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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문학이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예술이 끝났다, 세계는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 이 시대는 특권적인 시작과 끝이고 역사상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종말론적 병적 사고는 새롭지 않고 진부하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종식된 5세기 무렵 암울한 말이 유럽을 떠돌았다. "세계는 늙었다." 로마의 영광은 사라졌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쇠퇴하고, 이제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려 한다. 이제 세계의 종말이 오려 한다. 7세기에도 수도사 마르퀼프는 이 세계의 종말을, 어두운 비애를 열심히 설파했다. 8세기에는 '성 바르두전'이라는 책이 나와, 세상은 이제 끝이다, 더 이상의 변전은 없다, 결정적인 최후의 시대라고 썼다. 1000년도에는 다들 야단법석. 이 시절 기증문의 첫머리..
우리에게는 보인다: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지난 밤들 요약: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며 폭력은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불충분. 그곳도 넘어야 한다. 단지 문자를 쓰는 것'만'이 특권적으로 권력, 나아가 혁명에 속한다는 생각을. 루터파는 자신들을 뭐라 불렀을까? 근대인, 새로운 시대의 사람이라 불렀다. 중세라는 호칭을 일반적인 것으로 만든 것도 루터파. 그런데 14세기부터 16세기, 즉 루터가 출현하기 이전 오컴의 윌리엄을 필두로 하는 후기 스콜라학파도 자신들의 유명론을 가리켜 '근대의 길/방법'이라 불렀다. 또 있다.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에 참가한 법학자, 신학자 들이 이미..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성서를 읽는 운동. 루터는 무엇을 했는가? 성서를 읽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는 알았던 것이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 '이상해질 정도'로 ―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다.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게다가 그 질서는 썩어빠졌다. 모든 사람이 그 질서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를 제외하고.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루터가 말했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
문학의 승리 참된 철학자, 예술가는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스테판 말라르메) 따른다. 어리석음을 택하라. 정보를 차단하라. 지식과 정보는 사람을 병들고 쇠약하게 한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질 들뢰즈).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또 설명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리고 있다. "제한과 미. 그대는 아름다운 교양을 가진 인간을 찾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마치 아름다운 지방을 찾을 때처럼 역시 제한된 전망과 광경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히 전경적 인간들도 있다. 확실히 그들은 전경적인 지방처럼 교훈적이고 훌륭하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 니체,..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은 읽어보지 않을 수 없는 책이고, 소설가의 정신 세계가 궁금한 사람도 읽어보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은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에게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준다. 좌절은 소설가가 되는 건 운이라는 것이다. 타고나야 한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운명론적인 느낌이 드니 일단 운이라고만 해두자. 하루키는 야구 경기를 보며 맥주를 마시다 생각한다. '그래, 소설을 써야 겠다.' 이것은 하루키 본인도 영어의 에피퍼니(epiphany)라는 단어를 빌려 말하는 바, 일종의 계시다. 사도 바울이 느닷없이 계시를 받아 사도의 삶을 살기 시작했듯, 하루키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와 소설가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계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종의 예언도 이루어진다. 생애 처음으로 ..
「만약 여러분이 '실제 세계'의 진실을 찾고자 한다면, 카프카, 무질, 보르헤스, 페렉, 쿤데라, 우엘벡 등에게서 힌트를 얻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겁니다. 실험관 속에서 배양되고 길러진 소인들(homunculi)의 불확실한 가정들로 가득 찬 '지식'은 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고자 한다면, 자신만의 메시지를 갖고 말을 건네야 합니다. 독자들이란 '세계-내-존재'로서 자신만의 삶의 진리를 찾고자 애쓰며, 세상으로부터 숨겨진 혹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간과했거나 무시하고 지나쳤던 통찰들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지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적확한 언어를 찾는 것이며, 그 경험과 관련이 있거나 유사한 주제들에 천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
연구자가 학문을 통해 세상을 바꿔보려는 '강박관념'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김경만 자신이 학문세계에서 더 나은 상징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과 상징폭력을 피할 수 없었듯이, 연구자의 이론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서로 격렬히 충돌하는 힘들 사이의 투쟁에서 어떠한 경우든 자유로울 수 없다. 김경만의 말대로 완벽한 해방의 상태는 그려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더 낫게 설명하는 새로운 스토리를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그 중 어느 스토리가 앞으로 선택되고 펼쳐지고 변형될지 예측할 수 없다. 진화에서 어떤 변이가 종의 생존과 번영에 유리할지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새로움에의 시도는 멈출 수 없으며, 멈춰지지도 않을 것이다. 「『담론과 해방』은 행위자들이 구..
