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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심판자와 형이상학이 없는 시대에 절차적 합리성은 얼마나 합리적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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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심판자와 형이상학이 없는 시대에 절차적 합리성은 얼마나 합리적인가?

모험러

「여러 전문가가 모여 새로운 과학 연구와 기술이 향후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예상하고 민주적인 의사소통 과정을 거쳐 모종의 합의에 이르는 과정과 과학자가 어떤 설명적 가설을 떠올리고 그것을 실험을 통해 입증함으로써 가설을 확증하거나 반증하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달리 말해 수많은 윤리위원회가 제시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윤리적이라기보다는 과학적이다. 왜냐하면 그런 해결 방식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윤리위원회'는 그 이름에서 기대하는 규범성을 절차적 합리성으로 대체하는 조직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우리가 절대적인 규범을 이미 포기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특징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이는 윤리적 규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비판적 논리를 뒤집으면 흥미로운 반전이 드러난다. 보편적 가치 체계에 대한 학문의 거부, 인간 지성의 불완전성의 인정, 절차적 합리성에 의지한 과학적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한 신뢰 등이 형이상학을 거부하게 만들었다면, 그 반대로 그 절차적 합리성이 정말로 차선의 대안인지 물어보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오늘날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또 다른 보편적 규격화는 아닌지를 말이다. 20세기를 지배했던 포스트모던적 사유는 같은 이유에서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그 무엇을 탐색하는 탐구를 의심하는 20세기의 지성은 그 태도를 스스로 절대화했던 것은 아닐까? 


오늘날처럼 고도로 복잡해진 사회에서 파괴적인 힘을 지닌 과학 연구와 기술의 개발에 대해 윤리적인 고려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작용을 예측하기 어려운 과학적 탐구에 대해서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제어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윤리적 요구는 사실상 과학적인 문제 해결 방식을 따르라는 요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은 근대 과학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다시금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과학에 대해 윤리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어떤 이념을 구현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문명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연구들을 제한하는 것뿐이다. 이는 마치 사회공학자들이 위험도가 큰 최선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차선이지만 위험도가 작아서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이 좀더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근대 과학의 문제점을 다시금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따라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이러한 사정은 윤리학이, 혹은 더 넓은 의미에서 철학이나 인문학이 오늘날의 과학에 대해 왜 무기력한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소박하지만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소명을 말한다. 현대의 많은 인문학 지식인들은 아주 세련되게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 체계는 낡은 형이상학이거나 아니면 폭력이 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차이와 관용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대 과학의 방법을 빌려다 쓰라고 권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자기부정이다.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비판적 시선에서 바라보면서 그 대안을 모색할 때는 여전히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연구와 기술 개발에 있어 윤리적 사고의 역할은 우리 시대의 과학기술을 건전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 요구는 시시각각 방향이 변하는 바람을 맞아 돛을 편 배에서 키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착시다. 가야할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방향을 잡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경우는 그 방향으로 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를 만났을 때뿐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 요구는 그래서 일종의 공포에 호소하고 있다. 윤리학이 과학에 대해 제대로 된 키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규범적 가치를 입증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세련된 현대인이라면 알레르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믿는 낡은 형이상학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근대 이후 자연스럽게 전제해온 절차적 합리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증언한다.


종교적 권위와 낡은 신분질서로부터 해방된 근대인들은 낡은 권위를 철폐한 대신 이성을 대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인간 이성이 아주 제한적인 능력만 갖고 있다는 것은 오래지 않아 입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타당한 가치, 혹은 궁극적인 진리는 사실상 공허한 이념에 불과한 듯 보였다. 게다가 섣부르게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가치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역사적 경험은 일체의 형이상학적 태도에 대해 경계심을 높여놓았다. 이렇게 최종심급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은 절차의 공정성과 합리성 뿐이었다. 논의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결과에 도달한 과정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최종 심판자가 없는 시대, 세계에 관해 알게 된 사실이 아니라 그런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말해줄 형이상학이 없는 시대,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학문들이 부딪힌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방향타를 잃어버린 양 우리 문명이 가고 있는 길의 끝이 무엇인지에 대해 불안해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불안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마지막에 기댈 희망을 생각하게 한다. 학문은 결코 신이 우리에게 완성된 제품으로 내어준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의 산물이다. 오늘날의 학문 현실은 이전 과거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마치 데자뷔처럼 과거의 일을 연상시키는 상황들은 새로운 양상의 변화를 요구한다. 만약 정말로 우리가 인간 지성의 불완전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다시 인간 삶을 위한 절대적 가치를 탐구해야 할 기회를 갖게 된다. 다만 과거처럼 오직 자신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될 탐구의 과정 자체를 승인함으로써,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나 그 절대적인 가치를 이념적 지향점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들 속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치를 전제한 세계 설명 모델들 중 어느 것이 살아남을지는 우리 삶의 현실이 답해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런 보편타당한 가치들을 미리부터 포기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형이상학은 낡은 형이상학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열린 가능한 세계들을 탐색할 것을 요구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해서 무의미한 세계일 리 없다. 인간이 학문을 하는 존재인 한, 그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다양한 파생세계를 모델링하게 한다. 그중 적합한 것들은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16/05/27


* 박승억, <학문의 진화: 학문 개념의 변화와 새로운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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