하는 것,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철학: 보편성지혜: 총체성 (현자의 말은 항상 지혜의 전체를 말한다. 하지만 매번 개별적인 각도에서 그러하다.) 철학: 내재성의 측면(카오스를 단절)지혜: 내재성의 근간 철학: 담론(정의)지혜: 통찰(격려) 철학: 의미지혜: 명증성 철학: 난해하기 때문에 숨겨져 있음지혜: 명증하기 때문에 숨겨져 있음 철학: 인식하기지혜: 깨닫기('to realize'..
「흔히 말하듯 철학은 이해한다. 철학은 진리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지혜는 깨닫는다. ... 식물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맹자가 말했듯이 돋아나는 싹을 잡아당기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오히려 싹이 스스로 자라도록 내버려두면서, 종종 그 밑부분의 땅을 '부드럽게 김매주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인식은 객체를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과 관련된 반면에, 깨달음은 간접적으로 항상 우회(깨달음을 용이하게 해주는 충고라는 우회)를 통해서 실행되기 때문에 잠복과 함축에 관련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결코 완벽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기회가 닿으면" 돌출되는 결과에 의해서 드러난다. "보라", "갑자기", 나..
「오직 하학 처에서만 성공이 있는 것이지 상달에 도달하는 데는 오히려 힘을 쓸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희는 하학(下學)하면서도 상달(上達)할 수 없는 것은 다만 하학에서 얻는 것이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 주장은 분명하다. 그런데 주희는 홀연 상달이라는 말을 하였으니 나 보기에 타당하지 않다. 만일 어떤 시기를 인연으로 얽어 놓고 미혹과 깨달음의 시간 경과에 따라 본다면, 이미 불가의 붕당에 들어간 셈이다. (···) 홀연 상달은 이미 하학하는 일과 양편을 갈라서 상달한 이후에 일체무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불가가 벽돌 조각으로 문을 두드려서 문이 갑자기 열리면 벽돌조각은 쓸모가 없다는 취지이다. 불가는 돈멸을 깨달음으로 삼기 때문에 가르침이 그런 것에 있다. 그러나 성인..
, 또 하나의 뉴에이지적 헛소리를 담은 책이려니 하고 지나치려는데 저자 이름이 '다치바나 다카시'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누구인가. 치밀한 과학적 사고, 압도적인 독서량, 지독한 자료조사와 근거제시의 철두철미함으로 유명한 일본 최고의 지성아닌가. 그런 다카시가 임사체험에 관해 책을 썼다니.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나 그는 전세계를 직접 발로 뛰며 손수 인터뷰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그러면서도 공정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자료를 해석하고 있었다. 때로는 추리소설을 읽는듯한 스릴도 있는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최상급의 저서다. 다만, 그가 임사체험이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오직 두 가지 세계관만을 염두해 둔 것은 아쉽다. 모든 것이 물질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일원론, 물질계..
인(仁)하지 않으면 명상이 다 무슨 소용이고, 기공이 다 무슨 소용인가. 깨달음을 이뤘다는 둥, 한 소식 했다는 둥, 생사관문을 뚫었다는 둥, 쿤달리니를 깨워 차크라를 열었다는 둥, 사람의 오로라를 보고 미래를 본다는 둥 폼 잡아보지만, 끝내는 그저 괴팍할 뿐인 자신의 기질적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철부지들. 뭔가 이뤘다고 착각하여 배움을 멈추고 탐구를 멈추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눈에는 지성의 빛이 없고 몸에는 대장부의 품위가 없으며 가슴에는 공손한 덕이 없으니, 사람들이 무얼 보고 '도인'들을 본받을 것이며 무얼 보고 명상의 길에 선뜻 들어설 것인가. 아,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수행과 깨달음이 아닌 일상에서 차곡차곡 이루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중용의 도(道)에 뜻을 둔 학인이야말로 참으로 귀하구나. 그러..
