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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완전한 진실은 없으며, 모든 진실은 반쪽이다. 그것을 완전한 전체 진실로 취급하려는 시도가 악마를 활개치게 한다." ―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There are no whole truths; all truths are half-truths. It is trying to treat them as whole truths that plays the devil.” ― Alfred North Whitehead
"옛날 옛적, 폴란드에는 한 가지 관습이 있었지. 다른 남자의 아내를 유혹한 자는 다리로 데리고 가는 거야. 거기에 부랄을 철 구두 징으로 콱 박아 넣는 거지. 그 사람 옆에는 칼 하나를 두고 이렇게 말해주는 거야. '자유를 원해? 그럼 스스로 잘라'" (다른 남자의 아내를 유혹한 주인공에게 한 말.) ---------- (신화 속의 생물을 본 주인공은 놀란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기사는 놀라지 않았고, 그 모습에 주인공은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게 어둠 속에서 나왔을 때 당신은 움찔하지 조차 않았죠. 심지어 목소리조차 떨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와 얘기하던 모습은.. 감탄스러웠어요. 그건.. 밤의 생물이잖아요. 뭐랄까.. 낯선 존재(alien)말이에요." (기사는 한참 주인공을 바라보다 마..
「훌륭한 사유의 과정일수록 어둠 속에 감추어 두는 대신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당당히 공개해야 한다. 애초에 '궁극적이고 완결된 진리'를 찾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오래된 교리문답서나 유명한 격언의 구절을 인용하면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면 제대로 규정되지도 증명되지도 않은 불완전한 진리를, 심지어 때로는 정상적인 사유의 방향과 정 반대되는 진리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한 번 이러한 모순을 느끼고 당황하기 시작하면 사유는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이 내세운 철학이 무조건 옳으며 결론은 이미 나와 있으니 다른 주장은 모두 '궤변'에 불과하다는 아집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는 마치 철학에 무지한 자들이 모든 철학적 사유를 뭉뚱그려 '비현실적인 몽..
"진리의 특성은 결코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인데 진리에 무슨 과장이 필요하겠는가?" -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더클래식
해리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이윤 옮김. 필로소픽 출판사. 에서 모두 발췌.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 이것이 바로 내가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개소리는 진리에 대한 관심 없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꼭 거짓일 필요는 없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진상을 꾸며낸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반드시 그것들을 왜곡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오늘날 개소리의 확산은 또한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 속에 보다 깊은 원천을 두고 ..
「언젠가 니체는 인간적 자기기만과 그리스도교의 퇴락에 대한 단순한 기술에 지겨워졌음에 틀림없다. 그는 새로운 가치표들을 세워놓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위한 논증은 그 자신의 인식 이론에 따르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그로 그는 문학적인 작품을 서술해야만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는 새로운 윤리학을 고지하는 자를 서술한다. … 차라투스트라의 연설은 수다스럽고 주제넘으며, 그의 성격은 심리학적으로 단순하다. 고독의 저주를 받고 자신의 고독을 오만하게 향유하는 이러한 이른바 천재는 현실적인 상호 주관성의 능력을 지니지 않는다. 내용적으로 이 책은 주로 오래된 잘 알려진 것들을 포함하는데(니체의 독창성은 퇴색하기 시작한다), 설교 형식으로 된 그것들은 아포리즘보다 더 불쾌하다. 새..
「여러 전문가가 모여 새로운 과학 연구와 기술이 향후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예상하고 민주적인 의사소통 과정을 거쳐 모종의 합의에 이르는 과정과 과학자가 어떤 설명적 가설을 떠올리고 그것을 실험을 통해 입증함으로써 가설을 확증하거나 반증하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달리 말해 수많은 윤리위원회가 제시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윤리적이라기보다는 과학적이다. 왜냐하면 그런 해결 방식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윤리위원회'는 그 이름에서 기대하는 규범성을 절차적 합리성으로 대체하는 조직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우리가 절대적인 규범을 이미 포기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
「이제 논의를 정리해보자. 원칙적으로 우리는 다양한 세계를 구성해(만들어) 볼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렇게 구성된 세계들은 그것이 '이' 세계를 얼마나 잘 설명해주는가에 따라 '살아남을' 것이다. 아울러 세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이른바 문화적 세계들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파생세계로서의 다양한 세계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가장 근원적인 토대세계이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세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한에서 이떤 종류의 파생세계들은 새로운 학문적 탐구 영역으로 주어질 수도 있다. 가능세계의 형이상학은 하나의 제안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해 구성 가능한 설명 모델들 일반의 구조적 특성을 해명하는 일, 그리고 개개의 학문 탐구가 그려내는 세계들을 하나의 통합적..