"『푸코의 진자』는 자료를 찾고 쓰는 데 8년이 걸렸지요. 제가 뭘 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10년간 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았던 것 같네요. 밖으로 나가서 차와 나무를 보고는 중얼거립니다. 아, 이것도 내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겠구나라고요. 그런 식으로 제 이야기가 매일매일 자라납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 삶의 작은 파편들, 모든 대화들이 아이디어를 제공해줍니다. 그러고나서 제가 소설에서 등장시킨 장소인 템플기사단이 있었던 프랑스와 포루투칼의 실제 지역을 방문했답니다. 그러면 소설 쓰기는 제가 전사가 되어 일종의 마법의 왕국에 들어가는 비디오게임처럼 됩니다. 단지 비디오게임에서는 완전히 게임에 빠져 도취되는 반면에, 소설을 쓸 때는 언제나 달리는 기관차에서 뛰어내리는 비판적..
오늘 참인 진리가 내일은 거짓일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진리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진리의 가치는 우선 흥미롭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 기쁨으로 인해 세계는 새롭게 전진한다. 「명제를 단순히 판단의 소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주 안에서의 명제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치명적이다. 순수한 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비순응적 명제는 그릇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보다도 더 나쁘다. 그러나 그러한 명제의 기본적인 역할은 세계가 새로움으로 전진해 갈 수 있게 길을 터 주는 것이다. 오류는 우리가 진보를 위해 치르는 대가인 것이다. 지나치게 주지주의적(overintellectualized) 성향을 띤 철학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논리학에의 관심은 사물 본성에 있어..
「모험이야말로 문명을 진부함과 지루함과 정통주의로부터 구출해준다. 모험정신에 찬 문명은 자유롭고, 활기차고, 창조적이다. 모험이 결여된 곳에 문학은 깊이를 잃고, 과학은 지엽말단에 사로잡히고, 예술은 보잘것없는 사소한 구별에 급급하고, 종교는 독단적인 도그마로 타락하고 만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대화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사상의 생명력은 모험에 있다. 이런 생각은 내가 평생을 두고 해온 말이다. 그밖에는 거의 말할 것이 없다. 관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관념에 대하여 무엇인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관념은 끊임없이 새로운 국면에서 고쳐보도록 해야 한다. 어떤 참신한 요소를 때때로 그 속에 끌어들여야 한다. 이를 중지할 때 관념도 정지되고 만다. 인생의 의미는 모험이다."」* 14/11/1..
「만약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우선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라고.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문학 또한 얼마만큼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따라 성패가 결정난다. 불안이나 고독에서 슬픔과 분노가 태어난다. 그 벽을 돌파한 곳에 나 자신의 혼이 있다. 거기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불안과 고독이야말로 창조하는 자들의 보물이다. 그 보물을 스스로 내동댕이쳤다고 해서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문학은 이미 장난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노후에 객사할 각오까지 하고 글을 쓴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열심히 분투하면서. 그의 글을 찾는 고정 독자가 꾸준히 있고, 또 그가 나이 70이 넘은 현재까지 객..
「어떤 편집자가 내게 물었다. "어떤 독자들을 상정하고 소설을 쓰는가?" 나는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목적을 갖고 전력투구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나,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여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남자들이다." 그러자 편집자는 이렇게 반박했다. "이해는 하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문학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되물었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가?" 편집자는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후 그는 두 번 다시 그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두어 권을 훑어 보았다. 막상 그의 소설도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하는 젊은이나 삶에 분투하는 남자에게는 인기가 없을 것 같았다(웃음). 정말로 문학이란 대체 어떤 사람들..