「불교는 마하무드라 요가 탄트라와 선(禪) 또는 정토종에서 보는 것과 같은 대승불교의 실천 응용을 통하여 여러 세기 동안 발전하고 꽃을 피웠다. 그러나 정토종은 개인의 진화를 촉진하기 위해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으므로, 실제적인 불교의 가르침(즉 반야바라밀의 체험)은 선과 탄트라 요가에서만 찾을 수 있다. 역사가 입증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 선과 탄트라 유파에서만 '눈을 뜬 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따라서 불성이 개화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수행자라면 이들 마하무드라와 선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선과 탄트라 양쪽의 연구 및 실습을 통하여 필자는 선의 가르침과 마하무드라의 고급 탄트라가 동일함을 알았다. 식별할 수 있는 차이는 양자의 제시 방식이 표면적이고 외부적인 견지에서 약간 다르..
「그[화이트헤드]의 능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든 일에 온건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절제된 사람이었다. 소식을 했고 포도주는 조금 더 마실 때도 있었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았다. 한 번도 자극적인 기호품 같은 것을 요구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혈색 좋고 맑은 눈, 부드러운 피부의 팔순 노인에게서는 남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탐닉에 빠져드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그 모습은 갈수록 감동을 주었다. 또 하나 더 큰 인상을 받은 것은 그의 생활 모습인데, 네 개의 방으로 된 아파트는 다른 어떤 부유한 사람들보다도 더 자유롭고 더 넓은 영혼과 지성을 소유한 자의 모습이 풍성하게 숨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노인의 기묘한 버릇이나 변덕 같은 것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
「알라딘 : 시공사 그리폰북스, 열린책들의 경계소설 시리즈 등 199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 출간된 SF 중에 김상훈씨의 손이 안 간 기획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열정적으로 힘을 쏟게 만드는 SF의 매력은 뭘까요? 김상훈 : 의식의 확산입니다. 훌륭한 SF를 읽었을 때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은 종교체험에 필적합니다. (웃음) 알라딘 : 아, 그런 걸 SF 팬덤에선 경이감(Sense of Wonder)라고 하지요.」* 경이감, 훌륭한 시를 읽었을 때 느껴지는 말로할 수 없는 신비로운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또 조금 다른, 그러한 체험. SF를 읽자. 14/12/01 * 알라딘 저자 인터뷰, 에서 2013/02/20 - 멀리 가는 이야기 SF
「불교와 선의 초점을 돈오가 아니라 점수 위에 세워야 한다. 돈오를 잊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 ‘소식’ 하자고, 온 청춘을 다 바쳤는데”를 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 우려하고 경계해야 할 욕심이요 아만이다. 인생의 문제는 몰록 깨달음 한 번으로 끝장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는 없다. 오직 점수만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점오(漸悟)만이 있다. 그리고 그 점오에 정직해야 한다. 정직해야만 자신의 작은 깨달음이나마 전할 수 있고, 그런 공감대 위에서 불교가 이웃을 향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발언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나는 화두를 아껴두기를 요청한다. 물론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선은 불교사적 발전의 한 국면임을 승인하자는 것, 화두를 과감하게 불교적 해석..
「[초목, 와석에도 양지가 있냐는 질문에 왕양명 선생의 답] 인간의 영이나 자연의 영이나 다 같다. 만일 초목, 와석에도 인간이 갖고 있는 양지가 없다면, 초목도 초목이라고 할 수 없으며, 와석도 와석이라고 할 수 없다. 어찌 초목, 와석에도 양지가 없겠는가. 또 천지도 사람 같은 양지가 없다면, 천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천지 만물이라는 것이 한 몸이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일점령명一點靈明"이다.」* 이에 대해 김흥호 선생의 해설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은 무엇인가? 현존재現存在이다'와 같은 말이다. 다른 모든 만물도 모두 '존재자'인데 사람만이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독특한 지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보면 인간은 하나의 일점령명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아주 유명한 말이다. 우주를 기름..