「절대적인 진리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니체는 독단주의자들처럼 비뚤어진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 관점주의적인 인식 방식을 선택한다. 이는 힌두 철학에서 말하는 'darshanas'를 떠올리게 한다. 인도에는 유일하고 전제적인 진리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 서로 교차하는 여섯 개의 위대한 '관점들', 즉 사유 체계들이 존재한다. 인간의 유한한 관점들이 무한한 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생각했던 라이프니츠와 달리, 니체는 어떤 중심점도 없는 관점주의를 구상했다. 주체의 개념이 해체됨에 따라, 어떤 끈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정착되지 않은 시선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니체에게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정된 좌표가 전부 없어진다면, '각자에게 각자..
「아렌트는 「어둠의 시대의 인간」이라는 에세이를 레싱으로부터의 인용문으로 결론짓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게 하라. 그리고 진리 자체는 신에게 맡겨라."」* 15/10/26 * 지그문트 바우만. (2013). 리퀴드 러브. (권태우 & 조형준, Trans.). 새물결. 2015/10/25 - 끝없이 의견은 갈라지며 하나의 진실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즐겨라 2014/12/04 - 대화에는 납득과 설득이 필요하지 않다 2015/09/08 - 학파들간의 논쟁에 출구는 없다 2015/08/31 - 가치들의 투쟁에서 무엇이 승리할지는 아무도 모르며 어떤 학문도 그 투쟁을 지배할 수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
「그렇다. 실제로 역사는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는 아직 선택할 수 있고,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궁금해 할 것이다. 지난 200년 동안 우리가 이미 한 선택들로 인해 과연 우리는 칸트가 그렸던 세상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인지 아니면 그와 반대로 2세기 동안 삼위일체 원칙[영토/국민/국가의 동맹]이 부단히 주창되고, 단단히 자리 잡고 마음껏 장려되어온 후 현대의 모험이 시작된 당시보다 목표에서 훨씬 더 멀어진 것은 아닌지 말이다. 단순히 인간들이 만들었다고 해서 세상이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거기서 인간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인간적인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것이 담론의 대상이 되었을 때만 그렇게 될 수 있다. ······ 오직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함으..
「철학은 어떤 해답도 줄 수 없다. 철학에서 보여주는 모든 해답은 겉치레에 불과하다. 그대가 그것들을 깊이 파고들수록 더많은 의문들이 쏟아져 나올뿐 알맹이는 없다. 철학의 모든 답들은 더많은 질문들로 연결될 뿐이다. 이것은 끝없이 계속된다. 서양에서는 철학자를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철학교수들만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철학교수는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교수는 단지 교사일 뿐이다. 지식으로 가득차 있지만 지혜로운 자는 아니다. 궁극적인 질문에는 대답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것은 궁극적인 질문이다. 모든 철학, 신학, 신비주의가 결국에는 이 궁극적인 질문에 도달한다. 그 질문에는 대답이 있을 수 없다. 철학은 삶을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철학의 기본 명제다. 하지만 삶에는 ..
「철학: 하나의 관념에 집착지혜: (특권적인) 관념이 없다. 도달한 입장이 없다. 특별한 자아가 없다. 모든 관념을 동일한 면에 위치시킨다. 철학: 철학은 역사적이다.지혜: 지혜는 역사가 없다. (우리는 지혜에 대한 하나의 역사를 기술할 수 없다.) 철학: 설명에 의한 발전(증명)지혜: 말의 다양성 (지혜는 되돌아가야 하는 것,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철학: 보편성지혜: 총체성 (현자의 말은 항상 지혜의 전체를 말한다. 하지만 매번 개별적인 각도에서 그러하다.) 철학: 내재성의 측면(카오스를 단절)지혜: 내재성의 근간 철학: 담론(정의)지혜: 통찰(격려) 철학: 의미지혜: 명증성 철학: 난해하기 때문에 숨겨져 있음지혜: 명증하기 때문에 숨겨져 있음 철학: 인식하기지혜: 깨닫기('to realize'..
