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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적 실증주의 vs 낭만주의적 비합리주의 본문
「하버마스가 힘주어 말했듯이 계몽은 '미완의 기획'이었을 뿐이다.
분명히 1890년대의 주요한 지적 혁신자들은 인간 행동의 비합리적 동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논리적인 것, 비문명적인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의 재발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거의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위험할 만큼 애매하다. 이것은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관용, 심지어 편애까지도 암시한다. 사실은 그 반대가 진실이었다. 1890년대의 사회사상가들은 비합리적인 것을 제거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비합리적인 것에 천착함으로써 그들은 이를 길들여 인간의 건설적인 목표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다.
조르주 소렐과 빌프레도 파레토 그리고 에밀 뒤르킴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혁신자들은 단순히 인간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야말로 참된 의미의 사회적 진보를 위한 조건이라고 보았다.
철학의 혁신을 주장했던 후설도 참된 의미의 실증주의, 그리고 그런 실증주의를 낳은 계몽주의적 세계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식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 참된 의미의 객관성에 대한 물음, 보편적 지식의 추구를 통한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앙 등 후설 현상학의 가장 중요한 이념인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은 근대 계몽주의적 이념의 20세기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가 유럽 문화 위기의 또 다른 주범으로 비합리주의를 지목한것은 부분적인 타당성만 지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계몽주의적 실증주의가 왜곡되었다면, 낭만주의적 비합리주의 역시 왜곡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을 통해 사회를 혁신할 수 있을 거라는 단순한 신앙이나 그 반대 극단으로 치달아간 태도 모두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서로의 시선에 보이지 않았다는 사정이 그저 우연은 아니다. 어떤 한 입장을 취하면 그 시선의 지평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16/05/16
* 박승억, <학문의 진화: 학문 개념의 변화와 새로운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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