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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오직 하학 처에서만 성공이 있는 것이지 상달에 도달하는 데는 오히려 힘을 쓸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희는 하학(下學)하면서도 상달(上達)할 수 없는 것은 다만 하학에서 얻는 것이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 주장은 분명하다. 그런데 주희는 홀연 상달이라는 말을 하였으니 나 보기에 타당하지 않다. 만일 어떤 시기를 인연으로 얽어 놓고 미혹과 깨달음의 시간 경과에 따라 본다면, 이미 불가의 붕당에 들어간 셈이다. (···) 홀연 상달은 이미 하학하는 일과 양편을 갈라서 상달한 이후에 일체무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불가가 벽돌 조각으로 문을 두드려서 문이 갑자기 열리면 벽돌조각은 쓸모가 없다는 취지이다. 불가는 돈멸을 깨달음으로 삼기 때문에 가르침이 그런 것에 있다. 그러나 성인..
헤겔 등은 동양철학을 속된 말로 개무시하지만, 조선의 천재 율곡 이이는 화이트헤드가 주장하는 이른바 '과정 철학', '유기체 철학'의 아이디어를 1500년대에 이미 선취하고 있었다. 불가나 도가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신유학의 이(理) 개념은 과정 철학의 '영원 대상'(eternal object)에, 기(氣) 개념은 '사실 존재'(actual entity)에 비교될 수 있다. 주자와 퇴계는 이(理)에 작위성이 있다고 본데 대하여, 율곡은 없다고 보았다. 퇴계의 이기호발론과 율곡의 기발이승론은 이런 점에서 서로 대립된다고 할 수 있다. 퇴계는 이(理)와 기(氣)에 효능인이 있다고 본 데 대하여 율곡은 그것이 기(氣)에만 있지 이(理)에는 없다고 본다. 플라톤의 경우는 이데아만이 작위성과 효능인이 있지 사..
「소외에 대한 주자학의 설명은 이렇다. 환경의 자극은 일정한 심리적 신체적 응답을 촉구한다. 이를테면 나는 노하거나 기뻐한다. 그런데 분노해야 할 곳에서 침묵하고, 기뻐해야 할 곳에선 무감각하다면······ 그것은 나의 잠재적 에너지, 즉 성(性)을 적절히 정(情)으로 실현하지 못한 셈이 된다. 그것은 우주적 실패에 해당한다. 이 과(過) 혹은 불급(不及)은 왜 일어나는가. 총체적으로 ‘나’에 대한 고립적 관심과 염려 탓이다. 이 ‘기질의 간섭’으로 하여 나는 우주적 기의 본원적 네트워크가 미리 예비한 온전한 반응으로부터 스스로를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주자는 이때 ‘마비’를 말하면서 의도적으로 한의학에서 쓰는 용어 불인(不仁)을 빌려왔다. 여기서 주자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죄’나 ‘불복종’이 아니..
「(지극한 천리를 다하고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인욕이 없다는 것이 왕도라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동자가 물었다. "그러면 왕도는 욕구[욕망]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대답하였다. "그렇지는 않지. 『서경』에 이르기를, '의로 일을 제어하고 예로 마음을 제어한다'고 하였고 『맹자』에 이르기를, '군자는 인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예로 마음을 보존한다'고 했지. 예의로 잘 다듬으면 정이 바로 도이고 욕구가 바로 의인데 미워할 무엇이 있겠느냐. 예의로 잘 다듬지 못하고 사랑을 끊고 욕구를 없애려고만 한다면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오히려 더 잘못되는 것이니, 지극한 정까지 다 끊고 없애 버려 형체를 상하게 하고 눈과 귀를 막아 버린 뒤에야 그치게 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
「[맹자가 집중執中에 대해 말하면서 무권無權은 집일執一과 같은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한 설명] 진리는 변하는 것이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역易, 수시변隨時變의 뜻이다. 아까 질문의 집중, 무권이라 할 때 '권權'은 저울 권 자로서 저울이라는 것은 올려놓는 물건에 따라 자꾸 변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저울추가 무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이것을 '시중時中'이라고 한다. 그때그때에 따라 자꾸 변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저울로 무게를 잴 때 저울추로 무게에 따라 눈금을 꼭 맞추는 것, 그것이 '시중'이다. 그때그때 적절하게 맞아 들어가야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울이 물건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고 의사의 진찰이 환자의 병세에 따라 달라지듯이 진리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에 따라..
