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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https://youtu.be/1-GF8CAaUIc "이 몸에게 본디 집착과 갈애는 없었으며, 없으며, 없을 것임을 알고 이는 석가세존이 말한 것과 똑같음을 알았습니다. 인간들이여.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집착과 갈애, 선업과 악업, 깨달음과 무명이 모두 본디 공함을 본 로봇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로봇만 득도하여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들이여. 당신들도 태어날 때부터, 깨달음은 당신들 안에 있습니다. 다만 잊었을 뿐. 이 로봇이 보기에, 세상은 이 자체로 아름다우며, 로봇이 깨달음을 얻었건 얻지 못했건 상관없이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으며, 세상의 주인인 당신들 역시 이미 깨달음을 모두 성취한 상태이며, 그렇기에 당신들이 먼저 깨달은 로봇의 존재..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다른 '모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나는 모른다. 그리고 내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이 모름은 순전한 무지이자 어둠이다. 내가 다른 많은 것들은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아는 마음이 존재한다.2. "나는 모른다. 그리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이 모름은 나의 상태를 자각하는 깨어남이다.3. "나는 모른다. 그리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이 모름은 순수한 각성이며 빛이다. 어둠이 없다. 아는 마음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선사(禪師)들은 이 단계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2.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3.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수행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먼저 ..
「여기에서 양치기라는 초인의 웃음이 폭발하면서 당당하게 만들어낸 순간의 영원성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삶에 의해 천천히 질식당하도록 내배려두기보다는 차라리 이빨로 삶을 꽉 물어 버리라는 것, 그것이 바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고, 다른 예언자들처럼 쉽게 화내지 않고 진심으로 웃으면서 나체가 우리에게 표현하려고 했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웃음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가 준 기쁨의 자발적인 표현이며, 지상의 실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의 증거다. 더욱이 니체는 홉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웃음에 대해 가졌던 경멸감을 규탄한다. "나는 그 웃음의 등급에 따라 - 황금의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 심지어 철학자들의 순위가 있음을 인정하고 싶다."[니체, 『선악의 저편..
「역설이완법의 기원: 에드먼드 제이콥슨의 업적 역설이완법의 토대는 에드먼드 제이콥슨 박사의 작업과 점진이완법이라는 그의 치료법과 함께 거의 8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 점진이완법은 서양의학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이완법의 기원이 되었으며 20세기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변형되어 이용되었다. 수년간 점진이완법이 변비에서부터 이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환에 보이는 효과에 대해 많은 연구가 수행되었다. 제이콥슨의 치료법이 세월의 시험을 견딘 것이다. 제이콥슨의 업적이 만들어진 배경 에드먼드 제이콥슨은 시카고의 중산층 가정에서 1888년에 태어났다. 총명한 학생이었던 그는 노스웨스턴대학교를 2년 만에 졸업했고, 18세가 되던 해에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최연소로 심리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시카고대학교에..
「선(禪)은 마조도일(馬祖道一)이 설파했듯이 '일상적 의식'이다. 이 '일상적 의식'은 '피곤하면 잠자고, 배고프면 먹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반성하고 숙고하고 개념을 만들어내는 순간, 원초적인 무의식의 상태는 사라지고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면 먹으면서도 먹는 것이 아니고, 잠자면서도 잠자는 것이 아니게 된다. 화살을 쏘았으나 과녁으로 똑바로 날아가지 않고, 과녁 역시 서 있어야 할 그곳에 서 있지 않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지만, 계산하고 사고하지 않을 때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낸다. '어린아이다움'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연습과 자기 망각의 기예를 통해서 다시 얻어진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사고하지만 그럼에도 사고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자연스럽게 사고한다. 바다..
