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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익숙한 것과 범속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이탈의 몸짓은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라는 절대 명령의 특성을 띤다. 이탈이 발생하는 곳은 사람들이 "빌견된 사실에 대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익숙한 관계도, 그것의 복사판도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익숙한 관계는 이탈자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탈자는 기존의 생활방식에 대해 깊은 불만을 느낀 나머지 그것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삶을 혹은 자기 자신을 바꾸기로 한다.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예외적 인간은 극단적인 태도 변화, 즉 전향(conversion)을 통해 이를 행한다. 그 과정에서 드물지 않게 "혐오, 회환, 이전 존재 방식에 대한 철저한 배척과 같은" 감정이 이탈자를 사로잡기도 한다..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위에서 말 걸게 하기" 현상은 릴케의 문장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에서 그에 어울리는 적절한 언어적 형식을 발견한다. 이 명령은 그 출처와 권위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까지 모두 불확실하지만 수신자, 요구의 비타협성, 표현의 극단적인 수직성 등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것은 절대적 명령이다. (···) 이 명령은 2인칭 단수로 표현된 혁명의 슬로건이다. 이 명령은 삶을 그것의 더 높은 형식과 낮은 형식 사이의 경사면으로 규정한다. 나는 이미 살고 있지만, 그러나 무언가가 내게 거역할 수 없는 권위로 너는 아직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누가 혹은 무엇이 감히 내게 이렇게 거만하게 강요하는 말투로 말을 걸 수 있을까? 누가 혹은 무엇..
「『철학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철학의 귀환" 현상을 언급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방향을 탐색할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철학이라는 옛 주소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게 된다. 비밀의 문과 마주하지 않기를 바라며". 슬로터다이크 자신도 노크에 반응해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에 속한다. 그는 방향을 탐색하는 사람들에게 긴장을 특징으로 하는 '치료 개념'을 제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압박에 쫓기고, 심지어 완전히 소진되었다고 느끼는 시대에는 오히려 '긴장 완화'의 치료 효과가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우려에 대해 실제로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동시대인들 중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정한 수직 긴장 속에 살아간다"고 ..
「우리의 자아상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자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 동의할 수 있을 때 자기결정적인 사람이 된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자기결정성은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동의다. 물론 이때 다음과 같은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자아상은 소망을 자기 것으로 삼고 평가하기 위한 척도이지만 이 척도는 불변의 것도, 불가침의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상이 평가된 소망에 순응을 강요함으로써 오직 한 방향에서만 영향을 받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경험도 가능하다. 자아상은 그에게 맞지 않는 소망들의 영향을 통해 변화되고 발전한다. 이것은 내 안에 하나의 의지가 만들어지는 경험이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는가? 중국 사유의 중심 용어는 '변화'다. 행동하기보다는 변화시킨다. 이는 현자뿐 아니라 전략가에게도 해당된다. 현자는 인류 전체를 '변화'시키고 전략가는 적을 변화시킨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적이 휴식을 취한 상태로 오면 피곤하게 만들어야 한다. 즉 변화시켜야 한다. 적이 결집되어 나타나면 분열시키는 등, 적이 점차적으로 침착성을 잃고 결국 분열되고 굶주리고 고갈된 상태로, 즉 역량을 잃은 채 내게 나타나도록 하는 절차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적을 공격하면 바로 그가 굴복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 변화는 지목된 주체를 가리키기보다는 영향을 통해 주변에 스며들고 확산되는 방식으로 은미하게 진행된다. 따라서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변화의 결과만을 볼..
「따라서 현자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덕 너머에 자리한다. 자강불식의 정신으로 자신을 하늘처럼 쉼없이 새롭힘으로써 현자는 모든 순간과 상황을 거쳐 보편에 이르게 된다. 욕망과 의도가 부정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방향 자체가 사물의 본성과 상반되기 때문이 아니라 고정된 경향을 초래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고정된 경향이 의식의 확장을 막고 만물을 통해 나아가는 소통력을 저하시켜 의식 자체를 끊임없는 상관관계로부터 고립시키면서 마침내 의식을 매몰시키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감각에 종속됨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감각 자체가 본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감각이 의식을 개별성에 파묻어 변화능력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부세계와의 금욕적인 단절을 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럴수록 외부세계는 결코 ..