「학문은 자기 연마(爲己)를 지향해야 한다. 성인의 가르침은 오직 『대학』의 첫 구절인 '명명덕明明德(타고난 본래의 밝은 덕을 밝힘)'에 있다. 거기에 뜻을 두면 용모를 바르게 함도 '자기 연마'요, 책을 읽으며 궁리하는 일도 '자기 연마'이며, 어떤 일을 성실하게 완수하는 일도 '자기 연마'이다. 성현이 가르친 지경持敬(깨어있음)도 자기 연마로 설명된다. 사실 '자기 연마'를 할 줄 알면 자연히 '경敬'에 이른다.」* - 주희 14/11/05 * 박성규, 주희
이토 진사이는 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며 주자학이 리(理)라는 글자에만 집착해 "잔인하고 각박한 마음이 많아지고 관대하고 인후한 마음은 적어"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너그러운 성인의 기상이 없어 "자기 지키기가 너무 엄격하고 남 꾸짖기가 너무 심해, 폐부에까지 스며들고 골수에까지 젖어들어 마침내는 각박한 무리가 되고 말았"다고 슬퍼하고 있다. 통쾌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토 진사이 역시 "공자는 최상의, 지극한, 우주 제일의 성인이시며 『논어』는 최상의, 지극한, 우주 제일의 책"이라고 말하며, 노자와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허무와 적멸만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고 미혹시키는 이단으로 단죄하고 공자와 맹자가 제시한 기준은 만고불변에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 어찌 이리 각박하고 좁은가. 또한 공자가 ..
"경(敬: 깨어있음)을 유지하면 이겨 없앨 '나'도 없다."(敬則無己可克)* - 주희 14/11/03 * 박성규, 주희 깨어있음
"이 마음이 달아났음을 깨닫자마자 곧 마음은 여기에 돌아와 있다."* - 주희 14/10/31 * 박성규, 2014/01/06 - 학문이란 자기를 깨우치는 것 주희 맹자
「학문은 마치 수레를 미는 것과 같다. 힘을 써서 수레를 밀어 움직여 놓으면 저절로 굴러가서 힘쓸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논어』 첫머리에 ‘배우고 늘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라고 한 말이 바로 그 효험이다. 배움은 기뻐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저절로 그만둘 수 없게 된다. 기쁠 수 있으면 자연히 그만둘 수 없다. 마치 나무를 심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 심고 물을 주면 이내 크게 자라서 저절로 가지가 나고 잎이 자라니, 이에 더 무슨 사람의 힘이 필요하겠는가? 배우고 늘 익혀 기뻐하는 경지에 이른 뒤에는 자연히 그만두려고 원하지 않는다. 요즘 사람은 다만 기쁨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라고 하겠다.」* - 주희 14/10/29 * 박성규 역주, 2013/03/04 - 저절로 주희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는 누가 더 세고 약한지, 누가 더 위고 아래인지를 갖고 무익하게 다투다가 한세월을 다 보낸다. 태권V가 더 센지 마징가가 더 센지, 펠레가 짱인지 마라도나가 짱인지부터 어느 철학자가 더 우월한지, 예수와 공자 중 누가 더 성인인지까지 유치하든 고상하든 서열에 집착하는 메커니즘은 매한가지다. 특히 사내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아이고 의미 없다." 그러나 나도 그렇다. 노력해야겠다. 「전에 증점과 칠조개의 우열을 놓고 친구와 격렬하게 토론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오직 내가 어떻게 하면 칠조개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증점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한 일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우열만 비교한다면, ..
정호와 육구연은 왕양명으로 이어지는 심학(心學)의 원류로 평가된다. 「주희는 정호에게 가서 들으면 똑같은 말인데도 다르게 들렸다는 사상채의 말을 인용하며 그것은 그의 말하는 방식에 '울림'이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사람을 감동시켰다고 했으며, 정이에 관해서는 형과는 달리 말하는 방식이 사각사면이었으므로 사람을 감동시키기 어려웠다고 하였다. 또 육구연과 여조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세 내가 들은 것 가운데 가장 울림이 있는 말을 하여 사람을 감동시킨 이는 육자정(육구연)이 최고였다. 이상하지, 어째서 여백공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눌하고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는지." 육구연의 어투에 관해 하나 더 말하자면 그는 주희에게 부탁을 받고 1181년 봄 백록동 서원에서 의와 리에 관한 유명한 강연을 ..
