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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작년 늦봄 혹은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제비 부부가 주인집 주위를 계속 맴돌며 집을 지으려 애쓰다가 웬일인지 주인집에 집짓기를 포기하고 별채, 그중에서도 하필 내 방 처마 밑에 집을 지었다. 작은 선행 하나 베풀지 못했건만 제비는 내게 박씨를 물어다 주었고 열린 박 속에는 인연이라는 선물이 꿈인 듯 들어 있었다. 12/03/04
처량한 갈색 땅과 메마른 나뭇가지 그 아래 푸른 생명의 기운, 즐거운 함성 내지르고 천지를 뒤엎으려 차분히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12/03/04
집에 가는 길, 고양이 두 마리가 짜장면 그릇에 코를 박고 냠냠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한 친구는 덤불 뒤에 숨고 한 친구는 먹는 거 처음 보냐는 듯 나를 심드렁하게 쳐다보더니 다시 짜장면을 핥기 시작했다. 누군가 배달시켜 놓고 먹지 않은 듯해 보이는 짜장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덤불 뒤에 숨은 고양이는 몹시 겁먹은 듯 보였다. 미안한 마음에 황급히 자리를 떴지만 그 풀 죽은 눈망울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보니 빗소리에 실려 들려오는 희미한 클래식 음악 소리 들릴 듯 말듯 그 소리에 꿈냄새 채 가시지 않은 덜깬 졸음을 살짝 얹어 봄을 맞이하는 작은 연주회를 열다 12/03/02
청바지를 입은 하얀 얼굴의 중년이 구슬땀을 흘리며 밭을 갈고 있다. 같이 일하고 있는 옆에 있던 검붉은 얼굴의 아저씨가 소리친다. "그렇게 머리가 나빠서 농사짓겠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야지.. 쯧쯧." 새롭게 일구고 있는 밭 가장자리에 말년병장 자세로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대꾸한다. "아 컴퓨터 기술자보고 머리 나쁘다고 하면 쓰겄나.. 껄껄." 나는 내 하얀 손을 들여다보며 농사에 관한 한 나도 천하의 돌대가리일거라 생각했다. 하긴 어디 농사뿐이겠냐만.
초승달아 네 모습 어여쁘지만 그녀 눈썹 만큼 교태롭지는 않고 네 모습 은은하지만 그녀 눈썹 만큼 신비롭지는 않구나 아, 초승달아 오늘에서야 내 너를 감히 여인의 눈썹에 견줄 수 없음을 알았노라 12/02/28
산 중턱 양지 바른 곳, 아리따운 꼬마 아가씨가 할아버지 옆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듣던 나무 위의 새가 그것도 노래냐며 자신도 한 곡조 뽑아 올린다. 아! 사랑해 마지 않던 그 노랫소리와 자태. 그러나 새에게는 눈길 조차 가지 않고 오직 꼬마 아가씨만 바라보고 웃게 되는 것이었다. 12/02/27 잡문
한 여인이 울며 스님에게 염불을 청한다. 남편이 이승을 뜬 것이다. 스님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여인 집에 도착해보니 염장이가 염을 하고 있다. 정성스레 염을 하고 조용히 관을 덮는 손짓이 예사롭지 않다. 포정(庖丁)의 솜씨다. 스님이 다가가 합장을 하고는 묻는다. "무엇이 보입니까." 염장이가 공손히 답한다. "먼저 망자가 후덕하게 살았는지 남 못할 짓만 하고 살았는지가 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망자의 아쉬움과 후회가 들립니다. 그러면 저는 망자와 말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아! '이 염장이 이야기 속에 생로병사와 제행무상(일체가 변함)의 진리뿐 아니라 법화경과 화엄경이 다 들어 있구나!' 스님은 문득 깨달았다. 12/02/23 * 한겨레, , 2012-02-05 를 보고 각색 http://www.h..
6·25전쟁 강원도 최전방 전투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맛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100여 명 가량의 보충병들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모두 투박하고 땡볕에 그을린 얼굴", 하여간 빽 없고 힘없는 사람의 아들들이다. 한 젊은 장교가 격정을 참다못해 빗속을 뚫고 걸어나가 소리친다. "중학교 이상 다니던 사람은 손 들어봐!" 세 명이 주섬주섬 손을 든다. 장교의 입에서 차마 "죽지 말라", "잘 싸워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도 명백히" "관념으로서의 극한상황 따위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으러 가는 것이다. "그래 고맙다. 잘들 가거라." 빗물에 젖은 듯 무겁고 축축한 작별인사. 청년들을 저승으로 보내며 장교는 생각한다.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
만화가 이은홍. 그가 충북 제천 월악산 아래에 있는 시골 마을에 귀촌한 지는 9년째이다. 아들의 공식학력은 중졸. 불안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모두 하도 불안해하니 자신도 불안해해야 하는 건가 싶어 아들이 가진 스펙을 정리해봤단다. 아니 그런데 그랬더니, "그야말로 엄청났다. 나보다 기타 잘 치지, 컴퓨터도 도사지, 좋은 친구 내 10대 때보다 더 많지, 주변에 좋은 어른들 많지. 내가 걔보다 나은 건 현찰을 좀 더 갖고 있는 것 하나더라." 그럼에도 불안한 게 정말 없는 지 재차 묻자, "얘가 밥먹고 뒷자리를 깔끔하게 처리 안 한다든가 제 옷가지나 잠자리를 정리 잘 안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불안하다"고 답한다. '불안'이라는 이 시대의 페스트도 영혼이 건강한 자는 잠식할 수는 없는가 웃음 짓고는 슬며시..