「그러나 체계가 그 변화능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획일적이며 고착된 모형으로 축소되지 않아야 한다. 괘의 조합체계는 약정된 틀에 갇히지 않을 때만이 그 타당성을 지닌다. 변화는 미리 주어진 어떤 틀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운행사상이 진정 실재에 대한 이해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운행 그 자체를 고정된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운행이란 그 자체 속에 언제나 다름과 괴리와 새로움이 드러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부지는 의 고대 주석가들의 해석을 좇아 보다 깊이 있는 체계와 변형, 완벽성과 가변성을 연결하는 관계를 천착하였다. 모형이 모형인 이유는 삶이 그 자체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행사상이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바로 그 ..
「여기서 우리는 변화를 살피는데 보다 확고한 근거를 갖추게 되는 바, 이원적이고 폐쇄적인 체계에서, 하나의 진전에는 반드시 다른 하나의 후퇴가 있기 마련('변變'은 양이 물러나는 것이고 '화化'는 그와 동시적으로 행해지는 음의 진전)이다. 변화가 있다함은 바뀜이 있음을 뜻한다. 생산이 없는 순환이란 없으니, 교대란 갱생의 조건 그 자체이다. 쉼이 없는 운동은 소진될 것이며, 운동이 되지 못하는 쉼 또한 소멸되고 말 것이다. 동과 정은 '서로를 내포하니', 낮은 운동이며 밤은 쉼이다. 이 교대로 말미암아 세계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고 한결같이 지속된다. 하늘에는 가시와 비가시, 땅에는 성쇠의 교대가 있다. 그러므로 대립이란 '존재'와 '무'의 대립이 아니라 현동現動과 잠재潛在(명明과 유幽)의 대립일 뿐이..
「중국인들은 실재적인 모든 것을 장치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한한 일련의 가능한 원인들을 찾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성향의 불가피한 특성에 민감하기 때문에, 단순히 개연적일 뿐인 목적에 대해서도 사유하지 않는다. 우주 발생론에 관한 목적론적 전제도 이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시초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세계의 결말을 상상해보지도 않는다. 오래전부터 언제나 작동 중인 상호작용만이 존재할 뿐이며, 실재는 이러한 상호작용의 끊임없는 운행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그리스적 개념에 따라 생성과 감각적인 것에 대립되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들은 '실재 속에서 작동 중임을 우리가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
「바로 이러한 것이 왕부지가 역사 속에서 줄기차게 작동하고 있다고 발견해낸, 고대로부터 밝혀져 있는 전복의 논리이다. 사실 역사의 과정은 자연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방식으로 균형과 보상에 의해 작동한다. '응축된 것은 다시 새롭게 펼쳐질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것이 상황[勢]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경향이다.' 물론 경쟁적인 세력들 사이에서도 사정은 이와 비슷하다. 고대 중국에서 진나라가 점차 강해져 (경왕 때) 헤게모니를 잡게 되었다가 그 다음에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과정의 냉혹함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앞선 예(송나라의 성종과 왕안석)에서 볼 수 있듯이, 지나치게 권위적인 정치적 압력이 느슨해지는 것은 전적으로 저..
「따라서 지혜의 반대 항은 거짓이 아니라 편파적인 것이다. 지혜 속에서 완전한 합치의 중용이 진리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파성은 철학에서 오류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타인의 '담론들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여러 학파들 사이의 토론에서 적대적인 입장들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거짓이라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들에서 결핍된 것을 강조하고 따라서 그 결핍된 것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기원전 3세기의 순자에게서도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순자는 묵가와 동시대를 살았으며 추론의 논리적 엄격성에 매우 예민했으며, 고대 중국에서 논박의 실천을 가장 잘 발전시킨 인물이다. 순자는 마음의 '통치적' 역할에 가치를 두었..
