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꿈으로 가는 열쇠| '실버 키' by 러브크래프트 본문
"랜돌프 카터는 서른 살 때, 꿈으로 가는 관문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그전까지 그는 밤마다 우주 너머의 기이한 고대 도시와 영묘한 바다 건너 펼쳐진 그림처럼 아름다운 땅을 여행하며 지루한 일상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년의 고단한 삶에 짓눌리면서, 차츰 그 같은 자유를 빼았기다가 마침내 환상의 세계와는 완전히 담을 쌓게 되었다. 더 이상 그의 갤리선은 오크라노스 강을 따라 트란의 산봉우리 사이를 미끄러지듯 항해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결무늬 상아 기둥으로 세워진 전설의 궁전이 달빛 아래 아름답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는 클레드의 향긋한 밀림 사이로 코끼리를 탄 카라반이 힘차게 행진하는 일도 없었다."
"랜돌프 카터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마음씨 좋은 철학자들은 그에게 사물의 논리적인 연관성을 살피고, 생각과 환상을 구분하고 분석하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경이로움은 사라졌으며, 인생은 머릿속에 있는 그림의 조합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실재하는 것을 존중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렀기에, 그는 자신이 환상에 빠져 있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현자들은 그의 순수한 환상이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 것인지 충고하면서, 맹목적인 우주가 무에서 유로, 다시 유에서 무로 아무 목적도 없이 흘러갈 뿐 어둠 속에서 잠시 명멸하는 인간의 소망이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이해도 없는데, 환상을 통해 완전한 의미니 목적이니 하는 몽상에 잠겨 있으니 얼마나 터무니없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들은 카터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고, 사물의 이치를 설명함으로써 세상에는 신비로울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카터가 불평하면서, 기적을 통해서 모든 것이 생동감을 얻고 숨 막히게 아름다운 광경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황혼의 왕국으로 가기를 갈망하자, 그들은 새로이 발견된 과학의 위대함을 알려주며, 원자 운동과 대기의 특징에서 경이와 신비를 발견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카터가 이미 익숙해져 새로울 것이 없는 문명의 이기 속에서 아무런 매력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은 카터의 상상력이 메마르고 인간의 실제적인 창조물보다 몽환의 환영을 더 좋아하므로 철이 없다고 말했다."
"속박의 생활을 시작할 즈음에는 조언자들을 의심 없이 믿고 따랐던 카터였기에 종교에 의지한 적이 있었다. 일상의 탈출구를 기대하며 신화의 세계에 관심을 둔 것도 그쯤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필수록, 상상력과 아름다움이 결핍된 신화는 진부하고 무미건조했을 뿐 아니라, 확고한 진실 운운하는 학자연한 엄숙함과 괴변들이 대부분의 신화학자들 사이에 넌덜머리 날 정도로 만연돼 있음을 깨달았다."
"카터는 그 같은 현대의 자유를 깊이 맛볼 수 없었다. 그 천박함과 불결함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시들게 하고, 그들 스스로 배척했다는 우상에서 두려움만 따로 떼어 내어 야만적인 충동을 겉치장하는 수단으로 삼는 등 그들의 허약한 논리에도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버림받은 성직자의 권위를 그대로 차용하고, 인간에게 꿈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삶은 의미로 충만하다는 착각을 버리지 못했다. 더구나 과학적 발견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의 본성은 질식당하고 비인간적인 부덕에 비명을 지르는 상황이건만, 그들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초월한 윤리와 의무만 강조하는 포악한 생각을 고집했다. 정의, 자유, 일관성이라는 잠재된 미망에 뒤틀리고 더욱 완고해진 그들은 오랜 신념과 함께 태고의 전설과 방식을 무시하기에 바빴다.
거짓과 위선에 매몰되면서, 그들의 삶은 점점 방향과 극적인 흥미를 잃고 말았다. 결국에는 삶의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요란하고 인위적인 편리성, 소란과 흥분, 야만적인 과시와 동물적 감각에 탐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에서 점점 싫증과 실망을 느끼고 반감과 혐오감이 덧쌓였을 때, 그들은 아이러니와 독설에서 위안을 찾으며 사회 질서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스스로 야만적인 사회 기반이 선조가 창조한 신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유동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일시적인 만족은 곧 재앙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진정한 평화와 꿈속에서만 영원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위안들은, 사람들이 현실을 중시하고 유년의 비밀과 순수를 상실했을 때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다."
"카터는 맨 처음 꿈이 사라졌을 때부터 그만두었던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만족이나 성취감이 없었다. 세속에 물들어 예전에 알았던 아름다운 것들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글쓰기는 황혼녘의 광탑을 무너뜨리고, 개연성을 걱정하는 현실 감각은 환상의 정원에 핀 섬세하고 놀라운 꽃들을 짓밟았다. 위선적인 연민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신파조의 감상에 빠뜨렸고, 인간사의 사실성과 의미가 중요하다는 통념 때문에 그의 드높은 환상은 교활한 우화와 값싼 사회 풍자로 변질되었다. 그렇게 새로 쓴 소설들은 과거 어느 작품보다도 성공을 거두었다. 공허한 집단을 즐겁게 하는 것은 공허함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그는 소설들을 불태우고 절필했다."
참조한 책: H.P. 러브크래프트, 러브크래프트 전집 3권, 정진영 옮김.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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