이 차가운 방 따뜻하게 비추는 햇살처럼 누군가의 차가운 마음 따뜻하게 비추는 햇살이고 싶다 먼저 이 마음 탁탁 털고 해를 향해 널어 따사로이 볕을 쬐게 해야지 나른한 일요일 오후 향긋한 햇살 내음 12/02/21
Too much love will kill you* Threfore, love each other in moderation That is the key to long-lasting love** (사랑이 너무 깊어지면 치명적이니, 사랑도 절제할지라. 그것이 영원한 사랑의 비결이도다.) 12/02/15 * Queen, ** Shakespeare, , Act 2, Scene 6. 2012/07/12 - 적당히 2013/01/21 -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
명랑함과 쾌할함, 그리고 유머 마지막까지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나의 무기 나의 양식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음에도* 아니,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으니까 더 명랑하자 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12/02/13 * “결국 문제는 자본인데, 사람들이 그걸 읽지 못하는 건지, 일부러 외면하는 건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산업주의자들의 식민지가 되어버렸고, 문예·문학·철학·담론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시장과 상품이 밀림처럼 그 자리를 점령해버렸구요. 나는 이걸 정당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는데 다들 너무 명랑해졌어요. 나는 그게 싫었습니다. 문제를 알면서도 달라진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는 내 능력의 한계에도 절망했구요. 그래서 뛰어내린 거죠, 뭐. 제가 그때 할 수 있는..
인류의 위대한 작품으로 칭송되는 시들을 읽는 것 보다 가까운 친구니까 그나마 참고 읽어주는 초라한 시를 직접 몇 자 끄적이는 게 더 재미나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시를 쓸 권리가 있다* 고 선언하자 세상은 이미 시가 되었다 12/02/13 * 골드버그, 어딘가에서 얼핏 보았던 구절
삶에 깨어있을수록 삶을 주시할수록 삶에 지금 이 순간만이 남을수록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12/02/12 *정성일, 정우열의 영화평론집 제목(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사랑은 부끄러움이 많은지 똑바로 보려 하면 보이지 않고 부러 찾으려 하면 찾아지지 않는 것 같다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나는 그녀와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고 함께 집으로 걸어갔을 뿐인데 집에 도착하고 보니 사랑이 곁에 와 있었다 심장이 유난히 발랄히 뛰던 소년 시절의 추억 12/02/12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위엄을 떨칠 때면 별들도 그 빛을 잃는 달은 자애로운 밤의 여왕 홀로 지새는 밤 다정히 벗 되주는 달은 두 얼굴의 나의 여왕 빛과 어둠을 희롱하는 달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나의 사랑 밤의 여왕에게 경배를 12/02/12 * SF거장 하인라인의 대표 장편소설 제목(The Moon is a Harsh Mistress).
새들도 춥지 않을까 싶은 추위가 주중 내내 계속되었다 서울의 그늘진 추위는 유독 매섭지 않은가 하고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서울 추위가 서럽다며 내가 어쩌다가 따뜻한 고향을 두고 여기까지 흘러왔나 하는 하드보일드한 감상이 든다는 답장이 왔다 내 고향은 추웠다 영하20도까지 떨어졌다는 어느날 신문기사에 고향이 나왔었다. 그 기사 말미에 인터뷰에 응한 80대 모 할아버지 왈, "아 요즘 겨울이 겨울인가. 이 정도는 추워야 겨울이지!" 아이고, 할배요! 고향의 쨍쨍 얼어붙는듯한 그 추위는 할배의 시원스런 허세처럼 상쾌한 맛이 있었다 그 추웠던 곳, 산골소년의 기개는 다 어디갔는지 난 지금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벌벌 떨고 있다 그 사람과 다르게 난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흘러온 것인데 뭔가 계란 반..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밤바람을 맞는 일도 따뜻하고 아늑한 방이 곧 기다리고만 있다면 운치있는 일 바람소리 짜릿하고 달빛 은은하다 넋 놓고 달빛 품으며 걷고 있는데 달이 휙 구름이불을 덮어 얼굴을 가린다 캄캄하다 내가 또 무슨 상처를 준걸까? 알 수 없다 바람소리 스산하고 달빛 보이지 않는다 아, 달은 돌아 누운 나의 연인 다시 그 따뜻한 빛 품을 수 있었으면 12/02/01
11월 그믐 칠야 캄캄한 밤, 어느 한적한 길을 걷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뭐라 뭐라 큰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가 귀 기울여보니 어떤 아가씨가,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외치고 있는게 아닌가. 처음엔 조금 우스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사람들이 듣던 말던, 내리 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난할수있다!!" 그것은 무언가, 애가 끓는 듯 하고, 한숨을 쉬는 듯 하고, 울음을 삼퀴는 듯 하고, 설움이 사무치는 듯도 한, 애잔한 소리였다. 대체 무슨 시름이 있기에, 찬 겨울밤, 이리도 애달프게 부르짖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아가씨의 가슴앓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그저 제 갈길을 가고, 달님은 귀를 막고 겹구름 뒤로 얼굴을 감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