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엄숙주의 (7)
모험러의 책방
「여기에서 양치기라는 초인의 웃음이 폭발하면서 당당하게 만들어낸 순간의 영원성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삶에 의해 천천히 질식당하도록 내배려두기보다는 차라리 이빨로 삶을 꽉 물어 버리라는 것, 그것이 바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고, 다른 예언자들처럼 쉽게 화내지 않고 진심으로 웃으면서 나체가 우리에게 표현하려고 했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웃음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가 준 기쁨의 자발적인 표현이며, 지상의 실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의 증거다. 더욱이 니체는 홉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웃음에 대해 가졌던 경멸감을 규탄한다. "나는 그 웃음의 등급에 따라 - 황금의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 심지어 철학자들의 순위가 있음을 인정하고 싶다."[니체, 『선악의 저편..
자각적 반성 -> 직업적 학문, 주체적 해방 -> 예속적 억압, 상호적 배려 -> 일방적 권위로 유교가 타락하는 과정은 기독교의 타락 과정과 유사해 보인다. 「기축시대 이후, 동서양의 정신의 영웅들은 모두 당대를 거슬러 또 다른 지평의 ‘현실’을 읽었던 사람들이다. 유교 또한 그러했다. 『논어』를 펼치면 공자와 그 집단이 당대의 상식과 이념과 투쟁하고 있는 생생한 기록을 만난다. 그런 점에서 유교는 본시 ‘순응적’이 아니고 ‘비판적’이다. 우리는 이때의 ‘도(道)의 기사도’들을 한 대 이후 형성된 제도화된 유교, 권력화된 유교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은 유학이 소집단의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권력과 제도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부터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가 자각적 반성..
「리(理) 한 글자에 의지해 천하의 일을 결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을 오로지 리에 의지해 결단하면 잔인하고 각박한 마음이 많아지고, 관대하고 인후한 마음은 적어지지. 위의 덕이 박절하면 아래에는 반드시 상처를 입어 사람들도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단다. 모름지기 장자長者의 기상을 가져야 하는 것이야. 악은 숨겨 주고 선은 드러내 주며, 남의 좋은 점은 완성해 주고 남의 악은 이루지 못하게 하며, 자신 스스로는 무겁게 책하면서 남은 가볍게 탓하는 것, 이것이 모두 장자의 기상이지. 어진 사람만이 잘할 수 있는 것이지, 자잘한 소인 유학자들이 미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야. 내가 『통감찬요』 등의 책을 보니 인물 비평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에 털끝만큼도 가차 없어 엄하다고 할 만하더구나. 하지만 결단이..
「(지극한 천리를 다하고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인욕이 없다는 것이 왕도라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동자가 물었다. "그러면 왕도는 욕구[욕망]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대답하였다. "그렇지는 않지. 『서경』에 이르기를, '의로 일을 제어하고 예로 마음을 제어한다'고 하였고 『맹자』에 이르기를, '군자는 인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예로 마음을 보존한다'고 했지. 예의로 잘 다듬으면 정이 바로 도이고 욕구가 바로 의인데 미워할 무엇이 있겠느냐. 예의로 잘 다듬지 못하고 사랑을 끊고 욕구를 없애려고만 한다면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오히려 더 잘못되는 것이니, 지극한 정까지 다 끊고 없애 버려 형체를 상하게 하고 눈과 귀를 막아 버린 뒤에야 그치게 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
이토 진사이는 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며 주자학이 리(理)라는 글자에만 집착해 "잔인하고 각박한 마음이 많아지고 관대하고 인후한 마음은 적어"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너그러운 성인의 기상이 없어 "자기 지키기가 너무 엄격하고 남 꾸짖기가 너무 심해, 폐부에까지 스며들고 골수에까지 젖어들어 마침내는 각박한 무리가 되고 말았"다고 슬퍼하고 있다. 통쾌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토 진사이 역시 "공자는 최상의, 지극한, 우주 제일의 성인이시며 『논어』는 최상의, 지극한, 우주 제일의 책"이라고 말하며, 노자와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허무와 적멸만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고 미혹시키는 이단으로 단죄하고 공자와 맹자가 제시한 기준은 만고불변에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 어찌 이리 각박하고 좁은가. 또한 공자가 ..
「또 주희는 '정'을 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적어도 원래 주자학에는 비인간적인 엄격주의는 아직 없었다. 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이라는 본원에 도달하며, 성(=정)은 정을 통해 자기를 현재화하는 것이고 또 정을 제외하고는 동적인 장에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 이전에 정념은 인간의 생리적 자연이라는 건전한 상식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은 본래 좋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고의 멸정론은 석로釋老의 설이다." "이고가 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은 옳지만 정을 멸함으로써 성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잘못이다. 정을 어떻게 멸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곧 석씨의 설이다." 정념의 움직임 그 자체를 악으로 보았던 것은 여산의 혜원이나 그와 동시대를 살아간 불교자들에게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기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우리 몸의 감응 관계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인식론이 아니라 감응론인 것이죠. 쉽게 말하면 기가 표상하는 세계는 느낌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는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면이 강합니다. 구체성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인 구체성이지요. 그래서인지 理 중심의 사유를 했던 사람들의 언어는 딱딱한 편입니다. 그러나 기론자들은 문학적입니다. 『노자』, 『장자』, 『회남자』 등 기론적 사유를 견인해온 많은 텍스트들은 상대적으로 은유적이고, 문학적입니다. 理를 추구하는 텍스트들에 비해서 기를 추구하는 텍스트들이 훨씬 더 문학적이고 부드럽고 은유적이란 말이죠."* - 김시천(철학자) 언어만 딱딱한 것이 아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스승이었던 정이는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