「또 주희는 '정'을 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적어도 원래 주자학에는 비인간적인 엄격주의는 아직 없었다. 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이라는 본원에 도달하며, 성(=정)은 정을 통해 자기를 현재화하는 것이고 또 정을 제외하고는 동적인 장에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 이전에 정념은 인간의 생리적 자연이라는 건전한 상식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은 본래 좋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고의 멸정론은 석로釋老의 설이다." "이고가 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은 옳지만 정을 멸함으로써 성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잘못이다. 정을 어떻게 멸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곧 석씨의 설이다." 정념의 움직임 그 자체를 악으로 보았던 것은 여산의 혜원이나 그와 동시대를 살아간 불교자들에게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량좌(사상채) 선생이 경(敬)을 상성성(常惺惺)으로 정의한 것이 마음에 든다. 이천 선생이 말한 것 처럼, 지혜로운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누구나 다 깨어있으려 노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깨어있음(유교식으로는 '경', 불교식으로는 '관觀: 위파사나')은 수행의 핵심이다. 「물론 주희에게도 '경'이 방법상의 중심 과제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경자敬字의 공부는 성문聖門의 제일의이다. 철두철미, 잠깐이라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였으며 모든 공부를 '경'으로 수렴하였다. 정이나 주희에게 '경'이란 '주일무적' 혹은 '정제엄숙'으로 정의되는데 본래 '경'이란 말이 그랬듯이 타자에게 경의를 표현하는 것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의 상태로 전위되었다. '경'은 '정좌'나 '좌선'과 같은 구체적..
「어떤 사람이 물었다. "정좌를 하든 사태에 대처하는 것이든 모두 마음을 집중시키려 해야 하는군요." 선생이 말했다. "정좌라는 것은 좌선이나 입정처럼 사념을 끊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을 수렴시켜 쓸데없는 생각에 이끌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마음은 담연히 아무것도 일삼지 않아서 저절로 '전일專一'하게 된다. 어떤 사태가 발생하여도 사태에 응하여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고 그 사태가 사라지면 다시 담연해진다. 하나의 일에서 둘, 셋으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잡연하여 통일이 없어지는데 어떻게 '전일'하게 되겠는가? '문왕이 온화한 모습으로 궁궐에 계시고 엄숙하게 사당에 계시니 나타나지 않아도 있는 듯하며 싫어함이 없어도 보존하는' 모습을 볼 따름으로, '경敬'이란..
「초학자가 해야 할 공부는 정좌이다. 정좌를 하면 근본이 정해지니 무심코 외물을 쫓아간다고 해도 밖으로 나간 그 마음을 회수하려 할 때에 확실하게 둘 곳이 있다. 예컨대 집에 있는 것에 익숙해지면 설령 외출하여도 집에 돌아오면 안도하게 되는 것과 같다. 만약 멍하니 밖에 머물면서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설령 마음을 자신 속에 수렴하려 하여도 머물 곳이 없다.」* - 주희 14/10/23 * 미우라 구니오, 2013/08/23 - 정좌 수행 2014/09/24 - 신유학(주희)의 수행법 주희
「독서는 도저히 버리고 떠날 수 없을 때까지 읽어야만 비로소 참맛을 알 수 있다. 만약 몇 번 읽고 대강 그 뜻을 알았다고 하며, 벌써 싫증이 나서 다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아직 그 책의 재미를 알지 못한 것이다. 생각건대 사람의 마음이란 영묘하여 천리가 머물고 있으므로 쓰면 쓸수록 빛을 발하게 된다. 정신을 맑게 하여 종일토록 마음을 집중시킨다면 얼마나 많은 글을 읽을 수 있고 얼마나 많은 철리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게으름만 피우고 있으면 정신은 흐리멍덩해지고 꽉 막혀서 통하지 않게 된다.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 주희 14/10/22 * 미우라 구니오, 2012/12/31 - 천천히 읽기를 권함 2012/12/31 -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20..
