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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아무튼 저널리스트는 일종의 아웃사이더 계층에 속하며, 가 이 계층에 대해 내리는 사회적 평가는 항상 이 계층의 윤리적으로 열등한 대표자들을 기준으로 내려집니다. 그래서 저널리스트 및 이들의 일에 대해서 온갖 이상야릇한 생각들이 퍼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훌륭한 저널리스트적 업적은 어떤 학문적 업적 못지 않게 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저널리스트의 기사는 지시에 따라 즉시 작성되어야만 하며, 또 즉시 영향력을 발휘해야만 하기 때문에 재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학자와는 전혀 다른 집필의 조건하에서 말입니다. 저널리스트의 책임은 학자의 책임보다 훨씬 더 크며 모든 성실한 저널리스트의 책임감 역시 평균적으로는 학자의 책임감보다 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
「그렇지만 매우 포괄적인 이런 문제들에 관한 논의는 이 정도로 해둡시다. 그런데 우리 젊은이들 중의 일부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에 대해서 라고 대응한다면, 이들은 교수에게서 교수로서의 자질과는 다른 어떤 것을 찾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교수가 아니라 지도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교수로서만 강단에 섭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별개의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와 지도자가 별개라는 것은 쉽게 여러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여러분! 여러분은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 지도자 자질을 요구하면서 우리의 강의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100명의 교수 중 99명은 결코 스스로를 인생의 축구명장, 또는 삶의 영위 문제에 대한 라고 여기고 있지 않으며, 또 그래서도 안 ..
「진실로 된 예술품은 능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낡아 버리지도 않습니다. 개개인은 이러한 완성된 예술품의 의의를 각각 다르게 평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술적 의미에서 진실로 된 작품이 다른 하나의, 역시 된 작품에 의해 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학문에서는 자기가 연구한 것이 10년, 20년, 50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돼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학문연구의 운명이며 더 나아가 학문연구의 목표입니다. 학문은, 똑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그 밖의 모든 문화요소들의 경우와는 다른 매우 독특한 의미에서 이 운명과 목표에 예속되고 내맡겨져 있습니다. 학문상의 모든 는 새로운 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는 되고 낡아버리기를 원합니다. 학문에 ..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학문영역에서는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치고 자기 일에, 그리고 오로지 자기 일에만 헌신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한 예술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괴테같이 위대한 인물에 있어서 마저도 감히 자기의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도는 최소한 그의 예술에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물론 [괴테의 예술에 대한] 이런 평가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괴테 정도는 되어야 감히 그런 시도나마 해볼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 수천 년만에 한 번 나타나는 괴테 같은 인물마저도 이 시도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만은 누구나 인정할..
「그런데 이러한 시인의 소명이 사회학자의 소명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학자들은 시를 거의 쓰지 않는다(우리 중에는 직업상의 일들로부터 안식년을 내어 글을 쓸 시간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가짜 시인'처럼 되는 것이 싫거나 '가짜 사회학자'가 되는 게 화가 난다면, 우리 역시 숨어 있는 인간의 가능성들을 발굴하는 진짜 시인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명백하고 자명한 진실들의 벽, 오늘날 지배적인 어떤 이데올로기가 그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지배의 합당함을 입증 받는다면,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벽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한 벽들을 허무는 것은 시인의 소명일 뿐 아니라 사회학자의 소명이기도 하다. 가능성들 앞에 ..
「오늘날 진실로 결정적이며 유용한 업적은 항상 전문적 업적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 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
「만약 여러분이 '실제 세계'의 진실을 찾고자 한다면, 카프카, 무질, 보르헤스, 페렉, 쿤데라, 우엘벡 등에게서 힌트를 얻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겁니다. 실험관 속에서 배양되고 길러진 소인들(homunculi)의 불확실한 가정들로 가득 찬 '지식'은 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고자 한다면, 자신만의 메시지를 갖고 말을 건네야 합니다. 독자들이란 '세계-내-존재'로서 자신만의 삶의 진리를 찾고자 애쓰며, 세상으로부터 숨겨진 혹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간과했거나 무시하고 지나쳤던 통찰들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지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적확한 언어를 찾는 것이며, 그 경험과 관련이 있거나 유사한 주제들에 천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 그리고 파슨스 등으로 대표되는 정통 사회과학 전통에서 일상행위자들은 자기 자신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따라서 자신들의 잘못된 인식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세계의 작동방식에 대해서 그들보다도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론사회과학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고 가정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히 이론가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한 인식능력이 사회과학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했다. 즉, 이들은 만일 사회과학자들이 이러한 우월한 인식능력을 잃어버린다면, 사회과학적 지식은 단순한 상식 수준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과학 전통에 따르면, 오직 이론가들만이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일상행위자들은 꿰뚫어볼 수 없는..
