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허무여 안녕 본문

명문장, 명구절

허무여 안녕

모험러
아래 인용한 켄 윌버의 말들 중 특히 후반부("... 내 인생의 목표는 절망의 뇌출혈 속에 조용히 피흘리며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는 내가 갖고 있던 마음병의 실체를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본 듯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예전 어떤 수행자들은 침묵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를 단지 만나뵙는 것만으로도 자기 내면의 고뇌가 불타 사라지곤 했다(<달과 6펜스>로 유명한 서머싯 몸은 마하리쉬를 뵙는 순간 기절했다). 내겐 켄 윌버가 그렇다. 그를 대하고 있노라면, 혜능이 시장바닥에서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들었을 때처럼, 마치 번개가 내려치듯이, 정체성의 위기와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마음과 허무가 가라앉는다.

「윌버: ... 이 분기점-5[세계주의]의 자세는 매우 희귀하고 매우 엘리트적이고 매우 어려운 성취입니다. 이러한 세계중심적 자세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거쳐 온 기저단계 모두를 한 번 보십시오!

지금 당신 자신은 자아중심적 조망에서 민족중심적 조망으로 다시 세계중심적 조망으로 진화해 왔고, 그러므로 당신은 모든 개인은 인종이나 성별이나 신조에 무관하게 동등하게 취급되고 동등한 기회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보편적 다원주의의 이러한 자세로부터 당신은 순수하게 문화다원주의적이고 탈관습적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신이 보편적인 취급상대로 대우하는 대개의 개인들은 당신이 지닌 보편주의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핵심으로 가면 여전히 자아중심적이거나 민족중심적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당신에게 똑같은 호의를 절대로 베풀지 않을 개인들에게까지도 보편적인 고려대상을 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형적인 문화다원주의자들은 일련의 매우 이상야릇한 모순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선 무엇보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비엘리트주의자이거나 반엘리트주의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탈관습적이고 세계중심적인 다원주의를 실행하는 잠재능력은 매우 희귀하고 매우 엘리트적인 달성입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미국 인구의 4%만이 실로 이같이 고도로 발달된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문화다원주의는 엘리트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매우 엘리트적인 자세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문화다원주의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몹시 안개 자욱한 어떤  길로 내려가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질문: 이를테면요?

윌버: 문화다원주의는 모든 사람은 분산적이고 세계중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평등하다는 견해에 따라 모든 개인을 동등하고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매우 새로운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다원주의는 그와 같은 높은 견해에 도달하는 것이 매우 희귀한 성취라는 사실과 높은 견해 그 자체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문화다원주의는 그러한 견해에 도달하도록 만든 것, 즉 문화다원주의가 애초에 보편적 다원주의를 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일련의 발달 과정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문화다원주의는 아직 그 같은 태도에 도달하지 못한 개인들에게까지, 그 멋진 보편적 다원주의를 기꺼이 이용해 자신의 구두나 닦을 개인들에게까지 그 같은 발달의 결과들을 적용합니다.

따라서 문화다원주의자들은 천연덕스럽게 그러나 혼동 속에 말하기를, 우리는 그 어떤 자세도 또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므로 모든 개인들과 모든 문화적 운동들도 완전히 동등한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왜 우리가 나치와 KKK단은 멀리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문화다원주의적이고 다양성에 대해 모두 찬성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치를 배제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동등하지 않은가요?

물론 그 대답은 '아니다'이지요, 모든 자세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계중심적인 것이 민족중심적인 것보다 더 좋고, 이것은 또 자아중심적인 것보다 더 좋은데, 왜냐하면 각각은 더 깊은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와 KKK단은 특정한 인종 지상주의 신화에 바탕을 둔 민족중심운동이고, 세계중심적 조망에서 볼 때 우리는 그들을 열등한 자세를 가진 것으로 판정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문화다원주의자들은 이러한 판정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혼동에 빠져서 도덕적 자세들 사이의 구분 자체를 몽땅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자세는 평등하므로 여하한 판정도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보기 때문입니다(이것은 극단적인 탈근대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반위계적" 자세입니다).

....

질문: 그러면 이것은 이 단계의 병리에 관계되는 것인가요?