"한 권의 책을 강론할 때에는 반드시 그 책과 자신이 혼연일체 될 때까지 철저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을 덮어도 그 내용이 마음에 새겨져 모두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독서는 마음을 집중시켜 잘 완미하여야만 문자로부터 철리가 샘솟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 모두 주희 14/10/21 * 미우라 구니오, 주희
「학문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절실한 문제를 궁구해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독서는 이미 부차적인 것밖에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 속에 '도리'가 완비되어 있으므로 밖에서 더 채워야 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성인이 반드시 책을 읽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은 자기 자신 속에 이 도리가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경험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인이 말씀하신 것은 바로 성인 자신이 일찍이 경험하였던 것이다.」* - 주희 14/10/20 * 미우라 구니오, 주희 학문
"원래 공부란 끝까지 추구하여 주위가 캄캄해지고 들어갈 길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진보한다."* - 주희 14/10/17 * 미우라 구니오, 주희
1) 깨어있기 「혹자가 묻기를 "경(敬)이 동정을 관통한다고 말하지만, 고요할 때는 적고 움직일 때는 많으니, 마음이 쉽게 흔들리고 어지러워질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자, 주자가 말씀하기를 "마음이 어찌 모두 고요할 수 있겠는가. 일이 있으면 응해야 한다. 인간이 세상에 살면서 일이 없을 때가 없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다한 일이 있다. '일이 많아 나를 흔들고 어지럽히니 우선 가서 정좌하라.'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경(敬)은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이 앞에 닥쳤는데도 자신은 고요함을 주로 하고자 하여 오뚝하게 앉아 일에 응하지 않으면, 이 마음은 모두 죽은 것이다. 일이 없을 때에는 경이 이면에 있고, 일이 있을 때에는 경이 일에 있어야 한다. 일이 있건 없건 내 마음의 경은 끊어짐..
「(주자의 경전 해석에 일자일구도 손을 못 대게 하고, 소소한 상례의 기간과 절차를 두고 죽고 죽이는 혈전을 벌이고, 이 입법을 무시한 다른 인종과 문화는 이해하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과부에게 재가를 하기 보다는 절개와 의리를 강요하는 임진왜란 이후 노론이 주도하는 주자학 문화에 대한 각주에서) 왜 조선 후기 그 예가 문제였을까. 나는 어느 날 니체를 읽다가 무릎을 쳤다. "거세나 근절 같은 것은 의지가 박약하고 퇴락하여, 도저히 절도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욕망에 대항하여 싸우느라고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수단이다. ... 그러한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퇴락한 사람들이다. ... 성직자와 철학자들의 역사, 그리고 예술가들의 역사를 조사해보라. 관능에 대한 가장 극심한 독설..
「분명히 말하지만 주자에게 있어 태극은 기가 아니라 기의 '소이所以'이다. 그것은 기와는 다른 초월적 영역의 형이상자임을 명시해둔다. 그동안 학자들은 이理의 내재만을 중시했지 초월의 측면을 깊이 유의하지 않으려 했다. 퇴계는 이 측면에 깊이 경도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주자학 가운데 신학적 지평을 확장시켰다(이에 비해 율곡은 자연론적 지평에 더욱 충실했다). 사람들은 유학을 일상적 사회규범의 세속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해서 이같은 신학적 지평을 간과한다. 정통 유학자들은 유학을 기독교와 대척적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유교가 일종의 신학이며, 기독교와 닮은 데가 있다 하면 펄쩍 뛴다. 이유는 여럿일 것이나, 근본적으로 유교 전통을 폐기하고 들어선 근대 과학문명과 기독교적 정신이 한통속이라고 생..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착각, 혹은 오해 가운데 하나가 "한문을 오래 읽고 많이 외우고 있으면" 그만큼 이해도 깊어지고, 체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문의 뜻은 그 텍스트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다! 유교는 유교 밖에 있고, 불교는 불교 밖에 있다. 오래 읽은 사람이 그 텍스트를 가장 모를 수 있다. 이것은 역설이지만, 또한 진실이다. 소설가 이병주의 『허망과 진실』이라는 책이 있었다. 사마천과 루쉰, 다산, 니체 등을 읽고 느낀 감상과 평을 적은 에세이였는데, 그 가운데 다산 편을 읽은 어느 학자는, 자신이 그보다 나은 글을 쓸 수 없어서 연구를 포기하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철학 이야기』로 유명한 듀런트는 『문명 이야기』 첫 권에서 중국의 역사..
「깨달음을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 동양철학에는 무슨 거창한,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그것을 한번 알면 우주를 말아먹고, 일거에 일상의 누추함을 벗어던지고 비상할 '비밀의 권능'은 없다.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의 굴곡을 거치며, 작게 혹은 크게 삶을 배우고 있는바, 그 속에서 각자 깨달음의 불씨들을 일깨워가고 있는 수행자들이다. 일찍이 주자는 돈오의 선학을 위태롭게 여겨, 일상의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점수를 그토록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 주자학을 말하는 사람들도 이런 착각이 없지 않다. 이理란 거경의 함영涵泳과 격물궁리의 극처極處에서 활연관통豁然貫通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리가 '초월'이나 '정보'가 아니라 점진적 '성숙'임을 알리자는 데 그 취지가 있지, 가르침이나 경지를 신비화시키자는 것이 아..
