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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
6·25전쟁 강원도 최전방 전투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맛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100여 명 가량의 보충병들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모두 투박하고 땡볕에 그을린 얼굴", 하여간 빽 없고 힘없는 사람의 아들들이다. 한 젊은 장교가 격정을 참다못해 빗속을 뚫고 걸어나가 소리친다. "중학교 이상 다니던 사람은 손 들어봐!" 세 명이 주섬주섬 손을 든다. 장교의 입에서 차마 "죽지 말라", "잘 싸워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도 명백히" "관념으로서의 극한상황 따위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으러 가는 것이다. "그래 고맙다. 잘들 가거라." 빗물에 젖은 듯 무겁고 축축한 작별인사. 청년들을 저승으로 보내며 장교는 생각한다.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 보내지는가?" 장교는 이러한 경험으로 대한민국과 군대의 불의에 대한 사무치는 감정을 품고 마음가짐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겪게 된다. 이 육군 장교가 바로 훗날 이 땅 청년들의 '사상의 은사', 리영희다.

1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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