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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민중화 혹은 민중적 학문이라는 허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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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민중화 혹은 민중적 학문이라는 허상

모험러

「"학문의 민중화"에서 문제의 핵심은 한완상이 미시이론의 성찰적인 해석능력이 있는 일상 행위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념화하고, 과연 그들의 능력과 의견을 이론적 차원에서 얼마나 '존중'하는가이다. 한완상은 세계에 대한 일상인의 해석에 관심을 기울인다 해서 사회학자가 "일상적 민중에게 '인식론적 특권'을 자동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고" 오직 "그들이 원칙과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때 그들에게 인식론적 특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칙과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민중은 누구란 말인가? 한완상의 글에서 전혀 답을 찾을 수 없지만, 내 나름대로 유추해본다면 슈츠가 언급한 대로 일정한 교육을 받고 사회문제 전반에 관심을 가지며 자기 행동을 책임질 수 있는 이른바 "교육받은 시민"이 '성찰적 민중'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첫째, 민중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다. 그중에는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낮은 수준도 있고, 아주 낮은 수준도 있다. 이들의 책임의식, 문제의식 그리고 사회,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한 관심도도 천차만별이다. 이런 차별적인 수준에 따라 실현해야 할 이상과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 필요한 원칙들도 제각기 다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구성된 민중들 사이에서 원칙과 이상의 차이가 드러나고 갈등이 생기면, 그때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다음으로, 민중에게 인식론적 특권을 부여한다는 말은 지식인으로서 사회학자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사회학자의 사회인식이 일상인의 인식보다 객관적이며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를 수긍한다면 사회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한완상은 파솔라볼로냐의 "지식인은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면서 사회학의 민중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민중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미 성찰하고, 그 결과 문제의 소재를 파악하고, 나아가 해결책까지 제시할 수 있는 성찰적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사회학과 사회학자의 존재이유 또는 정당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지식인 자신의 인식론적 특권을 부정한다면, 민중들은 왜 한완상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그러나 한완상에게 이와 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학자와 민중의 경계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 주장이 문제가 되면 곧바로 사회학자의 인식론적 우월성을 복권시키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민중의 의식화'는 사회학자가 민중들이 깨닫지 못하는 "억압과 수탈의 사슬을 깨뜨릴 수 있게 알려주는 작업"을 뜻하는데, 이는 지식인과 민중이 평등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중도 나름대로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인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피터 버거의 "인지적 존중" 명제를 인정하면서도, 한완상은 민중을 의식화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지적 존중의 정신과 반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버거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일상적 차원에서는 민중도 나름의 관점과 해석을 견지하지만 개혁의 당위성을 정초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는 "모두 평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지식인이 사회개혁에서만큼은 주도권 또는 인식론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계몽적 입장의 전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사회학자와 민중의 경계는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을 스스로 허무는 대목이다. 물론 한완상은 학자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으면서도 수탈과 억압의 사슬을 깨뜨릴 수 있는 저력을 지녔음을 동지적 공감의 입장에서 겸허하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위태로운 절충안을 제시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만약 겸허히 상황을 알려주었는데 그들이 싫다고 거부하면 어쩔 텐가? 무조건 내가 아는 게 많은 지식인이니까 옳다고 강변할까? 대화를 나누어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설득이 안 되면 한완상이 지식인으로서 성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리는 그 힘을 잃는 것인가? 다시 말해, 즉자적 민중(의식화되지 않은 민중)이 한완상의 사회개혁 요청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을 대자적 민중(의식화된 민중)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신의 주장만이 '허위'에 대비되는 '진리'임을 증명하고 설득할 수 있을까? 한완상은 지식인도 민중에게서 배우고 그렇게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고 덧붙이지만, 이 역시 개혁의 당위와 방향을 설정하는 데 지식인이 우월하다는 증명되지 않은 가정 아래 단지 미려한 수사로 끝나버리고 만다. 한 발 더 나아가 한완상과 상이한 방향의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지식인이 있을 때 민중들은 누구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나?


하버마스, 로티, 테일러 등 서구학자들이 무엇이 진리이고 지식인의 역할인가에 대해 정말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로 이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이지, 단순히 한완상이 고도로 추상적인 논쟁이라 일축해버린 논쟁 자체에 탐닉해서가 아니다. 한완상처럼 그저 지식인이 진리를 손에 쥐고 있고 민중을 "깨우칠 수 있다"고 단정해버리면, 물론 아무 이론적 고구도 학문적 고뇌도 필요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학문이란 외피를 쓴 '독선'일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식인이자 관료로서 조국 폴란드의 농민을 "깨우쳐" 폴란드를 합리적인 민주국가로 이끌려고 하다가 바로 그 농민들로부터 배척받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 일은 바우만으로 하여금 "민중은 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혀도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민중은 단순히 "깨우쳐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현실을 생각하고 평가해 지식인의 말도 비판하고 거부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바우만은 지식인의 역할을 '입법자'(개혁의 방향과 내용을 입안하는 사람)로 보는 한완상과 같은 기존 사회학자의 관점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사회를 '해석'할 뿐 대중을 깨우칠 수는 없는 '해석자'로 규정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 문제는 마르크스, 루카치, 아도르노, 하버마스, 로티를 거쳐 바우만에 이르기까지 서구 비판이론을 둘러싼 그야말로 격렬한 논쟁의 '쟁점 중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15/07/22


* 김경만. (2015).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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