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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우리 시대의 정치적 연설과 글쓰기는 대부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사용된다.따라서 정치적 언어는 주로 완곡어법과 논점 회피, 그리고 순전한 모호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 무방비 상태의 마을들이 공중에서 폭격당하고, 주민들은 시골로 쫓겨나며, 가축들은 기관총으로 살해되고, 오두막은 발화탄으로 불태워진다: 이것을 '평화 정착'이라고 부른다.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그들의 농장에서 쫓겨나 가진 것만을 들고 길을 떠돌게 된다: 이를 '인구 이동' 또는 '국경 조정'이라고 부른다. 재판도 없이 수년간 투옥되거나, 목 뒤에서 총살당하거나, 북극의 벌목장에서 괴혈병으로 죽어가도록 보내진다: 이를 '불안정 요소의 제거'라고 부른다.이러한 어법은 실제 일어나는 일들의 심상을 떠올리지 않고도 그것들을 지칭하고 ..
"지은이는 공자의 인식론을 ‘해석적 경험론’이라고 지칭하는데, 그것은 ‘경험’을 앞세우고 ‘생각’을 뒤로 하는 인식론적 태도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의 첫 문장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부터 나온다. 지은이는 학이시습의 ‘학’은 단순히 배운다는 뜻이 아니라 ‘경험에서 배운다’는 뜻이라고 강조한다. 이성적 사유보다 경험적 지식을 앞세우는 것이 지은이가 해석하는 공자의 경험론인 셈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경험주의 사상과 연대하고 합리주의 사상과는 대결함으로써 공자철학을 오늘의 패치워크 사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16/01/07 * 한겨레, 2011-02-18, 2016/01/05 - 아주 작게, 그냥 하자 2014/12/24 -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2015/01/19 - 일상의..
「흔히 말하듯 철학은 이해한다. 철학은 진리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지혜는 깨닫는다. ... 식물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맹자가 말했듯이 돋아나는 싹을 잡아당기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오히려 싹이 스스로 자라도록 내버려두면서, 종종 그 밑부분의 땅을 '부드럽게 김매주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인식은 객체를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과 관련된 반면에, 깨달음은 간접적으로 항상 우회(깨달음을 용이하게 해주는 충고라는 우회)를 통해서 실행되기 때문에 잠복과 함축에 관련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결코 완벽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기회가 닿으면" 돌출되는 결과에 의해서 드러난다. "보라", "갑자기", 나..
「스승은 네 가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즉, (특권적인) 관념이 없고, (미리 정해진) 필연성이 없고, (고정된) 입장이 없으며, (개별적인) 자아가 없다.」* - 『논어』, 「자한」, 4 15/09/05 * 프랑수아 줄리앙. (2009).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 철학의 타자. (박치완 & 김용석, Trans.). 한울. 에서 재인용. 2014/08/20 - 마음을 닦는 학문 2014/08/18 - 공자, 노자, 붓다의 맛 2014/01/19 - 무아(無我)의 군자 2015/09/05 - 현자에게는 내가 없다 프랑수아 줄리앙 논어
「논어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속수(束修)를 요구하고 있다. "논어가 과연 오늘날과 같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우리가 논어로 가려는 의지보다 논어는 우리가 팔짱을 끼고 있더라도 스스로 우리에게 오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는 안이한 요구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능히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논어에 대하여 취하는 그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논어와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다. 논어는 문자라는 경직된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공자의 현존을 갈음하는 '말씀'이다. 생전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고 말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의 현존을 갈음하는 어록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워서 때에 따라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벗이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냐?" 「아무도 이 단편을 놓고 그 의미를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난해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편을 통하여 공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훨씬 중요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문제가 不亦說乎(불역열호), 不亦樂乎(불역락호),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라는 반복된 문구에 가로놓여 있다. 공자가 세 가지 삶의 모습을 "기쁨"(說)과 "즐거움"(樂)과 "군자"(君子)로 제시하면서 그것을 不亦○乎라는 표현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바로 그 세 가지 삶의 모습이 일반적인 가치관에 있어서는 도무지 기쁨..
『논어』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한 종래의 해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배웠으나 요즈음의 배우는 사람들은 남에게 알려지기 위해 배운다." 새 해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배웠으나 요즈음의 배우는 사람들은 남을 위해 배운다." 「공안국 이래의 모든 해석들이 爲人(위인)을 표현된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남을 위해서 배우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공자는 "남을 위하여 배우는" 경향을 개탄하였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논어 안에 널브러져 있다. 논어는 도처에서 타인에 대한 어설픈 베풂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하는 말로..
