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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이미지 마케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수록 실재 세계에 대한 무관심은 급격히 커진다. 실재 세계는 마침내 기능을 상실한다. 허상과 허구의 집합. 우리는 플라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와 멀지 않다.」
「대승불교의 위대한 사상에 따르면, 윤회와 열반은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와 현상을 대립시키듯이, 본질과 실존을 대립시키듯이, 윤회와 열반을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 사상이 답습해 온 플라톤적 이원론의 대척점에 서 있다. '현상계'의 배후에 '실재계'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존재하고, 지상의 나라는 그것의 창백한 복제품에 불과한 게 아니다. 만물의 비영속성에 대해 단호하게 긍정하는 불교는 변하지 않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그 어떤 개념도 거부한다. 물론 도원 선사는 이러한 사물의 비본질주의적 사유를 옹호했을 뿐 아니라, 이 관점을 그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윤회는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윤회와 분리되어 있는 열반의..
「모든 생성은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는 점에서 이미 조절을 내포한다. 조절은 유동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내재하는 이 자극-조절의 능력은 운행의 비가시적 효능의 차원을 이룬다. 반면 비가시나 정신의 영역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면 불임성은 즉시에 야기되며, 그 결과 사물화(정체와 소멸)가 초래된다. 현자의 말도 이와 같아서, 그의 말이 단지 암기되고 인용되는 데 그친다면 더 이상 그 말의 생동한 의미의 원천인 내적 '흐름'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말해진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는 (논리적 '진실'을 내용으로 하는) 가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의 뜻은 현행상의 자극과 작동상의 운행 속에서만 타당성을 지닌다. 말은 '정신'을 통하여 전달될 때 비로소 그 진정성을 얻는다. 이 통행과 활성의 기능을 중시..
「이를테면, 강剛과 유柔는 서로 대립하며, '건조'한 것이 있으면 습한 것도 있다. 그러나 건조한 것의 건성만을 고집하다 보면, 딱딱해지기는커녕 부러지기 십상이며, 습한 것의 습성을 고집하다 보면, 유순함이 지나쳐 액화되어 버린다. 적대적 양상의 각 부분은 상반된 성향들과 균형을 이룸으로써, 즉 반대 부분과의 의존과 소통에 의해 구체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서 두 공리가 도출된다. 그 하나는, 이것은 저것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각 양상은 다른 양상과의 대립관계를 통해서만 그 자체로 존재하며 정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다시 말해, 정체성 속에서 확인되는 각 양상은 반대의 것에도 속한다)라는 사실이다. 물론 다름은 운행의 기원에 이미 나타난다. 하지만 대립에서 기인..
「중국인들은 실재적인 모든 것을 장치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한한 일련의 가능한 원인들을 찾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성향의 불가피한 특성에 민감하기 때문에, 단순히 개연적일 뿐인 목적에 대해서도 사유하지 않는다. 우주 발생론에 관한 목적론적 전제도 이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시초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세계의 결말을 상상해보지도 않는다. 오래전부터 언제나 작동 중인 상호작용만이 존재할 뿐이며, 실재는 이러한 상호작용의 끊임없는 운행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그리스적 개념에 따라 생성과 감각적인 것에 대립되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들은 '실재 속에서 작동 중임을 우리가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
「이제 비로소 콜린스와 나와의 차이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이론가들의 상징적 창조물인 '해방 개념'은 비판이론가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오랫동안 발전되어왔고, 해방의 가능성은 이론가들이 만들어낸 문제공간에서 커다란 흥분과 감정적 에너지를 가지고 논의되어왔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 개념은 그 자체의 생명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콜린스가 오해한 것과 다르게, 나는 이 개념이 탄생된 문제 영역 내부에서는 지적으로 중요하고 흥미로운 개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콜린스는 이런 해방 개념이 지식인들의 문제공간 영역을 벗어났을 때 과연 그것이 문제공간 내부에서 획득한 '중요성'과 '적절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내가 『담론과 해방』에서 주장하고자 한 것..
「콜린스의 편지에서 내가 무척 재미있게 생각했던 부분은 그가 가핑클의 민속방법론을 비판이론과 대조시킨 부분이다. 콜린스는 비판이론가들이 민속방법론을 자기들 이론의 시발점으로 삼은 것은 민속방법론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비판이론가들은 생활세계에서 그들이 발견했다는 '물화'를 문제시하면서, 이론적 비판이 물화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민속방법론자들의 주된 연구결과 중 하나는 사람들이 '인지적 혁명가들'이 아니라 '인지적 보수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의심하지 않는 실재가 사실은 구성된 것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민속방법론에서 소위 '위반 실험'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반 실험은 일상적 실천에서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가정, 행위, 언어사용을 고의적으로 ..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 그리고 파슨스 등으로 대표되는 정통 사회과학 전통에서 일상행위자들은 자기 자신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따라서 자신들의 잘못된 인식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세계의 작동방식에 대해서 그들보다도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론사회과학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고 가정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히 이론가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한 인식능력이 사회과학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했다. 즉, 이들은 만일 사회과학자들이 이러한 우월한 인식능력을 잃어버린다면, 사회과학적 지식은 단순한 상식 수준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과학 전통에 따르면, 오직 이론가들만이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일상행위자들은 꿰뚫어볼 수 없는..