윌버: 네, 이 단계와 다음 단계에 관계되지요. 일단 당신이 세계중심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일단 당신이 당신의 문화를 면밀하게 조사하고 나서 혹시 그것의 사회중심적이거나 민족중심적 편견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힘차게 개척해 나간다면, 일단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과연 당신은 정확히 누구입니까? 예전의 편안했던 그 모든 역할을 벗어던진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떻게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 건가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에릭슨은 이것을 "정체성 위기"라고 일컬었고, 그래서 아마도 그것은 이 분기점의 중심적인 "불편함"이나 "질병"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문화다원주의자들은 엄청나게 심각한 정체성 위기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공식적 입장은, 엘리트주의는 그 어떤 종류이든지 간에 나쁘다는 것이므로, 그렇지만 그들의 실제적인 '자기'는 사실상 엘리트적인 '자기'이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적인 '자기'에 대해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를 은닉하고 왜곡하고 기만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만인은 민족중심적이 아닌 방식으로 공정하게 심판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만인은 절대로 심판받아서는 안 된다고, 즉 모든 도덕적 자세들은 대등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말투를 옮겨 갑니다. 물론 이것은 아무것도 절대로 더 우월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는 세계 내에서 우월한 그들의 자세는 제외하고서 하는 주장입니다(아이쿠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나겠군요!). 그렇다면 그들은 그 자신의 엘리트주의를 부정하는 엘리트적 자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적인 정체성에 대해 거짓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짜 자기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정체성의 위기입니다.

...

질문: 또한 선생님께서는 켄타우로스를 실존적 수준이라고도 일컫고 계시군요.
 
윌버: 그럼요. 말하자면 이 단계에서, 즉 진화의 과정에서 최소한 이 시점에 오면 당신은 정말로 독자적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은 더이상 사회의 관습적 역할과 규칙을 맹신하지 않습니다. 더이상 당신은 민족중심적이고 사회중심적이 아닙니다. 당신은 세계중심적 공간으로 깊숙하게 진입해 왔습니다. 거기서는...

질문: 이 단계 역시 세계중심적입니까?

윌버: 형식적 조작심 단계(분기점-5)나 그 너머의 모든 단계들은 세계중심적이거나 글로벌합니다. 그들 모두는 탈관습적익고 보편적 조망주의의 기반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 상위적인 더 심층적 단계들은, 단순히 이 세계중심적 자유가 더 심층적이고 순수하게 영적인 영역으로 진입해 들어오게 되면서, 더욱 더 많이 이러한 세계중심적 자유를 드러내 보여 줍니다.

이것은 이야기를 조금 앞서나가게 합니다만, 켄타우로스 수준, 즉 실존적 수준에서 당신은 더이상 자아중심적이거나 민족중심적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세계중심적 공간으로 깊숙이 진입해 왔습니다. 거기서는 문화다원주의자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당신은 이 새로운 자유 속에서 미끄러져 넘어져서 매우 나쁜 상황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질문: 선생님께서는 이 새로운 자유를 "무조망주의"(aperspectival)라고 일컫고 계시군요.

윌버: 네, 진 겝서(Jean Gebser)의 용어로는 그렇습니다. 비전-논리는 모든 서로 다른 조망들을 망라하여 합하는데, 그러므로 어느 한 조망을 다른 것에 비해 무조건 자동으로 특별나게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즉, 그것은 무조망적이 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다른 모든 상이한 조망을 고려하기 시작하게 되면 그것은 몹시 현기증이 나게 하고 매우 무조망적이 되게 하고 심하게 방향을 상실해 버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전-논리의 이 새로운 무조망적 자각인식 안에서 당신은 아주 완전히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조망들은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 되기 시작하고,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바탕이 되는 것이 없고, 당신의 머리를 쉬게 할 그리고는 '나는 드디어 알아 냈다!'라고 말할 최종적인 장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조망들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곧 모든 조망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조망들이 상대적이라고 해서 어떤 것이 다른 것들보다 여전히 언제나 상대적으로 더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막지는 못하지요! 세계중심적인 것은 분명 자아중심적인 것보다 더 좋고, 민족중심적인 것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각은 그보다 더 얕은 선행하는 단계들보다 더 깊은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단지 조망들의 상대성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당신을 무조망적 광기, 즉 의지와 판단력을 현기증나게 하는 마비상태로 몰아 넣습니다. "그것은 모두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더 좋거나 더 나쁜 것은 없고 어느 입장도 다른 것보다 더 나을 게 없다"라는 식입니다. 그 같은 자세 자체가 자신의 입장이 다른 대안들보다 더 좋다고 주장하는 것이란 사실을, 즉 그것은 표준적인 수행상의 모순이란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다원주의자들은 매우 고상한 의도를 갖고서 이따금씩 비전-논리의 이 수준까지 상승하고 나서는 통상 무조망적 광기에 즉각 굴복하고 마는데, 이러한 점을 그들은 착실하고 의심없이 말 잘듣는 학생들에게 그럴듯하게 떠벌리며 약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비전-논리의 무조망적 공간이 단순히 의미하는 바는, '영'(Spirit)은 무한히 불가사의한 조망들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그 과정에서 완전히 맹목적인 상태로 되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다 한층 더 위로의 탈중심화이고, 보다 한층 더 위로의 초월이고, 자아중심주의[이기주의]에 반대하는 진화과정에서의 또 하나의 선회입니다.