선생님(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를 통해 일어나고, 예를 통해 서며, 음악을 통해 이룬다."(태백/9)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공손하면서 예가 없으면 노고로와지고, 신중하면서 예가 없으면 겁약해지고, 용맹하면서 예가 없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고, 곧으면서 예가 없으면 냉혹해진다."(태백/2) 「오늘날에 이르면 예의 강조점이 옮겨졌다기보다는 차라리 예 자체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인하여 각 개인의 행동양태가 바람직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창출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문명의 권역들이 그 경계를 허물고 바야흐로 하나의 문화권으로 혼융되어 나가는 단계에 있어서 이같은 현상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의 본질 속에서 우리는 예의 소..
맹무백이 효도에 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모가 오직 그의 질병에 대해서만 걱정하는 것입니다."(위정/6) 「이것은 그가 효도를 의무의 각도에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도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논어에 있어서 효도에 대한 언급은 도무지 가부장적 권위를 동반하고 있지 않다. 효도는 단지 자식된 자가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인격적 완성을 구현하는 것일 뿐이었다. 안인(安人), 즉 남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논어세계에 있어서 지고의 목표라 한다면, 가족이라는 가장 기초적이고도 중추적인 사회에 있어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걱정을 최소화하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에 기초한 의무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중심을 둔 수기(修己)의 일환인 것이다. 유교의 발전 과정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지만 부모와의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적어도 어짊에 뜻을 둔다면 악은 없다."(이인/4) 「어짊에 관한 언급으로서 논어 전편에 걸쳐 이 단편은 가장 위대한 한마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너무나도 짧은 단편도 역시 잘못된 읽기에 가려져 왔는데, 이는 다른 많은 단편의 잘못읽기와 마찬가지로 공자의 독특한 사유체계를 간파하지 못한 데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일반적인 번역은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적어도 어짊에 뜻을 둔다면 악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제임스 렉(James Legge)도 無惡也를 "there will be no practice of wickedness"라 번역하여 惡을 악행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 단편이 가진 빛나는 진실을 무미건조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옛 일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스승을 삼을 수 있다."(위정/11) 「공자는 구체적 스승에게 배울 필요 없이 옛 일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 것으로 스승을 삼아 배워 갈 수 있음을 확신했다. "슬기로운 것을 보면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슬기롭지 못한 것을 보면 속으로 자신을 살펴라"는 말이나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 중 좋은 사람을 택하여서는 그 좋은 점을 따르고, 그 중 좋지 못한 사람을 택하여서는 그 좋지 못한 점을 고친다"는 말도 역시 배움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며, 그밖에도 술이/30이나 자장/22가 동일한 기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위정/18의 다음 단편은 우리가 어떻게 배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아마 ..
염구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부족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서 포기하는데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다."(옹야/12) 「즉, 그는 모든 인간의 미흡한 상태를 소여(所與: 주어진 바)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모든 인간의 불완전한 상태가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주어진 것인가, 스스로에 의한 그때 그때의 선택인가 하는 것은 객관적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현재 상태를 위대한 지향에 의해 조성된 의미망 속에서 재인식할 때 그것이 선택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지향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삶은 지루한 일련의 소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향은 소여를 자기 책임속으로 끌어들이고, 결국..
선생님(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운데의 하찮음(中庸)이 덕이 되니 그 얼마나 지극한가! 백성들은 오래 유지하는 일이 드물구나."(옹야/29) 「이 한 마디! 좁게는 유가사상의, 넓게는 동양정신의 정수를 이루는 중용론의 남상(濫觴)은 이처럼 소박한 모습을 지닌 한 마디였다. 이제 이 짧은 단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이 보잘것없는 한 마디가 그토록 커다란 파장을 만들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중용이 덕이 된다" ― 우선 이 첫 마디야말로 범상치 않은 구조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지(之)자를 중심으로 중용(中庸)과 위덕(爲德)이 강렬한 대비 효과를 발하며 극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말에서 그러한 극적 효과를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용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이미 "중(中)은 ..
선생님(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행(中行)을 얻지 못하고 간여하면 반드시 과격해지거나 완고해진다. 과격한 자는 나아가 취하려 하고 완고한 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자로/21) 「공자는 한 인간은 자신의 안에서 이루어 놓은 것 이상의 것을 자신의 바깥에서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아가 취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자신의 바깥에서 찾는 것을 말한다. 즉, 이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당한 자리를 벗어나서 정당하지 않은 자리에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시도되는 소모적 추구다. 그것은 훌륭한 뜻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헛된 수고(徒勞)에 그치고 만다. 반면 견(狷)이라 하는 것은 그릇된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그에 물..
