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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다섯째(마지막) 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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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다섯째(마지막)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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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문학이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예술이 끝났다, 세계는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 이 시대는 특권적인 시작과 끝이고 역사상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종말론적 병적 사고는 새롭지 않고 진부하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종식된 5세기 무렵 암울한 말이 유럽을 떠돌았다. "세계는 늙었다." 로마의 영광은 사라졌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쇠퇴하고, 이제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려 한다. 이제 세계의 종말이 오려 한다. 


7세기에도 수도사 마르퀼프는 이 세계의 종말을, 어두운 비애를 열심히 설파했다.


8세기에는 '성 바르두전'이라는 책이 나와, 세상은 이제 끝이다, 더 이상의 변전은 없다, 결정적인 최후의 시대라고 썼다.


1000년도에는 다들 야단법석. 이 시절 기증문의 첫머리는 '세상의 끝이 가까워져'로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끝이다라는 생각이 만연했다.


2000년에도 큰 소동이 있었다. 아무 일이 없자 2012년이라는 둥 고쳐 계산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이 '다시 계산하는 것'도 고대로부터 줄곧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960년 이라고 하다가(은자 베르나르 수도사), 1009년 이라고 했다가, 1033년은 틀림없다는 식으로.


문학이 끝났다, 순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하는 이야기도 수백 년, 수십 년이나 반복해서 반복되고 있다. 괴테나 실러조차 "문학은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독일에서 휠덜린, 헤겔, 셸링, 클라이스트, 노발리스, 하이네, 슈티프너, 니체, 릴케, 첼란.. 경탄할 만한 재능이 무수히 나왔다.


문학의 위기 따위를 말하는 사람은 순문학이 5000부, 1만 부밖에 팔리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5000부나 팔리지 않는가. 그리스 문학은 0.1%만이 살아남았지만 이슬람 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으며 우리 세계의 초석이 되었다.


왜 책을 읽지 않느냐고 다들 말하지만, 그건 당연하다. 혁명은 끝났다, 문학은 끝났다, 라고 쓰여 있는 책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아도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책을 누가 읽겠는가? 책을 계속 읽는다는 것은 혁명을 불러들이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문학가들은 터무니없는 노력을 언어에 쏟아부어왔다. 왜일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없다. 그러니 계속 쓸 수밖에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문맹율이 90%가 넘는 상황에서 10퍼센트 이하에 승부를 걸어 승리하였다.


문학은 고작 5000년 밖에 안 된 이상할 정도로 젊은 예술이건만 유독 문학만 '문학은 끝났다'는 둥의 창피한 소리를 한다. 아무도 '노래는 끝났다', '음악은 끝났다', '옷은 끝났다', '춤은 끝났다', '액세서리는 끝났다'고 하지 않는다. 문학은 인류 역사를 여든 노인의 입장으로 보면 두 살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고생물학에 따르면 세계의 종말은 이미 다섯 번이나 왔다.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이첩기), 트라이아스기(삼첩기), 백악기. 페름기에는 생물 개체의 90~95퍼센트가 절멸했고, 가장 최근 백악기에는 85~90퍼센트의 개체가 절멸했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유감스럽지만.


지구에 지금까지 존재한 생물의 종수는 400억 종 이상으로 추정된다. 현시점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은 0.1퍼센트이고, 99.9퍼센트는 멸종했다. 생물 종의 평균 수명은 400만 년이다. 가령 호모사피엔스가 400만 년 산다고 하면, 우리가 탄생한 지 20만 년이 되었으니 앞으로 380만 년 정도는 남아 있다. 379만 년 양보해서, 1만 년만 남았다고 치자. 그 1만 년간 루터, 무함마드, 하디자, 아우구스티누스, 테레지아, 도스토예프스키, 조이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예수, 부처와 같은 사람이 다시 등장할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계속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이 끝났다고? 그건 첫 번째 황금시대가 끝났다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앞으로 두 번째 황금시대가 찾아올 거야."(들뢰즈)


380만 년의 영원이든 뭐든 내 삶은 찰나이고 무의미한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어떤 때라도"(니체). 즉, 우리는 우주의 거대한 생성의 '일부이고' 그 '의미인' 것이다. 이 방대한 우주의 생성 안에서 이리하여 우리가 말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을 자아내가는 것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은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의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가 읽고 쓰고 노래하고 춤추고 말한 것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목소리다."(발터 벤야민)


발소리를 들어버린 것이다. 도움을 받아버린 것이고. 그렇다면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고, 발소리를 내는 것 조차 거부당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겨 나지 못하게 된다. 들려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발짝이라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는 초판 700부 인쇄 중 350부가 반품되어 태워졌다. 2판에서 증보 개정하지만, 그 또한 비슷비슷했다. 그중 한 권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산 사람이 스물한 살의 니체.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아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쓰게 된다.


"언제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니체)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중분히 완성되지 않은 게 아닐까?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그대들의 완성이 불충분하거나 반쯤밖에 완성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반쯤 부서져버린 사람들이여! 그대들 내부에서 밀치락달치락하며 서로 밀치지 않는가 ― 인간의 '미래'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고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 중


우리는 계속 걸을 것이다.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380만 년의 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밤도 깊었으나 마지막 밤은 없다. 밤은 늘 시작이다. 우리의 밤 속으로 사라지자. 우리의 환희 속으로.


17/01/07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다섯째 밤에서 발췌. 재구성. 리뷰. 요약.



2017/01/04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첫째 밤

2017/01/04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둘째 밤

2017/01/05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셋째 밤

2017/01/06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넷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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