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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선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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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학(또는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출현했다. 이-기의 명확한 준별이 새롭다. 한당 시기까지 중국적 사유에서 이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세계는 천(天, 유교), 진(眞, 불교), 도(道, 도교)의 신성함 속에 잠겨 있었다. 즉 성이 속을 통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주학에서 세계는 기로 이루어지고 기에서 이(理)가 분리된다. 정주학에서 이는 내면화된 윤리 개념이다. 이제 이는 기의 바다 속에서 힘써 탐구하여 찾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자연과 사회질서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되지 않고 그 속에서 작동되어야 할 이(理)의 원리가 발견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정주학의 완성자인 주희는 지층과 화석에 근거한 우주진화론을 생각했고 자연 관측을 위한 기계 설계에 몰두했던 자연과학자이기도 하였다. 윤리학자로서 주희는 이가 현세의 사물과 현상에 '당위'로서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현세의 질서는 늘 이로부터 이탈하고 폭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주학에서 이의 궁극적 담지자는 현세의 힘을 대표하는 군주의 황통(皇統)이 아닌 윤리적 지향을 대표하는 학자의 도통(道統)에 있었다. 여기에 정주학의 근본적 비판성이 있다. 이러한 태도를 현실에서 구현해줄 사회세력이 출현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 이전에도 단편적으로 존재했던 통섭 전도의 단초가 그 시기에 이르러 현실화될 수 있었다. 

물론 주희 당대에는 금압의 대상이었던 정주학이 결국 관학으로 전화되어 보수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통과 황통을 준별하는 원리는 존속했고 재야의 공론 세력은 오히려 점차 확대되어갔다. 명말 청초의 대중유교 현상이 그 두드러진 일례다. 정주학, 넓게 보아 송학(宋學)은 외래 종교(또는 교의)가 번성하였던 한당 시기의 경험에 대한 유교 측의 적극적 대응의 산물임을 아울러 강조한다. 송대의 초기근대란 물질적 측면에서든 사상적 측면에서든 문명 간 교호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송대의 초기근대적 성과는 반짝하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세계로 가는 초고속 연결망을 깔았다고 하는 몽골제국이 송의 성과를 계승했고, 14세기 중후반 흑사병으로 인한 일시적이나 급격했던 쇠퇴의 공백을 새로 들어선 명나라가 빠르게 메웠다. 명청 시대에는 송대의 초기 근대적 달성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켰다. 이 시기 중국은 도시화와 상업화 등 사회적 분업 수준과 통치 체제의 체계성과 효율성이 단연 세계 최정상에 있었다. 그 결과 세계경제에서 중국과 동아시아가 점하는 비중은 18세기 초반까지도 오히려 꾸준히 상승했다. 세계 GDP에서 중국이 점하는 비중은 아편전쟁 직전인 1820년대에 32.9퍼센트(동아시아 전체는 41.1 퍼센트)라는 놀라운 비율에 이르러 그 정점에 이른다.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편전쟁 이후 서세의 침탈에 의한 중국의 급격한 퇴조는 이 모든 사실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일까? 오히려 반대로 이러한 점이 근대성의 역사를 흥미롭고 역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역사에서 영원한 선두는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 보면 '선두'라는 발상 자체가 문제다. 보편성이 오직 서구사에만 있다고 하는 입장은 영원한 선두를 과거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미래에서도 서구에게 점지한다. 바로 그런 관점이 '선두'라는 단선적 발상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입장에서 비서구의 미래는 영원히 결정되어 있다. 즉 서구가 이미 걸어간 길, 과거의 시간이다. 이는 신화일 뿐이다. 미래는 언제나 미지다. 철학적으로도 오류다. 역사에서 보편성이란 다양한 구체 속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상동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구체 자체가 보편일 수 없다. 아울러 보편성이란 전칭 명제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영원히 미래에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칭'이란 항상 미지(未知)적 간결이다.」*

14/07/20

* 김상준,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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