「아직 개발되지 않은 문학의 광맥이 무진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필자는 한국의 독자들이 나의 에세이를 읽고 그렇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남아 있는 무한한 문학의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많은 작가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무절제하게 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엄격한 생활 태도를 견지하면서 도전하지 않으면 새로운 광맥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문학이 쇠퇴하였다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기존의 문학이 쇠퇴했을 뿐 문학 자체가 쇠퇴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기존의 작가들이 쇠퇴한 것이지 문학의 광맥이 고갈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문학에 도전하겠다는 각오만 확고하다면, 문학의 광맥은 얼마든지 우리들에게 그 가능성을 열어 보여줄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몇십 년은 소설을 계속 쓸 테지만, 몇만..
「널리 인정되는 기준, 즉 이 책이 '좋다' 또는 '나쁘다'는 주장에 의미를 부여해줄 어떤 외부적 참고 사항이 없는 상태에서 문학적 판단을 내릴 때에는 결국 본능적인 선호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련의 규칙을 날조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리 좋은 시절이라도 문학 비평은 사기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한 작품을 읽고 보이는 진정한 반응은 '이 책이 좋다' 또는 '이 책이 싫다'는 것이며 그 뒤에 합리화가 이루어진다. 나는 '이 책이 좋다'는 반응을 비문학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내 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장점을 찾아야 한다"는 반응은 비문학적 반응이다. 물론 정치적 이유로 작품을 칭찬하는 경우에도 그 작품에 강한 동의를 느꼈다는 점에서 진실한 감정일 수 있다. 그런데 정당에 대한 결..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많은 문학 지식인 세력들이 공산당을 거치거나 공산당에 우호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이런 좌파운동 전체를 통틀어 읽을 만한 책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정통 가톨릭교는 몇몇 문학 형태, 특히 소설에 참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 300년 동안 훌륭한 가톨릭교도로서 훌륭한 소설가가 된 이가 얼마나 되는가? 사실 언어로 찬양할 수 없는 주제가 있는데, 압제가 그 중 하나다. 어느 누구도 종교재판을 찬양하는 훌륭한 책을 쓴 적이 없다. 시는 전체주의 시대에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또한 몇몇 예술, 나아가 건축 등과 같이 부분적으로 예술적 성격을 띠는 활동은 심지어 압제가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산문 작가는 침묵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
일본의 인기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모교 초등학생들에게 소설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이런 숙제를 낸다. '문학이란 어떤 것인지, 주변 사람들, 이를테면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박식한 삼촌 등에게 물어올 것'. 학생들의 숙제 내용이 하나같이 재밌지만, 여기엔 숙제를 발표한 후 그 학생들이 문학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말하는 부분만 옮겨본다. . . "흠, 그랬군요. 그러면 히로시 군은 문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젊었을 때는 읽고 그다음에는 읽지 않게 되는 것,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 "아, 정말 날카로운 질문을 했군요. 자, 그러면 히로미 짱은 문학이라는 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서점에서 팔기는 하지만 그 서점 아저씨는 별로 읽지 않는 것, 그리고 요즘에는 야한..
병적인 결핍감과 어두움이 있어야 위대한 문학이 나오는 것일까? 을 읽고 나서 했던 생각이다. 꼭 병적이지는 않더라도 모종의 우울함, 외로움, 그리움, 서러움 들이 있어야 흔히 말하는 명작이 나오는 것 같다(물론 밝고 화사한 뛰어난 문학도 여럿 있을 것이다). 화엄경에는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곧 극락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별일 없이 사는 사람, 순간순간을 사는 사람, 걱정 없이 사는 사람, 마음을 비운 사람, 건강한 사람은 사실 소설을 쓸 만큼 할 말이 많을 것 같지 않다. 마음은 소란스럽지만, 무심은 말이 없다. 「"혼란스러운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실제로는 혼란스러운 마음 같은 것은 없다. '마음'이 '혼란'이다. 혼란이 없을 때, 그것은 마음이 평화로워진 것이 아니다.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