실제로 공자가 뭐라 말했든, 논어의 삼년상 대화가 위작이든 아니든, 삼년상을 고집하는 논어의 단편을 논어의 핵심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견해를 지지한다. 「양화/21에서 재아는 삼년상을 일년상으로 줄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다가 공자로부터 어질지 못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이 단편은 공자 사후 예법논쟁이 벌어졌을 때, 삼년상을 옹호하는 측이 일년상 주장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재아를 등장시켜 엮은 각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문맥에 세밀한 고려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논어에는 오히려 이처럼 세밀한 손질이 가해진 단편일수록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재아의 물음은 스승과의 대화에 사용한 표현치고는 지나치게 공들인 문어체이고, 특히 "여는 어질지가 못하구나" 하는 표현은 공자가 어질다..
「자공이 물었다. "한마디 말로서 일생 동안 그것을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논어, 위영공/24)* 위 단편의 서(恕)를 대부분의 번역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아라" 하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저자 이수태는 이러한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를 진심으로 바라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베풀려 들지 말라는 뉘앙스로 해석한다. 직설적 표현으로 바꾸면 "자신이 (능동적으로) 하고자 하는 바만을 남에게 베풀어라" 혹은 "너 스스로 하고자 하여 (그것을 통해) 남에게도 무언가를 베풀어라"라는 뜻이 된다. 「이 위대한 원칙은 누..
자공이 말했다. "만약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떠합니까? 가히 어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어진 정도이겠느냐? 반드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니 요임금과 순임금도 그 문제만은 부심했었다. 실로 어진 자는 스스로 서기를 바라서 남을 세우고 스스로 통달하기를 바라서 남을 통달시키며 가까운 데서 능히 예(例)를 드니 그것이 어짊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논어, 옹야/30) 「바로 이 말이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위영공/24)의 진정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지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요순도 부심했던 바,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과제의 실행 요체는 단지 스스로 서기를 바라고 스스로 통달하기..
「자공은 일찍이 공자에게서 일관(一貫)이라는 원리에 대해 가르침을 들었지만 아직 그 구체적인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 마디 말로써 평생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그 물음에 대하여 '그것은 아마도 서(恕)일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체로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은 보기 쉽지만 다른 사람의 고민은 잘 보지 못하는 법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는 관대하지만 남을 대할 적에는 언제나 가혹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는 결점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서(恕)로써 마음에 두면 다른 사람을 심하게 책망하지 않고서 능히 그 잘못을 용서하고 그 어려운 사정을 도와주게 되는 것이다. 그 효용은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평생토록 행할 만..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 "안평중(제齊 나라의 재상 안영)은 사람을 잘 사귀는구나. 오래될수록 오히려 공경하니."에 대한 이토 진사이의 해설: 「중용은 천하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생각건대 중용의 어려움은 천하의 사람들 모두가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을 시종 변함없이 행하는 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이유를 안다면 안자(晏子)의 행동이 쉽사리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4/12/26 * 이토 진사이, 2014/03/03 - 안자의 스승 2014/03/02 - 재상 안자의 생활 중용 이토 진사이
논어 첫머리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 대한 이토 진사이의 해설: 「학(學)은 '본받다'와 '깨닫다'는 뜻이다. 옛날의 주석을 살펴보고 자신의 견문에 비춰서 본받고서 깨닫는 것이다. 습(習)은 거듭 익히는 것이다. 열(說)은 열(悅)과 같은 뜻이니 기뻐하는 것이다. 이미 배운 것을 때맞춰 반복 연습하면 지식이 넓어지고 도리가 분명해지니 그것은 마치 깊이 자다가 갑자기 잠을 깨거나 절름발이가 불쑥 일어서는 것과 같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원래 도(道)는 광대한 것이어서 오직 배움을 통해서만 다 익힐 수 있고, 반복해서 연습하지 않으면 그 극한까지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배움을 중시하는 동시에 반복 연습하는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다.」* 14/12/24 * 이토 진..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121~180, 스토아 철학자, 로마황제)의 『명상록』은 몇 시간 안에 읽어낼 수 있는 책이지만, 그 교훈을 사고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평생의 과업이 될 것이다.」* - 루시언 프라이스 안회는 한 가지 선한 일을 발견하면 그것을 가슴에 새겨 두어 두고두고 실천하였다. 정이천은 『논어』를 읽기 전과 읽은 후가 같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논어』를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왕양명은 행하지 못하는 앎은 앎이 아니라고 하였다. 행하지 못하면 모르는 것이다. 14/12/10 * 화이트헤드·프라이스, 2013/04/03 - 지행합일 문답 2014/09/04 - 불법의 대의 화이트헤드 논어 왕양명
자각적 반성 -> 직업적 학문, 주체적 해방 -> 예속적 억압, 상호적 배려 -> 일방적 권위로 유교가 타락하는 과정은 기독교의 타락 과정과 유사해 보인다. 「기축시대 이후, 동서양의 정신의 영웅들은 모두 당대를 거슬러 또 다른 지평의 ‘현실’을 읽었던 사람들이다. 유교 또한 그러했다. 『논어』를 펼치면 공자와 그 집단이 당대의 상식과 이념과 투쟁하고 있는 생생한 기록을 만난다. 그런 점에서 유교는 본시 ‘순응적’이 아니고 ‘비판적’이다. 우리는 이때의 ‘도(道)의 기사도’들을 한 대 이후 형성된 제도화된 유교, 권력화된 유교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은 유학이 소집단의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권력과 제도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부터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가 자각적 반성..
