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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만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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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은 마조도일(馬祖道一)이 설파했듯이 '일상적 의식'이다. 이 '일상적 의식'은 '피곤하면 잠자고, 배고프면 먹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반성하고 숙고하고 개념을 만들어내는 순간, 원초적인 무의식의 상태는 사라지고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면 먹으면서도 먹는 것이 아니고, 잠자면서도 잠자는 것이 아니게 된다. 화살을 쏘았으나 과녁으로 똑바로 날아가지 않고, 과녁 역시 서 있어야 할 그곳에 서 있지 않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지만, 계산하고 사고하지 않을 때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낸다. '어린아이다움'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연습과 자기 망각의 기예를 통해서 다시 얻어진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사고하지만 그럼에도 사고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자연스럽게 사고한다. 바다 위에서 철썩이는 파도처럼 자연스럽게 사고한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처럼 자연스럽게 사고한다. 따스한 봄바람에 움트는 푸른 새순들처럼 사고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자신이 바로 비요, 바다요, 별이며, 새순이다. 한 인간이 이런 '정신적' 발전 단계에 도달했다면, 그는 '인생의 선'에 있어 대가(大家, Meister)이다. 그는 화가처럼 화폭과 붓과 물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궁사처럼 활과 화살과 과녁 등의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팔다리와 몸통 그리고 머리를 가지고 있다. 선의 삶은 이 모든 '도구'들을 통해서 표현된다. 이 도구들은 그의 삶을 밖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형식들이다. 그의 손과 발이 붓이며, 전 우주가 화폭이다. 그는 이 화폭 위에 70년 또는 80년 또는 90년 동안 자신의 삶을 그린다. 이 그림이 '역사'이다.」*


- 스즈키 다이세츠


15/02/13


* 오이겐 헤리겔, <마음을 쏘다,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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