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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괴델의 정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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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괴델의 정리

모험러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라,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공산주의 ― 한때 저는 '사회주의의 성마른 동생'으로 묘사했지요 ― 는 제게는 강제로 '자유의 왕국'으로 '지름길'로 달려가려는 기획을 의미합니다. ― 아무리 말로는 매력적이고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할지 몰라도 현실에서 적용되면 그것은 자유의 공동묘지로 향하는, 실제로 실천되었을 때는 노예제로 향하는 지름길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강제적인 방식의 실천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지름길이라는 생각 자체가 자유와는 정반대되니까요. 그리고 강제는 자가-추진적이며, 자기-강화적인 실천입니다.


일단 시작되면 강제당한 자들이 순종하고 침묵하도록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온갖 짓을 자행하죠. 일단 인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선언되면(한때 루소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한 바 있지요. 레닌은 그것을 주입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요. 카뮈는 모든 것을 재빨리 해결해버리는 20세기의 버릇을 절망 속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공표한 목표 자체를 파괴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지속되는 것 말고는 봉사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라? 저는 사회주의를 일종의 태도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류의] 지혜와 인간성이 들어 있다고 보지요. 만약 그러한 믿음을 진작 포기했다면(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또 '사회주의'를 입장, 태도, 지도 원리가 아니라 사회의 유형, 특수한 설계, 특정한 모델의 사회 질서로 바라본다면(그렇게 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만) 그럴 수도 있겠지요. 사회주의는 제게 불평등과 불의, 억압, 차별, 모욕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부정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을 의미합니다. '사회주의적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저 모든 잔인무도함에 반대하고, 그에 맞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말입니다. 어떤 이름으로 영구화되고 희생자가 누구건 말이죠. 


그러면 '자본주의'는? 최근의 ― 당신의 생생한 표현을 빌리자면 ― '금융 쓰나미'가 '현재의 번영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신기루를 위안 삼아오다 보니, 자본주의 시장과 자본주의적 은행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라는 신념으로 무장하게 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합리적 의심'을 넘어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만약 그럴 수 있다면 말이죠!)가 아니라 문제를 만들어낼 때가 최고의 상태라는 점입니다. 자, 괴델의 유명한 정리를 볼까요? 그에 따르면 자연수를 가진 모든 체계가 그렇듯이 자본주의는 정합적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원리와 관련해 정합적일 수 있으려면 체계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지요. 그것들을 해결하려면 그러한 체계의 토대를 이루는 가정들과 관련해 비정합성에 빠지지 않을 수 없지요.


괴델이 그러한 정리를 제시하기 훨씬 전에 이미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적 축적'에 대한 연구서를 쓴 바 있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 또는 '전자본주의' 경제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자본주의는, '처녀지'가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팽창과 착취에 열려 있는 한에서만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작으로 위장한 채 착취를 일삼게 되면 자본주의는 그러한 땅으로부터 전자본주의적 처녀성을 박탈하며, 따라서 미래의 양분의 공급을 줄여버립니다. 자본주의는 ―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 본질적으로 기생적인 체제입니다. 모든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숙주로 삼을 수 있는 미착취된 유기체를 발견하는 한, 당분간 번성하겠지만 숙주를 해치지 않을 수가, 그리하여 조만간 번성의, 심지어 생존 조건을 파괴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이국적 대륙들의 전현대적 토지가 자본주의가 수명을 연장하고 번영의 연속적인 시간 폭을 늘리기 위해 기생하는 유일한 잠재적 '숙주'가 아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제국주의와 영토 정복이 미친 듯이 날뛰던 시대에 글을 썼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럴 수도 없었지요.


약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의 힘은, 앞서 착취한 종이 지상에서 희소해지고 멸종될 때마다 새로운 종류의 숙주를 찾고 발견해내는(실로 생산해내는) 놀랍도록 기발한 재주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새로운 방목지의 특이한 성격에 재적응하기 위해 바이러스 같은 방편도 이용하며, 속도 또한 얼마나 재빠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금융위기'는 자본주의의 종말의 신호가 아닙니다. ― 단지 최근의 방목지가 고갈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지요.」*


15/08/15


* 지그문트 바우만, & 시트랄리 로비로사-마드라조. (2014).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몸도 마음도 저당 잡히는 시대. (조형준, Trans.).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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