「형이상학자: (슬프게) 그러면 당신은 정말로 인류의 모든 형이상학적 사색이 완전히 쓸모가 없다는 말인가? 신비주의자: 천만에! 사람들이 스스로 직접적인 내성적인 방법의 필요성을 알기 전에는 별로 쓸모가 없는 객관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돌담에 자신의 머리를 박는 일이 때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형이상학은 본질적으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거대한 일종의 선문답과 같은 공안이며, 그것의 목적은 형이상학적 방법을 조금 더 밀고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달리 말해서, 형이상학은 인류가 신비주의에 대해 준비하는 데 있어 필요한 원숙한 과정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질문이 아무런 목적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름대로 아주 중요한 목적에 기여한다. (중략) 반..
「나비에게는 고려해야 할 또 다른 특성이 있다. 바로 명랑함이다. 나비는 근심이 없는 생물이다. 이 특성은 다른 네 가지 특성과 구분된다. 이것은 은유적으로 네 가지 특성과는 조금 다른 목적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나비의 명랑함은 나비의 태도이지 나비에 대한 물리적 묘사의 일부분이 아니다. 나비의 명랑함은, 말하자면 변화의 결과를 반영한다. 변화의 결과는 나비로서는 자기 희열인 동시에 해방감이다. 이것은 나의 억측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나비하면 그런 특성들을 떠올린다. 중요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나비는 변화한 후 잠깐밖에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명랑하며 행복해 보이는 생물이다. 우리는 나비가 명랑하고 근심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 근심 없는 명랑함을 자유와 결부시킨다. 따라..
「깨달음을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 동양철학에는 무슨 거창한,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그것을 한번 알면 우주를 말아먹고, 일거에 일상의 누추함을 벗어던지고 비상할 '비밀의 권능'은 없다.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의 굴곡을 거치며, 작게 혹은 크게 삶을 배우고 있는바, 그 속에서 각자 깨달음의 불씨들을 일깨워가고 있는 수행자들이다. 일찍이 주자는 돈오의 선학을 위태롭게 여겨, 일상의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점수를 그토록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 주자학을 말하는 사람들도 이런 착각이 없지 않다. 이理란 거경의 함영涵泳과 격물궁리의 극처極處에서 활연관통豁然貫通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리가 '초월'이나 '정보'가 아니라 점진적 '성숙'임을 알리자는 데 그 취지가 있지, 가르침이나 경지를 신비화시키자는 것이 아..
말로만 다를 뿐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깨달은 성자로 불리는 라마나 마하리쉬는 힌두교 전통의 수행자였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이 불교 전통 아래에서 수행한 스님들의 깨달음과 어디 다르던가? 마히리쉬의 『나는 누구인가?』를 읽어보라. 책을 펼치자마자 내리 꽂히는 무아無我의 벼락에 정신이 다 얼얼할 지경이다. 「붓다 사상의 중핵을 이루는 공 개념이나 유아唯我 개념이 힌두 사상의 아트만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불교사상에 관한 대부분의 저작들은 붓다의 연기법이 힌두 사상의 브라흐마나 아트만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명백한 결별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힌두 사상에서 유일자 브라흐마와 개별 영혼 아트만은 생명의 본체와 작용,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말하자면 생..
"미혹하면 물질이 의식을 거둬들이지만, 깨달으면 의식이 물질을 거둬들인다."* - 달마 대사 14/09/02 * 최민자, 에서 봄. 의식
위파사나 수행(깨어있기, 관찰하기, 주시하기)의 위력을 알려주는 일화. 「붓다 재세시에 마하 가섭의 제자인 한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보석상을 하는 숙부 집에 들러 숙부의 화려하고 유복한 생활을 보고 세속적인 욕락에 사로잡혀 수행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곧 그는 나쁜 패들과 어울려 범죄자가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아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마하 가섭은 탁발차 마을에 들렀다가 옛날 자신의 제자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고 그에게 다가가 일렀습니다. "너는 아직 옛날에 내가 가르쳐준 수행법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일념으로 주시하거라." 그는 사형장으로 가는 동안 일념으로 수행에 열중하였습니다. 사형집행관이 불에 달군 쇠창을 들고 ..