「... 지혜의 눈으로 보면, 삶의 의미라는 문제는 그 의미를 잃는다. 또한 현자는 더 이상 진리에도, 그 의미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자라는 것은 더 이상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신비로운 것 혹은 부조리한 것이라는 양자택일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그에게 더 이상 사실 혹은 거짓의 양자택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현자에게 세상과 삶은 자명한 것이다. 현자는 사물은 그러하게 있다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이며, 따라서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는 자이다.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자발적인 복종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며, 철학이 말하는 것처럼 놀..
「따라서 지혜의 반대 항은 거짓이 아니라 편파적인 것이다. 지혜 속에서 완전한 합치의 중용이 진리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파성은 철학에서 오류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타인의 '담론들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여러 학파들 사이의 토론에서 적대적인 입장들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거짓이라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들에서 결핍된 것을 강조하고 따라서 그 결핍된 것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기원전 3세기의 순자에게서도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순자는 묵가와 동시대를 살았으며 추론의 논리적 엄격성에 매우 예민했으며, 고대 중국에서 논박의 실천을 가장 잘 발전시킨 인물이다. 순자는 마음의 '통치적' 역할에 가치를 두었..
「지혜와 철학의 대비에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변별적 특징을 취할 것이다. 첫째, 철학이 논쟁적(투쟁주의적)이길 바라는 반면, 지혜는 평화적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모든 대립을 스스로 금하고 있다. 둘째, 철학이 타인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대화체인 반면, 지혜는 독백이다. 그리고 심지어 지혜는 토론을 피하는 것에 전념하고 대화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 셋째, 철학이 배타적인, 즉 진리가 배타적인 것을 강요하는 반면, 지혜는 이해적이다. 지혜는 대립되는 관점들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단번에 포괄한다.」* 15/09/06 * 프랑수아 줄리앙. (2009).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 철학의 타자. (박치완 & 김용석, Trans.). 한울. 2015/09/05 - 철학은 이해하지만 지..
「흔히 말하듯 철학은 이해한다. 철학은 진리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지혜는 깨닫는다. ... 식물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맹자가 말했듯이 돋아나는 싹을 잡아당기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오히려 싹이 스스로 자라도록 내버려두면서, 종종 그 밑부분의 땅을 '부드럽게 김매주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인식은 객체를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과 관련된 반면에, 깨달음은 간접적으로 항상 우회(깨달음을 용이하게 해주는 충고라는 우회)를 통해서 실행되기 때문에 잠복과 함축에 관련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결코 완벽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기회가 닿으면" 돌출되는 결과에 의해서 드러난다. "보라", "갑자기", 나..
「이 새로운 신들은 개개인의 사적 가치관일 수도 있고, 사회적 이념(민족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신들의 거처는 베버가 이른바 '가치영역'이라고 부르는 것들, 즉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실천적 활동영역들이다. 이것들은 크게 볼 때 '인지적-기술적'[眞], '도덕적-실천적'[善] 그리고 '심미적-표현적'[美] 가치영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 영역들은 종교적-주술적 세계상 하에서는 단 하나의 절대권위와 절대논리, 즉 신성의 논리에 예속되고 함몰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계상의 탈주술화와 함께 이 가치영역들은 신성의 절대논리에서 해방되고 분화되어 나와 이제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논리와 '주권'을 선포한다. 이와 함께 이 가치영역들은 다른 어느 누구도 침..
「"학문의 민중화"에서 문제의 핵심은 한완상이 미시이론의 성찰적인 해석능력이 있는 일상 행위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념화하고, 과연 그들의 능력과 의견을 이론적 차원에서 얼마나 '존중'하는가이다. 한완상은 세계에 대한 일상인의 해석에 관심을 기울인다 해서 사회학자가 "일상적 민중에게 '인식론적 특권'을 자동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고" 오직 "그들이 원칙과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때 그들에게 인식론적 특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칙과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민중은 누구란 말인가? 한완상의 글에서 전혀 답을 찾을 수 없지만, 내 나름대로 유추해본다면 슈츠가 언급한 대로 일정한 교육을 받고 사회문제 전반에 관심을 가지며 자기 행동을 책임질 수 있는 이른바 "교육받은 시민"이 '성찰적 민..