수신(修身) 혹은 수양(修養)을 철학의 중심 과제로 늘 꽉 부여잡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동양의 종교나 철학 전통의 위대함이다. 동양의 전통에서 형이상학은 단지 지식으로 알아할 과제가 아니라 몸으로 증득하고 체험하고 검증해야 할 과제였다. 공자가 말했듯이,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로다. 「'철학'의 외양을 한 필로소피가 등장함으로써 전통유학이나 불교는 때 아니게 정체성을 의심 받고, 정당성을 도전 받게 되었다. 논리와 체계로 무장한 철학은 묻는다. "얘야, 유교는 일상의 조언들로 가득 차 있던데, 그건 철학이냐, 잠언집이냐." 그리고 유일신의 초월성을 등에 업은 '종교'는 묻는다. "불교야, 너는 무신론 같기도 하고, 다신론 같기도 한데, 너를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
「가라타니는 근대적 의미의 자유란 오직 유럽과 일본 봉건제 속의 '자치도시' 또는 '자유도시'에서만 발생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남송 시대 주희의 사창(社倉) 구상에서 나타나는 자발적 상환 의지의 주체로서의 자영 소농민들 속에서 그러한 의미의 자유와 자율의 싹을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일까? 유교적 공론장인 향촌의 서원과 사우 등 문인 공동체의 네트워크는 어떤가? 대중유교의 공론장이었던 여러 대중 강학 장소에 모여든 농민과 상인들은 또 어떤가? 비단 유교사회만이 아니다. 이슬람과 불교, 힌두 문명권에도 이러한 의미의 자유와 자율의 공동체가 많았다. 이러한 곳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자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19세기 유럽의 동양관,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이론적 표현으로서의 '..
「정주학(또는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출현했다. 이-기의 명확한 준별이 새롭다. 한당 시기까지 중국적 사유에서 이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세계는 천(天, 유교), 진(眞, 불교), 도(道, 도교)의 신성함 속에 잠겨 있었다. 즉 성이 속을 통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주학에서 세계는 기로 이루어지고 기에서 이(理)가 분리된다. 정주학에서 이는 내면화된 윤리 개념이다. 이제 이는 기의 바다 속에서 힘써 탐구하여 찾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자연과 사회질서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되지 않고 그 속에서 작동되어야 할 이(理)의 원리가 발견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정주학의 완성자인 주희는 지층과 화석에 근거한 우주진화론을 생각했고 자연 관측을 위한 기계 설계에..
요 며칠 '유가 비판'을 올렸는데, 하필 오늘 또 이런 글을 봤다. 주희가 위선자라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불변의 이치(理)를 상정하는 철학은 경직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으로 읽으면 될 것이다. 폐쇄된 철학은 다른 사상체계를 함부로 이단으로 몰며, 다른 삶의 양식을 함부로 응징하려 든다. 도道는 열린 길이어야 한다. 「주희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덕분에 후대인들로부터 공자에 준하는 주자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위군자 행보로 점철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성리학의 가혹한 도덕윤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욕정을 인욕으로 표현했다. 이익과 욕심에 얽매이는 것을 말한다. 성리학자들은 인욕을 마치 뱀이나 전갈을 보듯 하면서 한치의 착오도 없는 천도를 좇을 것을 주장했다. 인욕을 완전..
"기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우리 몸의 감응 관계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인식론이 아니라 감응론인 것이죠. 쉽게 말하면 기가 표상하는 세계는 느낌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는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면이 강합니다. 구체성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인 구체성이지요. 그래서인지 理 중심의 사유를 했던 사람들의 언어는 딱딱한 편입니다. 그러나 기론자들은 문학적입니다. 『노자』, 『장자』, 『회남자』 등 기론적 사유를 견인해온 많은 텍스트들은 상대적으로 은유적이고, 문학적입니다. 理를 추구하는 텍스트들에 비해서 기를 추구하는 텍스트들이 훨씬 더 문학적이고 부드럽고 은유적이란 말이죠."* - 김시천(철학자) 언어만 딱딱한 것이 아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스승이었던 정이는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