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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류와 함께 죽을 것이다 본문
「개인적으로 저는 종교를 인간의 불충분함의 공표/선언으로 해석하는 친애하는 저의 친구 콜라코프스키의 입장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싶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괴델의 정리(체계는 일관된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체계 자체의 원리들이 일관된다면 체계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체계 자체의 토대를 이루는 가정들이 일관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를 보고 즉각 떠올릴 수 있듯이 인간의 함께함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거나 해결할 수 없는, 또는 양쪽 모두인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러한 문제들에 직면하면 인간의 논리는 허둥대다 허물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찾아낸 비합리성들은 인간의 이성의 거친 틀에 맞게 조절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의 함께함은 그러한 문제들을 인간사의 영역으로부터 잘라내 인간의 사유와 행동에는 접근불가능한 것으로 인정된 영역들로 보내버리죠. 그런데 박식한 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것은 종교에 득보다는 실이라는 콜라코프스키의 지적이 정확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논리를 제공하기 위해 인간은 전문적인 기술자들과 공인된 상담 전문가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논리학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적 때문에 신을 필요로 합니다. 신의 투명성과 일상적 모습 때문이 아니라 불가사의함과 예견 불가능성 때문에 말이죠. 사건들의 흐름(단지 미래의 흐름뿐만 아니라 셰스토프Leon Shestov가 주장하는대로 과거, '이미 끝난 일'의 흐름까지도)을 뒤집어버릴 수 있는 신의 능력 때문에 말이죠. 사물들의 질서에 노예적으로 복종하는 대신 ― 인간은 그렇게 하도록 강요되며, 또 대부분의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렇게 하고 있지요 ― 그것을 한 켠으로 밀어젖힐 수 있는 신의 능력 때문에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와 행동 능력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저 모든 무시무시한, 겉보기로는 감각이 없고 말이 없는 맹목적 힘들을 설명하고, 바라기로는 길들이고 순치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히 말해 저는 (이처럼 특수한) 환상의 미래는 인간적 불확실성의 미래와 뒤엉켜있다고 믿습니다. 즉 (길들일 수 없는 자연 세계에 내던져져 있으며 그에 의존하고 있는 인류라는 종 전체의 안전 및 힘과 관련된) 집단적 불확실성과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인간들로 구성된, 그리고 인간들로 만들어지고 관리되는 주거 환경 속에 내던져져 있으며 그에 의존하는 개인의 안전과 관련된) 개인적 불확실성 말입니다. 이 두 종류의 불확실성을 정복하려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노력들이 실패하고 지속적으로 패배를 맛보는 가운데 인류는 계속 '환상'에 기대게 될 것입니다. 우주 속에서의 인류의 외로움, 최고법원과 집행 권력의 부재는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그대로 견디기에는 너무나 무시무시합니다. 저는 신은 인류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 순간도 전에 죽지 않을 것입니다.」*
15/08/23
* 지그문트 바우만, & 시트랄리 로비로사-마드라조. (2014).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몸도 마음도 저당 잡히는 시대. (조형준, Trans.). 새물결.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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