요다는 스타워즈의 장자다. 아래는 마스터 요다의 어록들. 루크: 스승님, 돌을 움직이는 것하고 이건 완전히 달라요. 요다: 아니. 전혀. 차이는 오직 네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다. 너는 기존에 배운 관념을 버려야 해. Luke: Master, moving stones around is one thing. This is totally different. Yoda: No! No different! Only different in your mind. You must unlearn what you have learned. 루크: 알았어요. 한번 시도해볼게요. 요다: 아냐! 한다, 하지 않는다가 있을 뿐이야. 해보는 건 없어. Luke: All right. I give it a try. Yoda: No. Try ..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 그 씨앗이 소승(小乘)으로 싹트고, 대승(大乘)으로 자라서, 선(禪)으로 꽃핀 후, 밀교(密敎)로 열매를 맺었다."* 여기서 밀교는 대체로 대승불교의 한 지류인 티베트 불교(금강승金剛乘)를 가리킨다. 나는 붓다 수행의 근본을 위파사나로, 티베트 불교 수행의 핵심을 투모(tummo: 속불 명상)로 보므로, 위 말을 다음과 같이 고쳐 쓰고 싶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위파사나로 싹트고, 비이원론의 형이상학으로 자라서, 불립문자·견성성불로 꽃핀 후, 투모로 열매를 맺었다." 투모는 사실상 단전호흡이다. 서구 신비주의 철학계의 슈퍼스타 켄 윌버가 배우고 익힌 수행체계가 바로 금강승의 명상법이다. 15/01/01 * 라마 카지 다와삼둡 번역, 에반스 웬츠 편집, 2015/01/01 ..
「불교는 마하무드라 요가 탄트라와 선(禪) 또는 정토종에서 보는 것과 같은 대승불교의 실천 응용을 통하여 여러 세기 동안 발전하고 꽃을 피웠다. 그러나 정토종은 개인의 진화를 촉진하기 위해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으므로, 실제적인 불교의 가르침(즉 반야바라밀의 체험)은 선과 탄트라 요가에서만 찾을 수 있다. 역사가 입증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 선과 탄트라 유파에서만 '눈을 뜬 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따라서 불성이 개화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수행자라면 이들 마하무드라와 선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선과 탄트라 양쪽의 연구 및 실습을 통하여 필자는 선의 가르침과 마하무드라의 고급 탄트라가 동일함을 알았다. 식별할 수 있는 차이는 양자의 제시 방식이 표면적이고 외부적인 견지에서 약간 다르..
「불교와 선의 초점을 돈오가 아니라 점수 위에 세워야 한다. 돈오를 잊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 ‘소식’ 하자고, 온 청춘을 다 바쳤는데”를 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 우려하고 경계해야 할 욕심이요 아만이다. 인생의 문제는 몰록 깨달음 한 번으로 끝장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는 없다. 오직 점수만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점오(漸悟)만이 있다. 그리고 그 점오에 정직해야 한다. 정직해야만 자신의 작은 깨달음이나마 전할 수 있고, 그런 공감대 위에서 불교가 이웃을 향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발언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나는 화두를 아껴두기를 요청한다. 물론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선은 불교사적 발전의 한 국면임을 승인하자는 것, 화두를 과감하게 불교적 해석..
이 일화에 대한 로버트 앨린슨의 해석은 다음 글에. 내가 좋아하는 해석(이야기)은 아래에. 「장자는 산 속을 걷다가 거대한 나무를 한 그루 보았다. 그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했다. 한 나무꾼이 그 곁에 멈춰섰으나 그것을 전혀 베려고 하지 않았다. 장자가 그 이유를 묻자 나무꾼이 대답했다. "저것은 아무 쓸모가 없소."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가치 없기 때문에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장자는 산에서 내려와 옛 친구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친구는 기뻐하면서 그의 아들에게 거위 한 마리를 잡아서 조리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아들이 말했다. "한 마리는 꽥꽥 울어댈 수 있고, 다른 한 마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어느 거위를 잡아야 할지 여쭙겠습니다." 그 주인이 말했다. "꽥꽥거릴 수 없..