「현자는 이렇게 "그 어떤 개별적인 관점 속에 정체되는 것"을 삼가했으며 "만물의 흐름과의 일치"를 주구하면서 변화를 사유의 거울로 삼고 "과정과 논리"를 지혜의 수련법으로 익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를 들어 줄리앙은 "현자에게는 고정된 '입장'이 없다"고 감히 주장했다. "현실은 지속적인 변모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자의 행위 또한 그러한 것이다." 현자에게 고정관념이 없다는 것은 "현자에게는 내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줄리앙은 그 이유를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한다. i) 현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관념이 있다고 해도 이를 통해 아무것도 재단하지 않기 때문이며, ii) 그 '아무것'도 존중해야 할 정언명령으로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며, iii) 또한 그 어떤 입장 속에 고정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며..
「요컨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의 실현가능성을 뒷받침해줄 그 어떤 확실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그 일이 성공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전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희망하기를 멈추는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성공에 대한 보장이 없다고 하지만, 글쎄요, 우리가 삶에서 실천하는 것들 대부분이 성공에 대한 보장이 없는 것이지요. 또한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실패나 패배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늘 이런 실패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만 하죠. 또한 이것은 희망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성공에 대한 보장 없이도 우리는 무언가 희망해야 합니다. 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계를 맹목적인 암흑의 세계라 단정 지을 때, 그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 엘리아스 카네티, 『말의 양심』 중 「작가의 사명」 15/08/06 * 인디고 연구소(InK) 기획. (2014).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서울: 궁리. 에서 재인용. 2015/08/05 - 역사는 사전에 기획될 수 없지만 새로운 싹은 자라고 있다 2015/07/26 - 이론적 희망은 희망일 뿐이지만, 근거 없는 희망을 추구해보고 또 다른 시도를 해봐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글로리: 그게 그들이 바라는 바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바야. 기업들, 드래곤들, 정치인들, 모두가. 그들은 우리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길 원하지. 그들은 우리 자신이 작게 느껴지도록 노력을,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느끼도록. 블리츠: 자, 근데... 음.. 우리가 이긴거 맞지? 러너: 이 일에 이기는 건 없어. 우린 그저 살아남았을 뿐. 그게 모든 러너가 희망하는 바고, 기대할 수 있는 전부야.」* (Glory: That's what they want. That's what they need. The corps. The dragons. The politicians. Everyone. They want us to think that we can't make a ..
"부도덕하다는 비난은 예술의 완전성을 지적함으로써 반박되지는 않는다. 물론 도덕의 옹호는 변화에 반대하는 우매한 집회의 함성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헤아릴 수 없는 그 옛날 옛적에 상당수의 아메바는 대양으로부터 건조한 육지로 이주하기를 거부하였을 것이다 ― 도덕을 옹호하면서 말이다. 사회에 대한 예술의 부수적인 봉사는 그 모험성에 있는 것이다."* 14/11/18 * 화이트헤드, 2014/11/02 - 위로 올라가고 싶은 열망 2014/10/17 - 도는 선하지만 도덕은 아니다 화이트헤드 예술 도덕
「신학의 임무는 어떻게 '세계'가 단순히 변천하는 사실을 초월한 그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에 있으며, 또 어떻게 '세계'가 소멸하여가는 계기들을 초월한 그 무엇에 귀속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시간적인 '세계'는 유한한 성취의 무대이다. 우리가 신학에 요구하는 것은, 소멸하여가는 삶 속에서도 우리의 유한한 본성에 고유한 완성을 표현하는 가운데 불멸하는 그런 요소를 표현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서 삶이 기쁨이나 슬픔보다도 더 깊은 만족의 양상을 포함하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14/11/17 * 화이트헤드, 화이트헤드
「[맹자가 집중執中에 대해 말하면서 무권無權은 집일執一과 같은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한 설명] 진리는 변하는 것이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역易, 수시변隨時變의 뜻이다. 아까 질문의 집중, 무권이라 할 때 '권權'은 저울 권 자로서 저울이라는 것은 올려놓는 물건에 따라 자꾸 변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저울추가 무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이것을 '시중時中'이라고 한다. 그때그때에 따라 자꾸 변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저울로 무게를 잴 때 저울추로 무게에 따라 눈금을 꼭 맞추는 것, 그것이 '시중'이다. 그때그때 적절하게 맞아 들어가야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울이 물건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고 의사의 진찰이 환자의 병세에 따라 달라지듯이 진리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에 따라..
