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학파들간의 논쟁에 출구는 없다 본문
「지혜로운 것은, 바로 이것이 필자의 두 번째 주장인데, 사물들의 그러함에 전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그것에 접근하는 것이다. 반면에 지혜를 잃는 것은 편파성 속에 잠기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개인적 관점 속에서 구성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의 도가 사상가인 장자에게 현자는 항상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견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장자가 고대 중국에서 도의 총체성을 더 이상 못 보게 만드는 여러 관점의 분열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가장 잘 밝혀 보여줄 것이다. 지혜의 상실은 그가 '성심成心', 즉 생겨난 마음이라고 (우리가 선입견을 가진 마음이라고 말하듯)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몸을 받게 되면' 그 몸을 '변화시키지' 않고 우리에게 '닥친' 그 몸을 '끝까지' 간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염려스러운 것은 우리의 마음이 '동하도록' 그리고 그 자체로는 항상 제약적인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지혜의 상실은, 바로 그러한 출현을 통해 우리에게서 다른 모든 가능한 출현들을 빼앗음으로써 우리가 사물을 다른 양상이 아닌 바로 이 양상으로 보도록 만들고 모든 다른 양상을 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물은 바로 이 양상에 의해 둘러싸인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 사상가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방향이 정해지자마자 그 마음이 이해한 세계는 굳어지고 메말라진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현자는, 그리고 바로 그 현자가 우리의 출발점이었는데, 자신의 마음속에 어떠한 굴곡도 만들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모든 결정은 부정이라고 서양의 고전 철학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도가 사상가는 이러한 논리를 극단까지 밀고 나아갔다. 그는 그 논리를 실존 위에 투사한다. 즉, 어떤 것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다른 방식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이 특정한 방식은 다른 방식들을 배제시킨다. 이처럼 특정한 관점을 채택하는 사람은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실제로 이러저러한 그리고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 그 지점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이 보인다. 하나의 전망을 취함으로써 하나의 관점은 다른 관점을 감추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도록 만듦으로써 그 관점은 그것이 다른 지점들에서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를 무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의 오류는 우리를 사물의 변화에서 끌어내며, 사물을 하나의 풍경처럼 펼쳐놓는다. 그러한 관점의 오류는 특정한 방향 속에서 볼 것을 제시하는 동시에, 그것이 부당하게 취득한 헤게모니에 의해서 앞으로 돌출된 부분 덕분에 하나의 지평을 확정하고 결정한다. 관점의 오류는 사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성향'을 '둘러싸고' '제한한다'라고 중국인 주해가 성현영은 말한다. 따라서 관점의 오류에 '매몰되고' '집착함'으로써 '사람들은 편파적인 시각에 불과한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미 맹자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무엇에 집착한다'. 다시 말하면 일단 '전유물'로 '봉인'되고 구축되면 이러한 편파적인 시각이 한 '학파'의 사상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실현된 생겨난 마음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판단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하나의 개별적인 성향을 채택함으로써 바로 그 성향에 따라 참과 거짓을 가르기 때문이다. 마음 자체가 생겨나는 방식에 따라 마음은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고, '그러하다' 혹은 '그러하지 않다'고 간주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개별적인 관점 속에서 구성되는 우리의 마음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형성으로부터 그리고 그러한 형성을 가지고 각자는 한 명의 '스승'이 되며 판단의 지속적인 구분이 발생한다. 또는 용어를 함축하여 이러한 사실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에 특정한 분리된 입장 ― 그것이 어떤 것이든 ― 이 있게 된 이후부터 그 마음은 스스로 분리에 처해졌음을 알게 된다. 도가의 주장에 따르면, 만일 (아직은) '생겨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참과 거짓을 재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의 의미로 볼 때 마음이 생겨난 이상 그 마음은 더 이상 단순한 양자택일(참·거짓, 선·악 등)에 의해서만 진행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 항은 단지 다른 항을 파괴함으로써만 보존되는 것이다. 즉, 분리의 제국에서는 모든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대립하는 것들'의 공존을 잃에 된다. 반면에 현실의 일관성은 바로 이러한 공존과 관련된다. 따라서 도의 사상가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길(도), 진정한 도와 왜곡된 도가 있을 정도인데 어떻게 그것이 감춰져 있단 말인가. 말, 양자택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어떻게 말이 감춰져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길이란, 사람들이 갈 수 있기 때문에 그곳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말이란 그것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은가(『장자』, 「제물론」, 56).