...

질문: 켄타우로스와 그 실존적 세계관이 동일시되면서 켄타우로스 단계에 고착되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분기점-6의 융합단계에 해당하지요.

윌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실존적 몰입은 모든 실재에 대한 당신의 언급 기준점이 됩니다. 당신의 고뇌를 드러내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더 당신은 우주적 광기의 한 실례로 당신의 이를 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욱 더 진지해집니다. 그것은 또한 뇌리를 스치는 일종의 암시같이 당신의 이마에 몇 개의 대못을 박도록 도와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하한 경우에도 그들로 하여금 당신이 미소짓는 것을 보게 해서는 결코, 결코, 결단코 안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의 비진지성을 폭로할 것입니다.

실존적 수준의 전체 핵심은, 말하자면 당신은 아직 트랜스퍼스널 수준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렇지만 개인적 수준에도 더 이상은 총체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전체 개인적 영역은 그 매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으로 아주 심각하게 무의미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물론 미소지어야 할 이유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입니다. 여하튼 좋은 것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죽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실존의 의미에 대한 그리고 널리 만연되어 있는 그 의미의 결핍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아마도 분기점-6의 병리의 중심적 특색이고 실존적 요법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 있는 점은 성장 발달의 모든 정통적 표준에 따르자면 켄타우로스 수준은 행복하고 충만하고 즐거움에 넘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림 9-3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에 가서 그것은 통합되어 있고 자율적인 '자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기'는 발달의 모든 표준에 따르자면 왜 언제나 미소짓고 있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미소짓지 않고 있고, 뼛속 깊숙이 불행한 것입니다. 그것은 통합되어 있고 자율적이면서도 비참한 것입니다.

실존의식은 '개인적' 영역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맛보아 왔고,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는 그것의 애원 속에서도 무미건조해지기 시작해 왔습니다. 그 어떤 체험도 이제 더이상 좋은 맛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이제 더이상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이제 더이상 추구할 값어치가 없습니다. 한 개인이 이러한 보상들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한 개인이 그 보상들을 아주 홀륭하게 성취해 냈고, 그것 모두를 맛보았고, 그래서 그것 모두가 결핍되어 있음을 알아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이러한 영혼은 그다지 마음껏 미소짓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위안이 소용 없게 되어 버린 영혼인 것입니다. 세계는 최대의 승리를 쟁취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곧바로 무미건조해져 버린 것입니다. 성대한 향연은 열리자마자 사라졌고, 그 인텔리는 전체 사태를 바라보며 조용히 쓰디쓴 웃음을 짓습니다. 향연은 그 으리으리하게 화려한 영광 속에서도 덧없이 순식간에 끝날 뿐입니다. 한때 내가 그렇게도 엄청나게 많은 의미와 그렇게도 무척이나 간절한 소망과 그렇게도 아주 강렬하게 희망을 갖고 매달렸던 것들 모두가 녹아서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고, 기나긴 외로운 밤이 지나는 동안 어느 이상한 시점에서 증발해 버린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 내가 환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누가 저 어둡고 지옥 같은 밤 속으로 조용히 흘려 보낸, 도움을 바라는 나의 요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어디서 나는 나의 옆구리를 매일 찌르는 칼과 창을 견뎌 낼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을 찾아 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도대체 왜 내가 그런 노력을 해야 하나요? 그 모든 것은 먼지로 되고 말 텐데.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게 되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싸워야 하는가, 굴복해야 하는가, 이것은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닙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절망의 뇌출혈 속에 조용히 피흘리며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에 언급한 것이야말로 곧 모든 욕구가 희박해지고 창백해지고 빈혈상태가 되어 버린 영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을 정면으로 맞서는 동안 철저하게 그것에 넌덜머리가 난 영혼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개인성이 총체적으로 무미건조해져 버린 영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초개인적 영역의 가장자리에 와 있는 영혼입니다.」*

13/11/14

* 켄 윌버, <모든 것의 역사>에서 인용, 수정, 강조는 원문.

'명문장, 명구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극단적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0) 2013.11.17
유아독전적 환상  (0) 2013.11.16
깨달음엔 끝이 없다  (0) 2013.11.15
허무여 안녕  (0) 2013.11.14
생명의 위계  (0) 2013.11.13
상승과 하강의 통합  (0) 2013.11.13
영의 다른 명칭  (0) 2013.11.13
무심(無心)의 의미  (0) 2013.11.13

모험러의 책방

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0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