"The fact is the sweetest dream that labor knows." (실재는 노동이 알고 있는 제일 달콤한 꿈이다.) - Robert Frost, 중 「이 구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수수께끼이다. ... 하지만 이 구절과 이 시에서 프로스트가 찾아낸 것은 삶과 앎을 위해서는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만 우리는 존재, 즉 '실재'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해가 아니다. 이것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은 속삭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삭임을 듣기 위해서는 그 속삭임이 들리는 곳에 아주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15/03/24 * 니콜라스 카. (2014). 유리감옥: 생각을 통제하..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이론에 의하면 전체(우주)는 부분들의 조합이 아니며, 부분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다. 부분은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는 모든 부분에 자신을 현상한다. 아래 긴 발췌는 책 내용의 '일부'이지만 책 내용 '전체'를 포함한다. 「양자장은 모든 공간 속에 스며들어 있으므로 모든 입자들은 초공간적으로 상호연결되어 있다. 데이비드 봄이 펼쳐가고 있는 실재상은 아원자 입자들이 허공 속에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떠도는 모습이 아니라, 그 속을 움직이고 있는 물질만큼이나 실제적이고 활발히 살아 있는 공간 속에 만물이 불가분의 그물망의 일부분으로서 아로박혀 있는 모습이다. 봄의 가장 놀라운 주장 중의 하나는, 우리의 일상 속의 감각적인 현실이 사실은 마치 홀로그램과도 같은 일종의 환영이라는 주장이다. ..
, 또 하나의 뉴에이지적 헛소리를 담은 책이려니 하고 지나치려는데 저자 이름이 '다치바나 다카시'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누구인가. 치밀한 과학적 사고, 압도적인 독서량, 지독한 자료조사와 근거제시의 철두철미함으로 유명한 일본 최고의 지성아닌가. 그런 다카시가 임사체험에 관해 책을 썼다니.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나 그는 전세계를 직접 발로 뛰며 손수 인터뷰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그러면서도 공정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자료를 해석하고 있었다. 때로는 추리소설을 읽는듯한 스릴도 있는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최상급의 저서다. 다만, 그가 임사체험이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오직 두 가지 세계관만을 염두해 둔 것은 아쉽다. 모든 것이 물질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일원론, 물질계..
"여기에 우리는 가능성이 무한한 우주 앞에서 유한한 존재와 육체적 감각을 갖추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은 실재(actuality)입니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사이의 관계는 바로 내가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지만 그런 유한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러 무한한 가능성에 둘러싸여 있고,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그런 무한한 것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인간이 직면한 무한한 여러 가능성에 대하여 내가 품고 있는 이런 느낌을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선택의 다양성, 새롭고도 아직 시도되지 않은 조합의 가능성, 실험에서의 행운의 전기,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 우리가 실험을 하는 ..
나는 맹자, 육상산, 왕양명으로 이어지는 유가의 심학(心學) 라인도 진화론적 신비주의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 진화론적 신비주의를 가장 분명하고 종합적으로 세상에 전하고 있는 인물은 켄 윌버일 것이다.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두 종류의 신비주의가 존재한다. 오직 초월과 신성(the Light)과의 합일만을 가르치는 신비주의가 있고, 초월적인 것과의 합일을 존중하면서도 물질 속에서 은총으로 변형되는 신성이 탄생함을 강조하는 '진화론적 신비주의'가 있다. 역사는 첫 번째 신비주의가 계급제도, 불평등, 부정의와 손쉽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신비주의에서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거나 환상이고, 그런 세상에서 초월적인 자유를 누리는 방법은 오직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신비..
「나는 왜 도(道)나 자기 변화라는 개념을 신화로 부르기를 고집하는 것일까?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표를 어떻게 기술하든 간에, 그 기술은 결국 주체와 대상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道)는 그 자신을 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물론 도는 절대적으로 침묵한다.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제시하는 기술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어떤 기술이든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따라서 우리가 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도 개념을 신화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신화는 절대적으로 거짓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참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들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하는 가장 그럴 듯한 이야기, 즉 없어서는 안 될 허구이다. 피카소가 예술에 대..
「내포 질서에서는 마음이 물질, 특히 몸을 접고(감싸고) 있다고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몸은 마음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물질 우주 전체를 접고(감싸고) 있다. 이러한 몸과 마음의 관계는 사실 4장에서 이미 다루었다. 우리는 거기서 고차원 실재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고차원 실재가 더 낮은 차원의 요소들로 투영된다. 이 요소들 사이에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고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관계도 성립하고, 몸과 마음의 관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를 동시에 감싸고 있는 관계도 성립한다. 따라서 더 넓게, 더 깊게, 더 내밀히 들어가면 실재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실재는 더 높은 차원으로서 마음과 몸의 바탕(common ground)이면서 마음과 몸을 넘어서 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은 단지 어느 정도로만 ..
