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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주의는 철학의 목을 잘랐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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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주의는 철학의 목을 잘랐다

모험러

「우선 후설은 당대 학문의 상황을 '위기'로 진단한다. 그리고 그 위기는 근대 철학의 잘못된 문제 설정 때문이라고 규정짓는다. 그 문제설정이란 의식의 영역과 대상의 영역을 교량 없는 두 세계로 구분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가 경험되는 이 세계를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과 대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본질적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즉 우리 의식은 언제든지 그 어떤 '무엇', 즉 대상을 향해 있고, 우리에게 대상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은 그런 의식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대상으로 주어질 수 없다. 후설은 이를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말한다. 이 지향성이야말로 인식 대상이 대상으로서 주어지는 인식의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다.


후설의 전략은 명료했다. 근대 철학은 인간의 의식과 대상 사이의 지향적 관계를 주제화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두 영역 간의 다리를 끊어놓음으로써 인식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말았다. 근대의 형이상학은 그런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성을 절대화시켜버렸던 것이다. 또한 그 반대 진영, 즉 실증주의 진영에서는 형이상학의 과도한 요구에 저항하여 학적 탐구에서 인간 주관을 아예 배제해버리고 말았다. 후설은 이를 두고 실증주의가 철학의 목을 잘랐다고 말한다. 그 결과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실증주의가 객관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식 주관의 역할을 배제함으로써 가치의 문제가 학적 탐구의 영역에 속하지 못하게 되고, 오식 사실만을 문제시하는 학문만이 참된 학문인 양 오해되기에 이르는 것이 하나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학문의 이상이 변화함에 따라,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자연과학이 참된 학문의 이상이 됨에 따라 학문과 인간 삶 간의 연결고리가 아예 끊어져버렸다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자연과학의 방향에서 다시금 근대 철학이 분리해놓은 의식과 대상 사이에 교량을 놓으려 하지만 근대 과학의 기본 정신을 유지하면서 그런 작업을 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사실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듯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철학의 패러다임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도 아닌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신화와 형이상학, 그리고 과학은 모두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모델이다. 때로는 양립할 수 없는 관점에서 서로를 배척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학문적 유형은 하나같이 세계를 설명하려는 근본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학문의 역사를 횡적인 관점이 아닌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학문 형태들은 마치 한 생물종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처럼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문도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유비가 갖는 장점은 무엇보다 우리의 학문 현실을 잘 설명할 뿐 아니라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의 구별 없이 학문적 활동 일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른바 디지털 사회에서의 학문 현실을 고려하면 세계 자체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말하자면 세계에 관한 새로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16/05/21


* 박승억, <학문의 진화: 학문 개념의 변화와 새로운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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