아래는 김경만이 UC 버클리의 사회학자 로익 바캉 교수와 나눈 서신 논쟁의 일부. 「To. 로익 바캉 부르디외의 장이론은 우리 사회과학자들도 인식론적으로 등가인 수많은 문화생산 게임 중 하나를 하고 있을 뿐임을 논리적으로 암시한다고 주장한다면 너무 지나칠까요? 물론, 당신은 우리 사회과학자들은 "옳은" 이론과 경험적 사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얘기하겠지요.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지점입니다. 나는 요즘 장 분석을 활용해서 한창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비록 경제학은 과학장의 요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부르디외가 이상적으로 상정한 자연과학 모형에 가장 가깝지만, 경험적 타당성의 측면에서 평가할 때 완벽한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경만. 2008.09.01」* 15/07/27 ..
「학자는 가난을 근심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즐길 수가 있다. 부유함을 즐거움으로 삼지 않아야만 비로소 예를 좋아할 수 있다. 그래야만 곧바로 학자가 덕에 가득 차고 도를 즐겨서 빈부를 빈부로 의식하지 않음을 볼 수 있게 된다. 생각건대 가난해도 도를 즐겼던 이는 안회가 바로 그 사람이다.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했던 이는 주공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나 가난해도 도를 즐기는 사람은 그대로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가난해도 도를 즐기는 사람이다. 양자는 따로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지가 바뀌면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14/12/25 * 이토 진사이, 이토 진사이
수신(修身) 혹은 수양(修養)을 철학의 중심 과제로 늘 꽉 부여잡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동양의 종교나 철학 전통의 위대함이다. 동양의 전통에서 형이상학은 단지 지식으로 알아할 과제가 아니라 몸으로 증득하고 체험하고 검증해야 할 과제였다. 공자가 말했듯이,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로다. 「'철학'의 외양을 한 필로소피가 등장함으로써 전통유학이나 불교는 때 아니게 정체성을 의심 받고, 정당성을 도전 받게 되었다. 논리와 체계로 무장한 철학은 묻는다. "얘야, 유교는 일상의 조언들로 가득 차 있던데, 그건 철학이냐, 잠언집이냐." 그리고 유일신의 초월성을 등에 업은 '종교'는 묻는다. "불교야, 너는 무신론 같기도 하고, 다신론 같기도 한데, 너를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
「21세기에 가능한 근대성 이론? '근대성modernity'이란 포스트모던의 파도가 이미 지워버린 모래 위의 얼굴이 아니었던가? 한때 유행했으나 이제는 한물간 개념, 트렌드 아닌가? 그런데 무슨 근대성 이론인가, 그것도 21세기에. 지적 유행에 민감한 어느 세련된 식자들은 물을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조변석개하는 표면의 파도가 아니라 천 년 단위로 변하는 깊은 바다 속 해류를 본다. 포스트모던의 파도가 지우려고 했던 것은 서구의 세계 지배 기획으로서의 근대성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근대성의 자기비판이었다.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자기 시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고,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의 비판성은 지극히 근대적이었다. 문제는 그 사조의 충격 속에서 잃어버린 역사 감각이었다. 끝난 것..
「‘~에 관한 논문’을 쓰려면 지금까지 축적된 엄청난 양의 쓰레기 더미 같은 연구들을 파헤쳐야 한다. 이류, 삼류 논문을 계속 읽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고 나서야 마침내 ‘칸트의 ○○○에 관해’라는 논문을 자비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피땀 어린 노력은 대부분 단순한 ‘정리’에 불과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자. 설령 논문이 미미하나마 새바람을 일으킨다고 해도 이미 어마어마한 시간을 칸트 연구에 쏟아부었고, 두뇌는 ‘칸트화’되었으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칸트 업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점점 더 좁은 포장마차에서 칸트 부침개나 칸트 만두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려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칸트 학자는 대부분 - 쓸모없는 논문이나 메모까지 포함해서 - 칸트가 쓴 책 전부와 칸트와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