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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비켄의 도살자 게롤트, 중립의 댓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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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스트레고보르에게 저주의 날에 태어났다며 괴물로 몰려, 평생을 핍박받고, 겁탈당하고, 쫓기고, 고문의 삶을 살아온 렌프리.

렌프리는 마치 들짐승을 쫓듯 자기를 몰이사냥을 해온 마법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렌프리는 게롤트에게 호소한다. 

"당신은 위쳐야. 악한 존재로부터 위협 받는 인간들을 지켜 주는 수호자지. 

스트레고보르는 그 키키모어보다 더 지독해. 키키모어는 이성이 없는 짐승이고 그래서 살해를 하지. 왜냐고? 신들이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하지만 스트레고보르는 사디스트에, 위험한 미치광이 괴물이야.

이번 경우도 괴물 처치와 크게 다르지 않아. 게롤트, 스트레고보르를 죽이는, 덜 나쁜 악을 택하는 게 최상의 해법이라는 생각 안 해?"

공교롭게도 마법사 스트레고보르도 똑같은 이유로 렌프리를 죽여 달라고 게롤트에게 부탁했었다. 그것이 덜 나쁜 악이라면서.

게롤트는 스트레고로브의 청을 거절했듯이, 렌프리의 청도 거절한다. 게롤트는 악은 악이지, 덜 나쁜 악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렌프리는 미소지으며 말한다.

"덜 나쁜 악이 있다는 생각은 안 한다, 그 말이로군. 그거 알아? 당신 말이 옳아. 하지만 전부 옳은 건 아니고, 부분적으로만 옳지. 사실은 악과 덜 나쁜 악이 있는 게 아니라, 악과 더 큰 악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 둘 뒤엔 엄청나게 큰 악이라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 엄청나게 큰 악 말이야, 게롤트. 당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악.

그리고 게롤트, 그 엄청나게 큰 악이라는 놈은 당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이렇게 물으며 찾아올 거야.

'형제여, 선택하라! 나인가? 아니면 저것, 그러니까 피해가 더 적은 쪽, 좀 더 작은 악인가?'

결국 악이라도 좀 더 피해가 적은 악이 있는 거야.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그걸 선택할 수 없어. 단지 엄청나게 큰 악은 우리로 하여금 강제로 덜 나쁜 악을 선택하게 내몰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야."

게롤트는 렌프리에게 복수를 포기하게 하고 싶었지만, 렌프리는 그럴 수 없었다. 렌프리는 결국 칼을 뽑아든다. 당신이 선택한 대로 한 것처럼, 이젠 나도 내가 선택한 대로 할 차례라면서. 게롤트는 렌프리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말한다. 그냥 가라고, 우리가 서로 칼을 맞대는 순간 너는 죽는다고.

렌프리가 답했다. 

"나도 알아. 그런다 해도 나도.... 나 역시도 달라지긴 힘들어. 도저히 그게 안 돼. 우린 생긴 대로 살 수밖에 없어. 당신과 나는."

결국 게롤트와 칼을 맞댄 렌프리는 하체에 피를 쏟으며 죽어간다. 렌프리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밝은 빗줄기처럼 뿜어져 나와 화려하게 치장한 허리띠 위로, 고라니가죽으로 만든 장화 위로, 더러운 길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렌프리가 죽어가며 말한다. 

"가지 마....."

그녀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말했다. 게롤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추워.... 추워....."

게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렌프리는 또다시 신음소리를 내며 더욱 몸을 떨었다. 피는 빨리도 흘러 길바닥에는 피가 그득했다.

"게롤트..... 날 좀 안아 줘......"

게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렌프리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고, 길바닥에 한쪽 뺨을 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순간이 지난 후, 갑자기 마법사 스트레고보르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달려왔다. 마법사는 서둘러 그에게 오면서도 시체들이 보이면 빙 돌아 우회해 왔다. 

"도축기념 축제라도 열린 것 같구먼."

코를 킁킁대며 그가 말했다. 

"내 보았네, 게롤트. 수정구슬로 전부 다 보았어...."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하의 때까치 렌프리가 이렇게 완전히 죽다니."

게롤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 어서, 게롤트."

마법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마차를 가져오게. 렌프리를 탑으로 데려가자고, 부검을 해야 하니까."

그 말을 하며 마법사는 시신 위로 몸을 숙였다. 

게롤트가 칼의 손잡이에 손을 뻗어 재빠르게 칼을 뽑았다. 

"렌프리에게서 손 떼, 마법사, 그녀에게 손만 댔다간 그 즉시 당신 머리통이 길바닥에 나뒹굴게 될 테니까."

"무슨 일이야, 게롤트, 자네 돌았나? 다치더니 쇼크를 받았나 보군! 부검만이 그녀가 돌연변이 괴물인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세, 그녀가..."

게롤트는 다시 칼날을 세우며 말했다. 

"그녀에게서 손 떼."

마법사가 소리쳤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그러나 자네는 그녀가 진짜 돌연변이 괴물인지 절대로 확실한 건 알 수 없을걸? 알아 들어?

게다가 여기 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 이 사람들이 본 건 자네가 살해하는 장면뿐이었지. 게다가 좀 지독하게 죽였나?"

게롤트는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칼을 칼집에 다시 꽂고 떠나는 게롤트에게 돌멩이가 쉴 새 없이 날아왔다. 군중들이 던지는 돌멩이였다. 

마을 시장은 게롤트에게 떠나라며 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다시는. 그렇게 게롤트는 블라비켄의 도살자가 된다.

그런데 렌프리는 진짜 검은 해의 저주를 받고 태어난 돌연변이 괴물이었을까? 게롤트는 렌프리에게 물었었다. 너는 진짜 괴물이냐고. 

그 질문을 받은 아주 짧은 순간, 렌프리는 의지할 길 없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척 슬퍼 보였다. 

"나도 모르겠어, 게롤트."

렌프리는 속삭이듯 말했다. 

"젠장,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손가락을 베이면 피가 나오고, 매달 꼬박꼬박 월경도 있어. 발로 배를 차이면 배가 아프고 또 술에 취하면 머리가 아프지. 기분이 좋으면 노래가 나오고 슬프면 욕이 나와. 그리고 또... 아, 빌어먹을, 그만 하자. 위쳐, 너는 어떻게 생각해?"

게롤트는 말했다. 

"넌 괴물이 아니야."

- 안제이 사프콥스키, 함미라 옮김. 위쳐: 이성의 목소리.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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