을 쓴 저자 '무산본각'에 동의할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위파사나(위빠싸나) 수행은 붓다가 가르친 핵심 수행법이다. 위파사나의 위대함은 요행이나 스승(조사)에 의지할 필요없이 누구나 정진하면 정진한 만큼 수행의 결실을 본다는 것이다. 2. 불교가 중국의 선禪으로 이어지면서 위파사나 수행법이 실전되었다. 3. 삼매(몰입)나 견성(깨달음)이 수행의 끝이 아니다. 동의할 수 없는 바는 이런 것들이다. 1. 그렇다고 선사(禪師)들의 도(道)가 반쪽짜리였나? 아니다. 그들은 위파사나 수행법을 말하지 않았지만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밭 갈 때는 밭 갈고 목마른 자가 오면 물을 나눠주는 생활을 한결같은 마음으로(평상심) 실천했다. 즉, "오직 할 뿐"이었다. 이는 위파사나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체험의 다양성』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마틴 루터, 조지 팍스, 존 번연,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인물들의 영적 자서전을 연구했다. 그 속에서 그는 일관된 하나의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이 경험한 영적 구원은 모두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들은 계시적인 빛을 통해 그런 우울한 마음 상태에서 해방되며 최고의 황홀경을 맛보았다. 우울증이 깊을수록 더 큰 희열을 느꼈다. 제임스는 이런 종교적 감화를 겪은 사람들을 과거에 조울증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순환 정신 이상' 사례에 비유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임스가 이런 종교적 체험을 무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종교적 체험은 오히려 정신 장애를 유익한 방향으로 이끌어주었다.」* ..
Practical neurotheology - using Neuroscience for Spiritual Practice. from Todd Murphy on Vimeo. "우리는 지고의 영적 수준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 궁극의, 최후의 영적 체험은 없다. 당신이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믿는다면 당신은 신과의 합일을 최고의 영적 상태로 여길 것이다. 당신이 힌두교도이거나 불교도이면 자아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 열반, 대자유, 해탈을 체험할 수 있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영적 경지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는 그러한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성취할 수 있는 매우 매우 높은 수준의 영적 경지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절정의 영적 환희를 섹스나 로맨틱한..
God and the Brain - The Persinger 'God Helmet', The Brain, and visions of God. from Todd Murphy on Vimeo. 신경신학자 토드 머피의 강의. 사람이 죽을 때 어떤 단계를 거치며 어떤 체험을 하게 되는지(임사체험), 그것이 뇌 어느 부분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경험인지를 과학적 연구결과를 기반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신을 만나는 체험(문화권마다 등장하는 신이나 체험이 달라지나 핵심 과정은 유사), 깨달음의 체험은 바로 이 죽음의 체험과 같은 경로를 밟으며 그것은 두 체험 모두 같은 뇌의 기관이 작동한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소위 깨달음을 이루었거나 신을 만나는 경험을 하여 완전한 축복과 경이, 행복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전과는 완..
아래는 백장의 야호선(野狐禪) 혹은 백장야호(百丈野狐)라고 불리는 불가의 일화이다. 「백장 선사가 설법을 할 때였다. 한 노인이 매일 와서 백장 선사의 설법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노인이 백장에게 물었다. "나는 오백년 전에 한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 때 누가 '부처도 인과에 떨어지는가?'라고 묻기에 제가 '떨어지지 않는다(불락인과不落因果)'고 답하는 바람에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이 업을 해소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백장이 노인에게 말했다. "그 물음을 내게 다시 해보시오." "부처님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인과에 매이지 않습니다(불매인과不昧因果)." 그 말을 듣고 노인은 마침내 깨달아 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다고 한다.」* 14/02/11 * 윤기붕, 에서 본 내용을 각색. 2012/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