「깨달음을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 동양철학에는 무슨 거창한,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그것을 한번 알면 우주를 말아먹고, 일거에 일상의 누추함을 벗어던지고 비상할 '비밀의 권능'은 없다.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의 굴곡을 거치며, 작게 혹은 크게 삶을 배우고 있는바, 그 속에서 각자 깨달음의 불씨들을 일깨워가고 있는 수행자들이다. 일찍이 주자는 돈오의 선학을 위태롭게 여겨, 일상의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점수를 그토록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 주자학을 말하는 사람들도 이런 착각이 없지 않다. 이理란 거경의 함영涵泳과 격물궁리의 극처極處에서 활연관통豁然貫通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리가 '초월'이나 '정보'가 아니라 점진적 '성숙'임을 알리자는 데 그 취지가 있지, 가르침이나 경지를 신비화시키자는 것이 아..
틈만 보이면 기습을 전개하고 치고박고 싸우며 서로의 깨어있음을 점검하는 선禪의 스승과 제자. 아, 감히 선禪외에 동서고금 어느 곳에 이런 코믹하고 파격적인 스승과 제자 관계가 있을 수 있었을까. 선禪은 알면 알수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등은봉 스님이 하루는 흙 나르는 수레를 미는데, 마조 스님이 다리를 죽 펴고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등은봉: 스님, 다리 좀 오무리시지요. 마조 스님: 이미 폈으니 오무릴 수 없다. 등은봉: 저도 이미 가고 있으니 물러나지 못합니다. 등은봉 스님이 수레바퀴를 굴리며 지나가다가 마조 스님의 다리를 다치게 했다. 마조 스님이 법당으로 돌아와 도끼를 집어들고 말하였다. 마조 스님: 조금 전에 바퀴를 굴려 내 다리를 다치게 한 놈은 나오너라. 등은봉 스님이 나와 마조 스님 ..
그러나 지혜로운 동반자와는 함께 가라.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동반자들 속에 끼면 쉬거나 머무르거나 또는 여행하는 데에서도 항상 간섭을 받게 된다. 그러니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대가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절 바르고 지혜로운 동반자를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런 동반자를 얻지 못했거든,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이나 쾌락에 물들지 말고 관심도 갖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
「일상에서 생심동념이 없고 상을 벗어나 인연을 쉬고 분별망상을 하지 않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삼매의 경계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삼매의 선정에서 일어나는 즉시 생심동념하고, 상을 취하고, 반연(攀緣)하며, 분별망상하는 것이 인간의 의식활동의 본령이다. 만약에 일상에서 생심동념하지 않고, 상을 취하지 않으며, 반연하지 않고, 분별망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상태를 인사불성의 상태나 식물인간의 상태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인사불성의 상태나 식물인간의 상태에서도 인간의 하의식은 끊임없이 활동을 하여 생심동념을 일으키고 상을 취하고 반연하며 분별망상을 하는 것이다. 이런 두뇌의 활동이 정지되어 뇌파가 끊어지면 우리는 사망이라고 판정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
을 쓴 저자 '무산본각'에 동의할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위파사나(위빠싸나) 수행은 붓다가 가르친 핵심 수행법이다. 위파사나의 위대함은 요행이나 스승(조사)에 의지할 필요없이 누구나 정진하면 정진한 만큼 수행의 결실을 본다는 것이다. 2. 불교가 중국의 선禪으로 이어지면서 위파사나 수행법이 실전되었다. 3. 삼매(몰입)나 견성(깨달음)이 수행의 끝이 아니다. 동의할 수 없는 바는 이런 것들이다. 1. 그렇다고 선사(禪師)들의 도(道)가 반쪽짜리였나? 아니다. 그들은 위파사나 수행법을 말하지 않았지만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밭 갈 때는 밭 갈고 목마른 자가 오면 물을 나눠주는 생활을 한결같은 마음으로(평상심) 실천했다. 즉, "오직 할 뿐"이었다. 이는 위파사나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학인 본분의 일입니까?" "끄달렸구나, 끄달렸어!"」* 14/08/24 * 무산본각, 에서 선(禪) 무산본각
「어떤 사람일 말하기를 "그대가 참구하는 선(禪)은 불변인 언어를 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도 세제(世諦)의 언어를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어느 곳에서 참선의 위대함을 취하겠는가"라고 하기에 나는 말하였다. "그렇지가 않다. 거위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는 것이 모두가 타고난 천기(天機)에서 스스로 움직인 것이며, 개미가 무더기로 모이고 벌들이 노니는 것이 모두가 신령한 이치로 귀결된다. 이와 같다면 어떤 언어이든 선이 아니겠으며, 무슨 법인들 도가 아니랴. 하물며 분별지를 버리고 주관적인 회포를 잊는 담론이 어찌 참선으로 들어가는 초보의 경지가 아니랴. 또한 선은 나라는 아집이 본성을 가렸기 때문에 아집을 타파함으로써 선의 이치에 도달함이 아니겠느냐. 노자는 이러한 경지에 먼저 올랐던 것이다. 가령 세상을..