「척도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는 두 사회가 다르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방식이다. 서양 사회는 주로 (척도에 의존하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고 동양에서는 (결국 무량함을 지향하는) 종교와 철학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생각하면 어떤 점에서는 무량함(the immeasurable)을 으뜸가는 실재로 본 동양이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척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통찰 방식이다. 인간에 우선하며 인간을 넘어선 실재는 그러한 통찰에 좌우될 리 없다. 반면 척도가 인간에 우선하며 인간과 무관하다고 보면 통찰을 객관화시켜 고정되고 변할 수 없게 만들며 결국 이 장에서 말한 조각내기와 전반적인 혼란을 불러온다. 이미 고대에 무량함을 실재로 생각한 현명한 이들은 ..
「어떤 사람일 말하기를 "그대가 참구하는 선(禪)은 불변인 언어를 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도 세제(世諦)의 언어를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어느 곳에서 참선의 위대함을 취하겠는가"라고 하기에 나는 말하였다. "그렇지가 않다. 거위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는 것이 모두가 타고난 천기(天機)에서 스스로 움직인 것이며, 개미가 무더기로 모이고 벌들이 노니는 것이 모두가 신령한 이치로 귀결된다. 이와 같다면 어떤 언어이든 선이 아니겠으며, 무슨 법인들 도가 아니랴. 하물며 분별지를 버리고 주관적인 회포를 잊는 담론이 어찌 참선으로 들어가는 초보의 경지가 아니랴. 또한 선은 나라는 아집이 본성을 가렸기 때문에 아집을 타파함으로써 선의 이치에 도달함이 아니겠느냐. 노자는 이러한 경지에 먼저 올랐던 것이다. 가령 세상을..
「―인간은 왜 그런 착각(자유의지가 있다는 착각)을 하도록 만들어졌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착각이 없다면 '나'와 '자아'가 연결될 수가 없다. 매 순간마다 수백 가지 다른 이유들로 선택을 하게 되는데 '나'라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이런저런 이유로 선택을 했다는 스토리를 만들면 그 스토리를 통해 연관이 없는 점들을 연결시킬 수 있다. 이렇게 점들을 연결시켜주는 선이 결국 '나'라는 자아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 자체도 사실은 착각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김대식(뇌과학 전공 카이스트 교수) 인터뷰 중 「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
Enlightenment, Self, and the Brain. How the brain changes with final liberation from Todd Murphy on Vimeo. 신경신학자 토드 머피의 강의 세 번째. '나'라는 개인의 실체가 있다는 느낌, 즉 '자아'의 감각은 뇌가 만들어내는 신경학적인 환영(hallucination)임을 설명하며 '무아'를 주장한 붓다의 의견이 과학적으로 옳았음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나', 개인(individual)이 있느냐는 질문의 답은 '없다'이다. 깨달음은 바로 이 '나'라는 자아의 느낌이 소멸하는 과정이다. 강의는 뇌의 어떤 변화가 이런 과정을 만들어내는지 뇌 각 부위의 역할과 상호작용을 통해 깨달음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
"온갖 것이 실재라는 이성의 확신이 진리로 고양되고 이성이 자기 자신을 세계로, 그리고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기에 이르렀을 때, 이성은 곧 정신이다."* - 헤겔 14/01/08 * 헤겔, 임석진 옮김, 에서 인용, 수정. 2014/01/02 - 모든 것은 실재다 헤겔
「형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기이다. 기의 속성은 본래 비어있음이며 신神의 작용을 한다. '신神'과 '성性'은 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장재 「이 수업[기적 수업]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하게 요약될 수 있다. 실재는 결코 위협받을 수 없다. 실재가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안에 신神의 평화가 놓여 있다.」** - 헬렌 슈크만 14/01/02 * 이현선, 에서 봄. ** 헬렌 슈크만, 에서 봄. 2013/12/07 - 삶의 신비 2013/12/06 - 마야(maya)의 참뜻 장재 실재
"삶의 신비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실재다."* (The mystery of life is not a problem to be solved but a reality to be experienced.) - 반 데 리우브(van de Leeuw) 13/12/07 * 앨런 왓츠, 에서 봄.
「그러나 인도 사유의 전반적인 흐름은 바로 그것이 피해야 했던 덫에 빠져들었다. 즉, 인도인들은 대부분 마야(maya)가 추상적인 세계라는 점을 깜빡 잊고, 이를 직접 경험의 대상인 구체적인 자연세계인 줄 잘못 알았다. 이런 혼동 때문에 일체의 감각 경험을 배제한 의식을 통해서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것이다. 마야(maya)를 감각을 통해서 투영되는 사유의 환상이라 여기지 않고, 감각 자체의 환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더군다나 감각 경험이 영적 통찰력을 획득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라 여겨서, 감각 경험을 의식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요가를 개발했다. 이 요가로 단일한 대상에 대한 지속적이고 배타적인 집중력 ― 바로 무명(avidya)! ― 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