주해가 곽상이 도를 간략하게 딱 잘라 해결하는 것처럼, 도는 '도처에 존재한다'. 또한 사람들이 진정하다고 판단하는 것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정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속에도 도는 있다. 이러한 이유로 '진정한 것'도 없고 '왜곡된 것'도 없다. 그 차이는 인위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은 항상 '정당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말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하나의 특정한 관점이 항상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를 범주적으로 대립시킬 수 없다. 말과 마찬가지로 도와 관련해서 전체성의 '은폐'로부터 단지 그 전체성의 한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분리들이 탄생했다. 혹은 반대로 말해서 사람들이 분리들을 만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에 다가서게 된다. 다시 말해 도란 전적으로 어떠한 측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함으로써 사람들은 도가 편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도는 아무것에도 등을 돌리지 않는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이무것도 버리지 않게 된다. 도의 사상가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가고 있다.
도는 사소한 출현들 속에 감춰져 있으며, 말은 논쟁의 만개 속에 감춰져 있다(『장자』, 「제물론」).
만일 도가 "'사소한 출현들' 속에 감춰져 있다"고 말해진다면, 그것은 단지 항상 '사소한' 출현만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출현은 그 출현이 발생하는 동시에 배타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가 협소한, 그리고 그 결과 환원적인 성향들 아래에 끊임없이 감춰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되돌아오며, 그 성향들에 의해 하나의 마음이 형태를 갖추게 되고 개별적인 관점 속에서 마음 자체가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말에 대해 말하자면, 말은 사람들이 논쟁들 중에 경쟁함으로써 '드러내는' 욕망에 의해 감춰진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각자는 '타자가 부정하는 것을 긍정하고, 타자가 긍정하는 것을 부정한다'. '유가'는 '묵가'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라고 도가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묵가'는 '유가'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논쟁은 끝이 없게 된다.
제자백가의 논쟁은 현실을 밝혀주는 대신에 오히려 그 현실을 '감추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을 좀 더 가까이서 포착하는 대신에 그 진리에 모순을 도입시키는 것을 제안하는 것과 같이, 그 모순은 그들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보지 못하게 만들며 화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리라. 모든 다양한, 즉 적대적인 입장들은 사실상 '비슷하다'. 다시 말해서 그 입장들 모두가 하나의 특정한 관점에서 보면 마찬가지로 정당하기 때문에, '생겨난 마음'이 매번 하나의 특정한 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만일 철학적 논쟁이 우리를 지혜와 가장 멀리 갈라놓는다면, 그것은 그 논쟁이 우리를 하나의 입장과 다른 입장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리라. 왜냐하면 다양한 입장들은 작동된 분리들에 따라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보았듯이, 지혜는 평등에 비례하여 모든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말하듯이, 지혜로운 자는 각자가 어떻게 자신의 방식에 따라 옳은지를 알 수 있다. 각자는 자신의 관점으로 본 것에 따라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필연적으로 각자는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혹은 어떻게 누군가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도가 사상가는 공론이 항상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제대로 근거를 세우지 못하면서 막연히 예측하는 것에 만족했던 것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했다. 우리가 이제 읽기 시작한 장자는 「사물과 담론의 평등에 대하여」(혹은 '사물에 관한 담론들', 즉 「제물론」)를 썼다. 그 글에서 장자는 모든 담론이 '동등하다'는 것을, 고대 중국 말기에 벌어진 학파들 간의 격렬한 토론에 출구가 없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장자는 학파들 간의 토론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묵가가 발전시켰던) 논파법의 능력이 있었으며 (혜자 같은) '소피스트(궤변가)'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는 그만큼 더 흥미로운 사상가이다.」*
15/09/08
* 프랑수아 줄리앙. (2009).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 철학의 타자. (박치완 & 김용석, Trans.).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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