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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 너의 영원한 삶 본문
「사실 메시아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고, 항상 종교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적 메시아주의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어떤 <자유의 왕국>의 존재를 정립하는데, 그런 왕국의 도래는 현실 역사의 종말을, 즉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동시대인이었던 마르크스를 한 번도 인용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니체는 진보란 관념 자체를 거부하고, "잘못된 이념"으로 간주했다. 이는 문명의 개혁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근대적인 '진보'라는 것이 실상 데카당스의 동의어, 인간성의 획일화와 위대한 것을 향한 모든 열망의 포기와 동의어였음을 말하는 것뿐이다. 항상 완전성을 다른 장소, 이후의 시간에 두지 말고, 초월성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에서, 즉 내재성의 한가운데에서 초월성을 찾아야 한다. 니체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이 삶, 너의 영원한 삶!"
도원 선사에게도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심오한 이해를 획득하게 되는 바로 이 좋은 순간에 말이다. 이 기쁜 순간 자체는 시간의 바깥에 있지 않다. "어쨌든 좋은 순간이 아닌 순간은 없고, 붓다의 본성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다시 현재화된다." 이렇게 좋은 순간을 살아가려면, 사물들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순간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린다. 끈질기게 기다리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잘못일 것이다. 반면 수행은 생성을 존재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음보다 긴급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원 선사는 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 잃어버려도 되는 순간은 하나도 없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만물의 비영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공허하고 불안정한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러한 시간이 도망가게 놔두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으로부터 모든 실재성을 제거하면서 말이다. 도원 선사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시에서, 끝내 하루 24시간을 잃어버리게 하는 부산스러움을 비난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 안에서 소중히 생각하는 정신이
가을날 황혼이 질 때
산에서 들리는 격류 소리에
한순간에 흔들리는구나!」*
15/11/24
* 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 다미앙 막도날드. (2012). 유럽의 붓다, 니체. (강희경, Trans.). 파주: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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