「플라톤의 우주론을 계승한 고대와 중세는 '선의 가치'에 기반을 둔 종교적 사유가 지배적이었다면, 반면에 사실과 가치를 이분화한 17세기 우주론은 자연과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만든 '진리의 가치'에 토대를 둔 이론적 사유가 지배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우주론은 진리의 가치나 선의 가치보다는 '미의 가치'에 근거를 둔 예술적 사유가 가능한지를 탐구한다. "철학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가장 무시되었기 때문에 가장 생산적인 출발점은 현재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가치론이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인간 예술의 가치들에 대한 우리의 향수, 혹은 자연미에 대한 향수, 어떤 명백한 야만과 파괴에 직면하여 느끼는 우리의 공포. 우리에게 밀려오는 이것들, 경험의 모든 양식들은 분명 충분히 추상화된 것들이다..
"사람을 지배하는 건 경제적 동기라는 생각은 원래 사람들 마음속에 늘 잠재해 있던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이 반쪽 진리에 학문적 외피를 제공해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담 스미스의 말을 온전한 진리로 받아들여 그것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동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반쪽 진리를 전체 진리로 착각하는 데서 인간의 삶에 악이 연출됩니다. 이 반쪽 진리는 물질적 동기를 고명한 것으로 승격시키고, 그것을 선한 양심으로 여기게 된 사람들은 이 반쪽 진리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의 어떤 시기도 드높은 동기, 이상주의적 동기 없이 위대한 적이 없었고, 위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상주의는 내팽개쳐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댓가를 치르고 있습니..
「(프라이스) "그리스인의 업적은 무엇이었습니까?" (화이트헤드) "삶에 대한 미적 관점이지요." "조금 전에 헬라스와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미학'과 도덕'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을 때, '미학'을 먼저 말씀하시더군요." "당연하지요." "미(美)가 진리보다 더 넓고 근본적인 개념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진리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바로 그 점이 퓨리탄(청교도)들이 추락한 이유에요," 화이트헤드 여사가 말했다. 그녀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새 되돌아와 있었다. "그들은 미를 내쫓았어요. 시작은 좋았어요. 자신들이 신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믿는 것 말이에요. 그러나 결국 그들은 신을 그들 자신의 이미지대로 만들고 말았지요." (중략) 화이트헤드가 말했다. "청교도 관념은 생..
"전체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는 반쪽짜리 진리(half truth)이다. 그것을 마치 전체적 진리인양 다루는 것이 바로 진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원인이 된다."* 14/12/07 * 화이트헤드·프라이스, 에서 발췌, 수정. 화이트헤드
오늘 참인 진리가 내일은 거짓일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진리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진리의 가치는 우선 흥미롭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 기쁨으로 인해 세계는 새롭게 전진한다. 「명제를 단순히 판단의 소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주 안에서의 명제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치명적이다. 순수한 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비순응적 명제는 그릇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보다도 더 나쁘다. 그러나 그러한 명제의 기본적인 역할은 세계가 새로움으로 전진해 갈 수 있게 길을 터 주는 것이다. 오류는 우리가 진보를 위해 치르는 대가인 것이다. 지나치게 주지주의적(overintellectualized) 성향을 띤 철학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논리학에의 관심은 사물 본성에 있어..
「철학자들은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의 제1원리들에 도달할 수가 없다. 인간의 통찰력이 지닌 약점과 언어가 가진 결함 등은 우리가 철학을 하는 데 있어 불가항력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한다. 언어와 문장 등은 우리가 추구하려는 철학의 보편성에 어느 정도까지 도달하는 데는 공헌하지만 언어의 이러한 불완전한 요소들은 기교적인 점이 매우 많아서 진리 그 자체에 도달하게 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언어를 통해 상상적 비약을 하여 은유적으로 진리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뿐이다. ... 상상력이 탐구하는 능력의 한계와 결함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철학적 원리들의 틀에 겨우 접근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철학자들은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여겨지는 한계에까지밖에 이르지 못하고 만다.」* - 화이트헤드 14/11/2..
