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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의 유럽물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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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은 인류문명의 합작품이지, 서구문명의 독점 발명품이 아니다. 이 주장을 담은 김상준 선생의 책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은 유교와 동아시아를 포함, 세계 역사와 문명을 바라보는 내 관점을 뒤흔들어놓았다. 켄 윌버 저서들 이후로 가장 강렬한 지적 자극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를 넘어 근대성의 의미를 새로 발굴·해석하고 인류 문명의 공생적·윤리적 진화를 다시금 꿈꿀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켄 윌버와 김상준의 프로젝트는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쉽게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스토리)은 삶의 태도와 방향을 규정한다. 밝은 비전을 품고, 더 건강하고 쾌활하게 살아가고 싶다. 큰 학자들의 좋은 스토리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근대문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도 일종의 유럽물신주의가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유럽의 근대문명에 비추어볼 때만 비유럽 문명의 근대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성의 유럽물신주의는 결국 비유럽 문명의 근대성의 고유한 내용을 인식 지평에서 지워버리는 마술적 착시를 일으킨다.

우리가 내인론(내재적 발전론)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한다면, 바로 근대문명의 유럽물신주의를 근원에서 재고하여 불식시킬 수 있게 해주는 방법론적 틀을 구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그 결과 재정립된 내인론이란 외인론과 이항 대립하면서 논리적 완결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이는 불구적 논리다), 외인론을 내부에 포함하면서 비로소 논리적 완결성을 갖추게 되는, 확장된 의미의 내인론이 될 것이다. 외인만으로 발생은 없다. 유럽과 비유럽은 근대 이전의 오랜 교호 과정에서 근대로의 진행의 씨줄과 날줄을 직조해왔다. 유럽의 근대 역시 중동과 아시아와의 교류의 소산이다.

근대세계란 세계성을 전면적으로 실현한 최초의 공간이다. 세계성의 계기는 유럽 문명만이 아닌 여러 비유럽 문명들에도 풍부하게 잠재하고 있었다. 유럽근대문명은 다만 세계성이 전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근대 형성의 최종 과정에서 촉매하였을 뿐이다. 또한 그 촉매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유럽이 근대문명으로 진입하였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근대문명은 일종의 화폐 기능을 선점하면서, 지구상의 여타 비유럽문명들에 대한 일종의 지구적 교환 가능성의 매체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 절에서 상술하겠지만 유럽은 근대 이전부터 여러 주요 문명권 간에 형성되어왔던 지구적 교환의 인프라를 최종 단계에서 접수했던 것에 불과하다. ... 다시 말해, 그러한 유럽 기준의 지구적 유통의 결과 모든 비유럽근대문명들의 고유한 실체는 사라져버리고 오직 유럽근대문명의 관점과 기준과 실체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

유럽근대문명만이 근대성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기준이요 실체라는 환상을 타기해야 한다. 그런 환상을 통해 비서구의 근대적 자기인식이 이루어졌다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자. 그러나 아울러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우선 분명히 확인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환상을 딛고 가로질러 갈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럴 때에야 환상을 넘어 새로운 지평에 이를 수 있다.」*

14/07/19

* 김상준,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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