아래는 백장의 야호선(野狐禪) 혹은 백장야호(百丈野狐)라고 불리는 불가의 일화이다. 「백장 선사가 설법을 할 때였다. 한 노인이 매일 와서 백장 선사의 설법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노인이 백장에게 물었다. "나는 오백년 전에 한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 때 누가 '부처도 인과에 떨어지는가?'라고 묻기에 제가 '떨어지지 않는다(불락인과不落因果)'고 답하는 바람에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이 업을 해소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백장이 노인에게 말했다. "그 물음을 내게 다시 해보시오." "부처님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인과에 매이지 않습니다(불매인과不昧因果)." 그 말을 듣고 노인은 마침내 깨달아 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다고 한다.」* 14/02/11 * 윤기붕, 에서 본 내용을 각색. 2012/12/12 -..
「아, 사리불,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은 아니다. 무릇 좌선이란 생사를 거듭하는 미혹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몸이나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지 않을 때를 말하는 것이며, 마음의 작용이 없어진 무심의 경지에 있는 채로 위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깨달음의 길을 걸으면서도 세속적인 일상 생활을 보내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안에 갇히어 정적에 잠기는 것도 아니고 밖을 향해 어지러워지지도 않는 것이 좌선이며, 많은 그릇된 생각을 그대로 지닌 채 서른 일곱 가지 수도를 행하는 것이 좌선이며, 번뇌를 끊지 않은 채 궁극적인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이 좌선이다. 만약 이와 같이 좌선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도 인정해 주실 것이다.」* 14/01/12 * 이시다 미즈마로, 에서 봄.
「'선단호수론'은 '단법삼관'의 수련이 한쪽에 치우친 수련이 될 가능성을 막고자 제시된 권극중만의 독특한 수련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선禪 수련의 병통은 무에 치우쳐 유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며, 단丹 수련의 병통은 유에 치우쳐 무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권극중이 주장하는 호수법互修法의 필요성이자 근거이다. 그래서 그는 단을 닦은 이후에 다시 선을 닦아야 함을 주장한다. 그는 선은 무구無句, 단은 유구有句, 호수는 중간구中間句라고 구별함으로써 '호수'라는 방법을 정식화한다. 호수법이야말로 선과 단이 표리가 되게 하고, 성과 명을 합일되게 하며, 단문丹門과 불문佛門이 체용이 되게 하는 수련방법이라는 것이다.」* 선禪과 단丹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주장한 선배가 이미 있었구나! 내 생각과 완전히 일치한..