『논어』의 '질목세이명불칭疾沒世而名不稱' 보통 해석: "죽기까지 이름이 나지 않는 것은 안된 일이다." 왕양명의 해석: "이름이 자기의 실력보다 지나치면 군자는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칭稱' 자를 거성으로 읽어 '일치한다'의 뜻으로 봄) 『논어』의 '사십오십이무문언四十五十而無聞焉 사역부족외야이斯亦不足畏也已' 보통 해석: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이름이 나지 않은 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왕양명의 해석: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진리를 만나지 못한 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무문無聞의 뜻을 이름이 나지 않으면이 아니라 불문도不聞道, 즉 깨닫지 못했다의 뜻으로 해석) 공자가 실제로 뭐라 말했든, 왕양명의 해석을 지지한다. 14/11/08 * 김흥호 전집, 에서 보고 재구성. 논어 왕양명 김흥호
「[공자는 마음을 넓혀줄 때는 지知를 가지고, 좁혀줄 때는 행行을 가지고 하였다.] 지는 자꾸 넓혀주는 것이고 행은 자꾸 좁혀주는 것이다. 행이라고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밖에 갈 수 없는 것이니까, 길은 언제나 하나이니까, 길은 두 길, 세 길을 갈 수가 없다. 보는 것은 얼마든지 두 길, 세 길을 볼 수 있다. 동서남북을 다 볼 수 있다. 그러나 갈 때만은 한 길로 가야지 여러 길을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아는 것은 넓게, 행하는 것은 좁게 되어야 한다.」* 14/11/07 * 김흥호 전집, 에서 발췌, 재구성. 2015/09/05 - 철학은 이해하지만 지혜는 깨닫는다 논어 김흥호
「학문은 자기 연마(爲己)를 지향해야 한다. 성인의 가르침은 오직 『대학』의 첫 구절인 '명명덕明明德(타고난 본래의 밝은 덕을 밝힘)'에 있다. 거기에 뜻을 두면 용모를 바르게 함도 '자기 연마'요, 책을 읽으며 궁리하는 일도 '자기 연마'이며, 어떤 일을 성실하게 완수하는 일도 '자기 연마'이다. 성현이 가르친 지경持敬(깨어있음)도 자기 연마로 설명된다. 사실 '자기 연마'를 할 줄 알면 자연히 '경敬'에 이른다.」* - 주희 14/11/05 * 박성규, 주희
「공자는 [스승의 절대적 권위같은] 이런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았거니와,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를 갖고 있다는 숭고한 확신감도 없었고, 제자들이 단순한 축음기판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가 되려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현명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생이 선생의 말씀 하나하나를 모두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이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여도 성내지 않았으며, 때로는 그들이 옳고 자기가 틀렸음을 솔직히 말하기도 하였고, 제자들이 틀렸음을 확신하였을 때에도 문헌이나 선례 및 선생의 권위로 위압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을 이치로 설득시키려 노력하였으며, 그것이 불가능한 ..
"무고한 자를 죽일 바에야 차라리 불량배를 놓침이 낫고,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처벌하고, 공이 의심스러우면 높게 포상한다."* - 『서경』 14/11/04 * 박성규, 논어
이토 진사이는 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며 주자학이 리(理)라는 글자에만 집착해 "잔인하고 각박한 마음이 많아지고 관대하고 인후한 마음은 적어"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너그러운 성인의 기상이 없어 "자기 지키기가 너무 엄격하고 남 꾸짖기가 너무 심해, 폐부에까지 스며들고 골수에까지 젖어들어 마침내는 각박한 무리가 되고 말았"다고 슬퍼하고 있다. 통쾌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토 진사이 역시 "공자는 최상의, 지극한, 우주 제일의 성인이시며 『논어』는 최상의, 지극한, 우주 제일의 책"이라고 말하며, 노자와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허무와 적멸만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고 미혹시키는 이단으로 단죄하고 공자와 맹자가 제시한 기준은 만고불변에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 어찌 이리 각박하고 좁은가. 또한 공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