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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 강설>, 선(禪)의 가르침은 반쪽짜리인가? 본문
<무문관 강설>을 쓴 저자 '무산본각'에 동의할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위파사나(위빠싸나) 수행은 붓다가 가르친 핵심 수행법이다. 위파사나의 위대함은 요행이나 스승(조사)에 의지할 필요없이 누구나 정진하면 정진한 만큼 수행의 결실을 본다는 것이다.
2. 불교가 중국의 선禪으로 이어지면서 위파사나 수행법이 실전되었다.
3. 삼매(몰입)나 견성(깨달음)이 수행의 끝이 아니다.
동의할 수 없는 바는 이런 것들이다.
1. 그렇다고 선사(禪師)들의 도(道)가 반쪽짜리였나? 아니다. 그들은 위파사나 수행법을 말하지 않았지만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밭 갈 때는 밭 갈고 목마른 자가 오면 물을 나눠주는 생활을 한결같은 마음으로(평상심) 실천했다. 즉, "오직 할 뿐"이었다. 이는 위파사나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와 완전히 같은 것이다.
2. 선사(禪師)들은 삼매만을 강조한 반쪽짜리였나? 그 반대다. 선(禪)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저 유명한 마조선사의 기왓장 일화를 떠올려보라. 마조가 좌선(참선)으로 붓다가 되려 하자, 회양은 마조에게 그건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것 만큼이나 허망한 짓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평상심이 도다." 선의 종지(宗旨)는 시종일관 일상생활에 있는 것이다.
3.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저자가 자신의 수행법만이 옳고, 자신의 불교 해석만을 참된 것으로 규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도로 모는 태도이다. 수많은 수행단체와 수많은 수행자가 이런 식이다. 옛 운동권 조직들이 다들 자신만이 마르크스요 레닌이요 볼셰비키였듯이, 요즘 도 닦는 단체들은 다들 자신만이 진인이요 정도요 참된 길이요 참된 깨달음이요 참된 수행단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수행법으로 각자 자신만의 길(道)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도는 닦을 수록 넓어져야지 좁아져서는 안된다.
. . .
삶을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생생하게 살아내는 것 이상의 도의 경지는 없다. 이것이 조주, 마조, 임제, 회양, 석두 등등 빛나는 별과 같은 선(禪)의 스승들이 벼락이 내려치는 것과 같은 충격으로 우리에게 전해준 지혜다. 이 위대한 스승들이 없었다면 수많은 진실한 수행자들이 아직도 깨달음을 얻는답시고 혹은 수행한답시고 세상에서 도피하거나, 사이비 교주를 따르거나, 신비한 능력을 좇거나, 신비한 체험을 좇거나, 아니면 고행으로 자신을 학대하고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위파사나가 수행의 근본이라면, 선(禪)은 가르침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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