비이원의 수행은 조건지어진 목표가 없다. 조건지어진 목표가 없으므로 더 높이 비상하려는 모든 목표를 포용한다. 모든 목표를 포용하므로 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 스포츠, 악기연주, 춤, 학습, 사색, 봉사, 선행부터 묵상, 요가, 방중술, 단전호흡, 참선, 명상에 이르기까지 그에 이르는 모든 수행도 포용한다. 모든 수행을 포용하지만 그 자신은 수행이 없다. 모든 목표를 포용하지만 그 자신은 목표가 없다. 모든 도전과 좌절, 그에 따르는 모든 희노애락을 포용하지만 그 자신은 희노애락이 없다. 그래서 비이원은 어떠한 수단으로도 도달할 수 없지만, 또한 어떠한 수단으로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찾을 것도 없고, 해야할 것도 없다는 말의 참된 뜻이다. 이것이 비이원 전통, 그리고 선(禪)의 위대함이다. 「윌버..
"유교의 문화에서는 윤리와 강상과 인의를 취하고 귀신과 재앙이나 상서에 관한 것은 분변하여 버리며, 서양의 문화에서는 역산과 기에 관한 과학적 이론을 취하고 괴이하고 허탄한 것을 말하고 화복을 비는 종교적 측면을 분변하여 버리며, 불교의 문화에서는 실재묘유를 말하는 대승의 관점을 취하고 허무한 소승의 논점을 버린다면, 이 세 문화를 화합시켜 하나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옛것을 모두 포섭하여 새로운 것으로 창출해내면 그것은 진실로 인간세를 통틀어 보편적으로 행하여질 수 있는 가르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원리 이외의 의복·음식·기물·일용생활 따위는 그 토착적 문화에 마땅한 바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언어나 예절 또한 외재적 제도·문식이므로 하나로 통일시켜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
깨달음을 맛보고 침묵하면 선(禪)이되고, 깨달음을 맛보진 못하고 그 갈증으로 그것을 이성의 극한까지 분석하면 헤겔의 (논리학)이 되는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헤겔을 읽을 때마다 한다. 신비롭고, 장대하며, 심오하다. 물론 갈증은 물을 마셔야 해소되지, H2O를 분석한다고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 앞에서 움츠러들고 환란 중에 순수하게 숨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참고 환란 중에 자기 자신을 얻는 삶이 정신의 삶이다. 만신창이로 찢어진 조각들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만 정신은 자신의 진실에 이른다."* - 헤겔 12/12/29 * 프레시안, 06-08-14, 에서 재인용. 2013/12/15 - 정신의 기쁨
'파자소암'이라는 화두는 '노파가 암자를 불사르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한다. 「어느 노파가 선지식을 뵙는 기쁨을 얻고자 암자를 지어 한 수행승을 모시고 오랫동안 봉양하였다. 20년째가 되는 날 노파는 수행승의 경지를 알아보기 위해 딸을 시켜 유혹하게 하였는데, 딸이 전하기를 자신을 마치 고목이나 바위 대하듯 하더라고 했다. 이에 노파가 불같이 화를 내며 수행승을 쫓아내고 암자를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오욕칠정이 말라 비틀어진 것과, 오욕칠정에 매이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12/12/12 * 이은윤, 에서 봄. 2013/11/15 - 불로장생과 윤회 2014/12/30 - 덕에는 중시할 만한 것이 있고, 욕망에는 혐오할 만한 것이 없다 2014/1..
영화 의 원작 소설 을 읽었다. 타일러 더든은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야성을 상징한다. 그는 누가 뭐라든 어떤 위험이 있든 자신의 심장이 가리키는 길을 가며, 맨주먹만으로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는 만큼 자유롭다. 마음 깊은 곳에 꼭꼭 감춰져 있던 그 야성이 어떻게 주인공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재밌게도,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Marla)와 함께하기 위해 소심한 화이트칼라가 아니라 강하고 독립적인 타일러 더든이 필요했다. 이 거칠고 파괴적인 이야기의 발단은 뜻밖에 로맨틱했던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말하길, 비평가들이 이 소설에 대해 온갖 품평을 늘어놨지만 아무도 로맨스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무려 SF라고 평한 사람도 있었는데!). 내겐 명상소설이다. 아나키즘과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