『논어』의 '질목세이명불칭疾沒世而名不稱' 보통 해석: "죽기까지 이름이 나지 않는 것은 안된 일이다." 왕양명의 해석: "이름이 자기의 실력보다 지나치면 군자는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칭稱' 자를 거성으로 읽어 '일치한다'의 뜻으로 봄) 『논어』의 '사십오십이무문언四十五十而無聞焉 사역부족외야이斯亦不足畏也已' 보통 해석: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이름이 나지 않은 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왕양명의 해석: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진리를 만나지 못한 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무문無聞의 뜻을 이름이 나지 않으면이 아니라 불문도不聞道, 즉 깨닫지 못했다의 뜻으로 해석) 공자가 실제로 뭐라 말했든, 왕양명의 해석을 지지한다. 14/11/08 * 김흥호 전집, 에서 보고 재구성. 논어 왕양명 김흥호
「[맹자가 집중執中에 대해 말하면서 무권無權은 집일執一과 같은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한 설명] 진리는 변하는 것이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역易, 수시변隨時變의 뜻이다. 아까 질문의 집중, 무권이라 할 때 '권權'은 저울 권 자로서 저울이라는 것은 올려놓는 물건에 따라 자꾸 변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저울추가 무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이것을 '시중時中'이라고 한다. 그때그때에 따라 자꾸 변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저울로 무게를 잴 때 저울추로 무게에 따라 눈금을 꼭 맞추는 것, 그것이 '시중'이다. 그때그때 적절하게 맞아 들어가야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울이 물건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고 의사의 진찰이 환자의 병세에 따라 달라지듯이 진리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에 따라..
「 당신이 평범한 진리를 얻고 싶다면, 옳음과 그름에 대해 잊어버려라. 옳음과 그름 사이의 갈등은 마음의 병이다. 사람들이 위의 말에 각기 다르게 대응을 한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떤 사람들은 위의 구절이 아름답고, 멋지며, 매우 현명하며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 구절을 끔찍하고, 사악하며,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으며, 가장 파괴적이라고 한다. 내가 한 친구에게 그 구절을 읽어주었더니 그는 "그것은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가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친구의 말은 옳다! 그 구절은 사드가 쓴 것일 수도 있다. 한편 그것은 노자가 쓴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의도에는 큰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도덕의 초월'이라는 말이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공포를 ..
「깨달음을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 동양철학에는 무슨 거창한,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그것을 한번 알면 우주를 말아먹고, 일거에 일상의 누추함을 벗어던지고 비상할 '비밀의 권능'은 없다.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의 굴곡을 거치며, 작게 혹은 크게 삶을 배우고 있는바, 그 속에서 각자 깨달음의 불씨들을 일깨워가고 있는 수행자들이다. 일찍이 주자는 돈오의 선학을 위태롭게 여겨, 일상의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점수를 그토록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 주자학을 말하는 사람들도 이런 착각이 없지 않다. 이理란 거경의 함영涵泳과 격물궁리의 극처極處에서 활연관통豁然貫通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리가 '초월'이나 '정보'가 아니라 점진적 '성숙'임을 알리자는 데 그 취지가 있지, 가르침이나 경지를 신비화시키자는 것이 아..
아래 인용에서 Ω가 완전히 랜덤이라는 것은 쉽고 단순화 해서 말하면 이런 것이다. 특정 공리계 내에서 랜덤으로 선택된 명제들이 증명 혹은 반증 가능할 가능성 역시 랜덤이라는 것.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말했다는데, 양자역학과 수학(논리학)은 신은 지금도 이 자연계에 열심히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논리학자: 논리적으로는 만일 Ω의 수치를 n비트까지 알면 길이가 n비트까지의 임의의 프로그램에 대한 정지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결국 Ω에는 유한한 공리계가 이끄는 모든 문제에 대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체이틴은 Ω가 '완전히 랜덤'이라는 것을 증명한 거죠! 사회자: 그것이 대체 무슨 뜻입니까? 논리학자: 체이틴은 모든 프로그램에서 추출한 Ω가 실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