「미대성신(美大聖神)은 『맹자』의 편에 나오는 말이다. 가욕지위선可欲之謂善, 사람이 누구나 다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선善이다. 유저기위신有諸己謂信, 이 선이 자꾸자꾸 쌓여 내 속에 굳어지면 그것을 신信이라고 한다. 충실지위미充實之謂美, 신이 자꾸 커지면 그것을 미美라고 한다. 충실이유광휘지위대充實而有光輝之謂大, 미라는 것이 차고 넘쳐 빛나게 되면 그것을 대大라고 한다. 우리가 대인大人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쓴다. 대이화위성大而化謂聖, 대라는 것이 무르익게 되면 그것을 성聖이라고 한다. 성이불가지지위신聖而不可知之之謂神, 성이라는 것이 한없는 능력을 드러내게 되면 그것을 신神이라고 한다. 이렇게 맹자는 사람은 선에서부터 신으로, 신에서 미로, 미에서 대로, 대에서 성으로, 성에서 신으로 발..
「구름이 자신의 모양과 정체성을 영원히 고수하기 위해서 한 공간에 계속 머무르려고 애쓰며 삶을 허비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결국 그 구름은 어리석은 노력으로 인해서 좌절과 허망함 말고 그 어떤 것을 얻게 될 것인가? 구름은 자신을 잃지 않으면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구름이 죽어서 사라지지 않는 이상 자신의 진면목인 대양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신을 품고 있는 구름이다. 자신을 비우지 못하면 인간은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이 얼마나 큰 비움의 환희인가!」* 14/10/17 * 미하일 나이미, 미르다드의 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도(道)나 자기 변화라는 개념을 신화로 부르기를 고집하는 것일까?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표를 어떻게 기술하든 간에, 그 기술은 결국 주체와 대상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道)는 그 자신을 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물론 도는 절대적으로 침묵한다.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제시하는 기술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어떤 기술이든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따라서 우리가 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도 개념을 신화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신화는 절대적으로 거짓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참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들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하는 가장 그럴 듯한 이야기, 즉 없어서는 안 될 허구이다. 피카소가 예술에 대..
앨린슨은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호접지몽)를 아래와 같이 행들의 배열 순서를 바꿀 것을 제안한다. 「옛날에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나비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훨훨 날아다녔다. 그는 자신이 장주인 줄 몰랐다. 사실 그는 자기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장주인지, 장주인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지를 알지 못했다. 갑자기 그는 깨어난다. 그는 자기가 장주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므로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어떤 구분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변화이다.」* 14/10/04 * 로버트 앨린슨, 장자
「나비에게는 고려해야 할 또 다른 특성이 있다. 바로 명랑함이다. 나비는 근심이 없는 생물이다. 이 특성은 다른 네 가지 특성과 구분된다. 이것은 은유적으로 네 가지 특성과는 조금 다른 목적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나비의 명랑함은 나비의 태도이지 나비에 대한 물리적 묘사의 일부분이 아니다. 나비의 명랑함은, 말하자면 변화의 결과를 반영한다. 변화의 결과는 나비로서는 자기 희열인 동시에 해방감이다. 이것은 나의 억측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나비하면 그런 특성들을 떠올린다. 중요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나비는 변화한 후 잠깐밖에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명랑하며 행복해 보이는 생물이다. 우리는 나비가 명랑하고 근심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 근심 없는 명랑함을 자유와 결부시킨다. 따라..
「『장자』가 노리는 성과는 (장자가 직접 쓴) '내편' 가운데 제1편의 제목인 '소요유'(逍遙遊)에 어느 정도 예시되어 있다. 이 편명은 '행복한 방랑'(Happy Wandering) 또는 '목적지 없이 어슬렁거리기'(Going Rambling without a Destination)로 번역되어왔다. 나 역시 말투가 어색해질까와 내가 궁리해낸 번역보다는 이런 번역들을 채택해왔다. 그러나 이 번역들은 언어학적으로는 적절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잘못된 번역이다. '유'(遊, wandering)란 자기가 꿈꾸는 곳이면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여 갈 수 있는 마음의 절대적 자유를 가리킨다. 그것은 초월 또는 초월적 행복의 상태를 달성한 이후에나 가능한 자유의 단계이다. 이 상태는 오로지 영혼의 변화가 일어난 단계에서만 ..
「내포 질서에서는 마음이 물질, 특히 몸을 접고(감싸고) 있다고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몸은 마음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물질 우주 전체를 접고(감싸고) 있다. 이러한 몸과 마음의 관계는 사실 4장에서 이미 다루었다. 우리는 거기서 고차원 실재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고차원 실재가 더 낮은 차원의 요소들로 투영된다. 이 요소들 사이에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고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관계도 성립하고, 몸과 마음의 관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를 동시에 감싸고 있는 관계도 성립한다. 따라서 더 넓게, 더 깊게, 더 내밀히 들어가면 실재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실재는 더 높은 차원으로서 마음과 몸의 바탕(common ground)이면서 마음과 몸을 넘어서 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은 단지 어느 정도로만 ..
"Their job is not to change. Their job is to set you free." - Byron Katie 남을 바꾸려 들지 말고, 남에게서 자유로워져라. 14/04/23 바이런 케이티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하는 사람은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 집중하는 사람은 점점 더 폭력적이 된다. 집중은 긴장을 풀지 않고 마음을 좁히는 훈련이다. 그대의 의식에 가하는 폭력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폭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폭력적으로 대한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대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 이것이 삶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대하는 방식 그대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 그대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도 사랑한다. 그대의 내면이 흐르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흐른다. 내면이 얼어붙어 있다면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도 얼어붙을 것이다. 내면의 세계는 스스로의 모습을 외부에 드러낸다."* - 오쇼 그렇다면 명상은 무엇일까? 명상은 '집중'이 아닌 '각성'이다. '주시'(바라..
유교 경전은 보통 순임금의 부모·형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순임금의 아버지(고수)는 성질이 완악하였고, 어머니는 어리석었으며, 이복동생 상은 오만하였다. 순임금은 효도로써 이들을 화목하게 하고, 점차 선으로 나아가게 하여 간악한 데 이르지 않도록 하였다."(성학집요) 왕양명 선생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나는 일전에 부모·형제 등의 골육에게 처신하는 것에 대한 선배 유학자의 주석에 미진한 바가 있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순임금의 아비는 어리석고 어미는 모질다'고 하는 구절을 보자. 이는 순임금의 아비는 어리석고 어미는 모질며 그 아우인 상은 오만하였지만, 순임금은 효로써 화목을 유지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스스로 선으로 나아갔을 뿐, 그들의 간악함을 고치려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
「동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예전에 스승님께서 제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저에게 오계를 내리셨고 저의 법명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름은 곧 내가 아니요, 나는 바로 저 공이다' 하셨습니다. 공이란 곧 형체가 없는 것이니 이름이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다 쓰오리까. 청컨대 그 이름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니, 대사가, "너는 공순히 받아서 고이 보내라. 내가 60년 동안 세상을 보았는데 어떠한 사물이든 머물러 있는 것이 없이 모두가 도도하게 흘러간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바퀴를 멈추지 않으니, 내일의 해는 오늘의 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미리 헤아린다'는 것은 '거스르는' 것이요, '붙잡는다'는 것은 '억지로 애쓰는' 것이요, '흘려보낸다'는 것은 '순응하는..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것으로 유명한 이국종 교수가 의대생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제목은 "외상과 나". 이국종 교수는 이 강연 제목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외상과 나'라는 제목은 신파다"라면서 "신파에 빠지면 안 된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외과의를 꿈꾸는 당신의 생각도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 분야든 최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거의 도인이다. 이러한 경지에 있는 사람은 전세계를 누비든, 좁은 서가에 틀어박혀 있든, 수술실에서 삶을 보내든, 그곳에서 인생을 배우고, 통찰하고, 진리를 발견한다. “외과의들의 인생은 수술복을 입고 수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술이 끝나 폐기물이 가득한 수술방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이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 그러나 까마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